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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개념] 불교용어의 주객전도: 공염불.횡설수설.언어도단
한돌 이두석
2024. 7. 21. 2:29
언어란 끝 없이 변한다.
언어에도 생노병사
(이른바 생주이멸)가 있다.
신조어가 나타나고,
사어가 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쓰이던 단어의 발음이 변하고,
뜻이 변하기도 하고,
여러 뜻 이 더해지기도 하여
본뜻을 알기도 쉽지 않다.
반어법을 사용하는 경우에
상황과 맥락을 모르면
오해하기 쉽상이다.
그럴듯한 단어와 문장에
그럴듯한 논리까지 내세우는
언어적 오류까지 만든다.
블로그 이웃인 묘광월 보살님께서
공염불이라는 말이 전혀 본래의 뜻과
다르게 전용된 사례를 들면서, 쉽게 잘
설명하셨다.
(아래 묘광월 블로그의 공염불 참조 바람)
https://naver.me/GRoSZcjV
공염불(空念佛)(법현스님)
공염불(空念佛)(법현스님) 선거철이 돌아오면 출마자의 공약(公約)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그 많은 공약...
naver.me
그래서 내친 김에 공염불 외에 본래 깊은
뜻이 있는 말이 부정적 용어로 쓰이는
불교용어 2가지를 선택해서 설명하겠다.
바로 횡성수설과 언어도단이다.
횡설수설이란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흔히 알고 있다.
횡(옆)으로 수(아래 위)로 이리
저리 말을 하니 말은 말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이 말은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근기(개인의 그릇과 능력)
즉 학습능력과 상황에 맞추는 눈높이
수업과 같은 응병여락(병에 따라 약을
줌) 스타일의 설법을 뜻한다.
마치 초심자에게 일상언어로서 이해
를 시키고, 전문가에게는 전문용어를
활용해서 뜻을 전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횡설수설은 큰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비의 언어다.
불교의 초기경전만 보더라도 수준
의 차이가 매우 다양하다.
칠불통계게처럼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며, 마음을 맑게
하라'는 말씀처럼 삼척동자도 이해
할 수준의 말이 있다.
반면에, 유무중도와 같이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연기의 도리로서
논하거나, 제법무아와 같은 비실
체의 도리를 설명하는 최상위
레벨도 있다.
대승경전 중에 금강경이 속한 반야부
경전에 들어거면 부처가 아니므로
부처다라는 등등의(이른바 일본의
스쯔키 다이세쓰가 말한 즉비의 논리)
표현은 형식논리학(동일율, 모순율,
배중율)을 뒤집어 버린다.
반야부 경전의 엑기스를 모아 정리한
반야심경에 들어가면 색불이공, 공불
이색, 색즉시공...무수수상행식...무고
집멸도 등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불이'
'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초심자는
헷갈린다.
게다가 부처는 고통의 해결과
무관한 형이상학은 무의미하고
실익이 없으므로 즉답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위대한 침묵이라고
불교학자들은 칭송한다.
당시 인도철학의 주제가 상당
부분 말장난(희론 papanca:
word-play, pun)이라고 부처
는 반기를 들었다.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종교철학적
이슈에 대한 질문에 침묵을 지킨 다음
그 침묵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침묵은 상대방의 질문에 긍정인지
부정인지 정확허게 말할 수 없다.
안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설상
가상 침묵까지 사용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부처님의
말을 조선시대 율곡 이이는
젊을 적에 절에서 불경을 읽고
창광난설이라고 혹평했다.
소설 어린 왕자를 보면 언어는
오해하기 쉽다고 하였는데,
율곡 또한 단단히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율곡이 과거공부를 내팽겨치고
절에 간 까닭은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인생무상을 느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아직 앳된 청년에 불과한
그가 비록 천재라고 불리는 인물
이어도 오늘날 언어철학은 고사
하고,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에
담긴 '도가도 비상도'의 이치조차
깊이 깨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 말을 했다가 저 말을 했다가,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등의 물음
(이른바 14무기: 고대 인도철학
에서 가장 논쟁이 된 최고의 핫이슈)
과 같은 대표적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입을 다믈었다.
게다가 윤회에 관해 언급하면서,
무아를 말한다.
이른바 유아-윤회와 무아-
윤회의 논쟁이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의 현학적인
철학적 용어, 예컨대 불이사상
(the thought of non-duality)
까지 등장하고, 능가경의 표월지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와
일자불설(한 마디도 설하지 않음)
라는 글이나 언어도단이라는 글도
보았을 터이니, 율곡은기가 꽉
막히고, 노르아드레날린이 엄청
분비되는 신체적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 선불교에서는
언어의 침묵을 더욱 더 중시하니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취지는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
라 언어에 담긴 개념을 실체화
시키는 고정관념을 배격), 마침내
율곡의 머리 속에 좌뇌와 우뇌는
이리 저리 좌우상하로 흔들리는
리히터 9의 멘붕이 왔을 것이다.
언어적 사유에 의한 통속적,
보편적 접근에 의해서는
진리의 참된 이치를 온전히
체득할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
하는데, 경전을 글로서 이해하지
못하면 명상수행을 통해서라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치 못한 것은 오히려 명상
수행은 더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
이다.
때로는 글을 몰라도 바로 명상을
통해 이치를 터득하거나, 부처의
설법을 듣고 바로 아라한이 되는
최상근기의 경우도 있음을 경전,
게송(장로게, 장로니게), 율장,
주석서에 나온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다리 타고 올라 가듯이 step
by step 이른바 점수적 방법
이 일반적 원칙이다.
그래서 말과 글을 통해 기본 개념
을 파악한 다음 명상수행을 하게
된다.
불교의 명상은 한 마디로 언어적
사유의 탈출이다.
개념(concept)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명상이다.
불교 명상수행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를 양날개로 하여 나아가는데, 사마타
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작게는 4선정,
크게는 구차제정(아홉 단계의 선정:
4선정[색계 4선], 4무색정, 멸진정)
이다.
그런데 명상의 첫 출발인 4선정에서
초선의 경지부터 바로 언어적 사유의
틀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초선의 특징은 심사희락과
심일경성**이다.
2선의 특징은 심사(=각관)
가 탈락되여 언어적 사유가
멈춘다.
**초선의 심사희락과 심일경성
[1] 거친 생각(또는 일으킨 생각)[심]과
[2] 머무는 생각(또는 미세한 생각)[사]
이라는 두 가지 언어적(개념적) 사유와
[3] (관념적 경험으로서) 기쁨[희]과
[4] (신체적 행복함으로서) 즐거움[락]과
[5] 심일경성(집중:간단히 말해 마음
울 하나로 모음)
대부분 교관겸수 즉 말과 글을 배워
방향을 잡은 다음 무개념의 명상
(비상비비상의 선정 조차 뛰어넘는
멸진정)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수-상-행의 단계적 다스림)이
불교의 수행이다.
속세에서 개념 없는 사람은
모욕적 욕설이지만, 불교
에서는 뛰어난 성자를
상징한다.
말은 개념을 담고 있을 뿐이니
실체가 없음을 관념적 이해 즉
알음알이로 이해한 것 또한
개념일 뿐이니, 명상에 들어가
일정한 경지에 들어야 그 뜻을
참으로 체득한다.
즉 찬물인지 뜨거운 물인지 스스로
직접 먹어봐야 침으로 아는 것,
이른바 '냉난자지'라는 선불교
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언어적멸 과정의 시작인
초선조차 율곡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니, 부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을 끝까지 비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율곡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은
현대 철학과 과학이 도래한 시대
라도 일반인에게는 여전하다.
아직도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교정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불교가 어렵다는
혐의는 아직 남아있다.
다행히 비트겐수타인의 언어철학
과 소쉬르의 언어학 그리고 심리학,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철학가,
언어학자, 심리학자, 뇌과학자들이
부처의 말이 결코 횡설수설이 아님
을 상당 부분 증명했으니, 이 또한
시절인연이라....
이제 언어도단을 끝으로 마무리
지어야겠다.
속세에는 언어도단을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표현의 아이콘으로 전락
된 채로 사용되고 있다.
언어도단이란 말 그대로 언어의 길이
끊겼다 는 말이다.
본래의 뜻은 진리 즉 궁극적 세계는
언설로서 표현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진리와 언어의 관계를 다루는
중요한 논제이다.
언어도단은 언어로 다룰 수 있는
세계와 다룰 수 없는 세계로 나뉘어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언어로 다룰 수 있는 세계 또한
높낮이가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초기불교에서는
무상.고.무아의 이치를
여실지견하는 데 촛점이
있다.
그런데 대승 열반경은 정반대로
상.낙.아.정을 말한다.
무상과 항상, 고통과 즐거움,
무아와 유아는 정반대의 말이
라고 상식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반대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높낮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차원이 다르고 대상이 다르면 표현이
달라져야 하는 데, 그 관점을 무시하고
수평적 관점으로 보니 앞뒤가 안맞는
것이다.
불교가 어렵디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이유가 바로 높낮이의 단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다.
언어도단은 바로 최상위개념인
궁극적 실체 또는 실재는 언어로
표현불가능하다는 말인데,
표현가능한 언어의 세계와 함께
그 대상의 높낮이를 분명히 설정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실체론과 실재론을
살펴보자.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동서양 대부분에 해당하는
실체론(substantialism)과 불교
의 비실체론(non-~~)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최상위 개념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용어로서 지칭할 수 밖에 없다.
**궁국적 실재와 실체의 차이
궁극적 실재를 곧 궁극적 실체
(ultimate substance)의 동의어로
이해하는 불자들도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실체라는 말은 불교에서 자성이라는
용어로 사용되는데, 설일체유부
(all-existing school)가 당시의
인도철학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유위법(현상계)의 경우 각각 다른
성질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예컨대 땅은 단단하고(견), 물은 축축
하며(습), 불은 뜨거우며(난), 바람은
움직임(동)의 특질을 나나태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부정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일정한 조건이 모이면 그러한 특성이
유위법의 영역에서는 드러난다 말이지,
고정불변의 존재나 그 실체를 강조하려
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의 출발인 중관학파에서
무자성을 주장한 것은 무위법(절대계)
을 가리키는 것이니, 가리키는 대상
이 다르므로 그 차원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므로 언어적 표현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람 몸의 간에 있는 세포
는 간의 기능과 관련된 고유한 특성
이 있지만, 모든 세포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피할 수 없으며, 세포의 구성
요소도 분석해보면 여러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조건적, 관계적 즉 연기적
으로 있듯이 대상과 관점의 차이에
따른 표현이 있을 뿐이다.
논쟁의 상당부분이 범주의 오류로
인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대승의 열반경에서
상.낙.아.정이라는 열반4덕은
궁극적 실재를 뜻하는 차원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영역이나 범주(category)
를 잘 살피지 않으면 위와 같이
갑론을박울 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교리에서 체.상.용 또는
체용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것도
체라는 말을 실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이분법적 기능을 가진 언어
라는 도구에 지나친 역할을 맡겨 비실체론
의 차원 즉 생성적, 관계 중심적 세계를
표현하라고 하는 것은 화가 초년생에게
피카소 그림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있음을 전제로 한 유적 표현과 없음을
나타내려는 무적 표현, 그리고 중도의
언어에 의한 표현에서 결론은 언어는
진공묘유적 표현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는 점이다. 언어는 정보전달의 지시적
기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진공묘유
에서 "묘유"의 관점에서 표현하여 공의
도리를 설명해야 한다.
원효가 '십문화쟁론'에서 중관학파는
'파하고 파하니'(부정의 부정) 세울
수가 없다라고 한 이유를 잘 헤야려야
한다.
여기서 종교철학의 전문용어인 궁극적
실재의 뜻을 살펴보자.
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라는 이치 자체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이치라는 뜻의 최상위
개념이다(위애서 언급한 열반경의
상낙아정).
여기서 개념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억지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억지로 이름을 붙여 일심
(One-Mibd)이라고 하듯이, 궁극적
실재는 뜻의 용례를 잘 헤아려야 한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조건적 형성의
모든 존재는(제행 conditioned things)
지속적으로 변한다(무상 impermanent)
는 뜻이다.
그런데 제행무상의 경우 그 이치가 갑자기
변하여 제행항상의 이치로 변하거나, 조건
적 변회 없이도 우연적, 랜덤식의 불규칙적
현상을 일으키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므로
그러한 불변의 이치가 궁극적 실재이다.
즉 "제행무상의 원리 자체는 변하지 않고
실재한다"는 말이다.
또한 제법무아의 경우 갑자기 제법유아가
되거나, 어떤 영역은 유아가 되고,
어떤 영역은 무아로 되는 그런 이치는
없다는 뜻으로서 궁극적 실재이다.
즉 제법무아라는 원리 자체는 변하지
않으면서, 실체를 부정하는 원리는
실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라는 용어도
유신론적 세계를 지칭하는 경우와
무신론적 문화에서 사용하는 경우
에 그 의마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오해를 일으켜 불필요한
논쟁을 하지 않으려면 깊고 넓은
메타 인지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3단계의
표현(이것을 나는 언어표현 3단계
이론이라고 부르고자 헌다)이 필요
하다.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가 말하는 자성
(self-nature)으로서의 유(being)와
중관학파에서 공.가명.중도의 연기법
으로 설명한 진공묘유의 유(becoming)
그리고 궁극적 실재로서 유(reality)로
나누어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고로 유교의 주역에서 변역과
불역의 원리는 핵심적 패러다임이다.
쉽게 말해 궁극적 실재는 진리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언어도단은 진리를 언어라는
도구로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궁극적 실재는 실체론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경우에, 힌두교의 브라흐만,
기독교 의 창조주에 대해 인간의 언설
로는 다 드러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특히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을
보면 기독교에도 개념적 분별의
도구인 언어의 한계성을 인정한다.
하물며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경우 그 어려움은
가중된다.
언어와 관련하여 불교의 진리를
표현할 수있는 말을 하나만 선택
하라면 "진공묘유"다.
절대계의 관점에서는 공이고,
현상계의 관점에서는 묘유디.
언어로 공의 도리를 직접 드러낼 수
없다. 언어도단의 자리이니 공, 비공,
비비공의 패러다임으로 부정에 부정
을 거듭하는 부정의 논리를 사용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묘유'의 '유'를 가지고 언설을 사용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달(진공)을 향한 손가락(묘유)
의 뜻이다.
언어로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도단이다.
언어와 사유의 끝에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양날개로
분별에서 무분별로, 무상.고.공.무아
의 통찰을 통해서 상낙아정의 길로
나아가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그 끝에서 태어난 무분별 지혜는
이제 중생을 향한 자비와 지혜의
언어로서 다시 태어난다.
위와 같이 언어의 한계성을 주로
논한다고 해서 언어의 효용성과
기능성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오해다.
언어의 발전 없이는 인류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기억하라.
언어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정치와 종교의
언어는 그 영향력이 크다.
그래서 분위기 파악 못하면
자리이타와 정반대의 자살
타살이 되고, 혹세무민의
폐해가 나타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적
언어를 상기하라.
https://youtu.be/-Ew8rVQyND8?si=MA1VRCT09rxxLBq3
그러므로 언어에 담긴 개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개념을 넘어 여실지견
한 다음 언어를 잘 사용하여 세상
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언어의 길
아고 숙명이며 양면성이다.
궁극적 실재라는 용어 자체도
불편해 하며 두드러기 생기는
옹졸함은 벗어나라.
악취공의 뜻을 이해하는 수준
이면 긍정적 어법으로 말하라.
**언어는 정보전달이 핵심이다.
소리, 말, 글 자체 또는 거기에
담긴 개념에 대한 집착을 버리
도록 대승 중관학파는 귀류법
을 사용했다. 언어의 한계와
실체적 사유를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부정적 어법은 공성에
담긴 작용이나 궁극적 실재조차
부정하면 언어의 전달이나 지시
기능조차 상실하게 된다.
더러워진 아이의 몸을 씻은
물을 버리다 아이까지 버리는
잘못을 범한다.
진공묘유라는 말은 진리의
체와 용을 잘 드러낸 말이다.
중도의 언어는 유와 무에 걸리지
않고, 초월과 내재를 같이 보는
대자유인의 언어다.
중요한 것은 집착을 버리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어의 표현에
대해 참고가 될만한 아래 내용
3가지를 잘 읽어보길 바랍니다.
(1)무자의 세 가지 의미
https://m.blog.naver.com/handolgs/222960348587
[언어와 개념] 무(無)자의 세 가지 의미
중국의 방박(龐樸)이라는 사람은 무(無)자를 세 개의 글자(亡. 舞. 无) 로 대표되는 세 가지 의미로 구분했...
m.blog.naver.com
(2) 논문:김종욱박사 논문
무아에서 진아까지
https://m.blog.naver.com/handolgs/222957675880
논문소개: 무아에서 진아까지
무아는 불교 교리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며, 지구상의 종교와 철학 등 다른 모든 사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
m.blog.naver.com
(3) 유와 무에 대한 표현
ㅡ대지도론 ㅡ
https://m.blog.naver.com/handolgs/222947452750
유와 무: 대지도론 제26권(운주사발행,2권 초품 중 18불공법 설명, 443~445쪽)
"부처님께서 곳곳에서 자아가 있다(유아)고 설하셨고, 곳곳에서 자아가 없다(무아)를 설하셨다. 만약 ...
m.blog.naver.com
아름다운 노래말과 시어에 담긴
리듬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무의식의 변화까지 가능하게 한다.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명언종자 즉
말이 씨가 된다는 원리를 중시하고,
불교철학의 끝판왕인 '대승기신론'
은 의언진여와 이언진여의 도리로서
언어와 진리의 관계를 설명한다.
환희심에 찬 찬불가, 찬송가 또는
염불이나 기도가 인간을 바꾸게
하는 뗏목이기도다.
뗏목이 마음에 안들면 요트로 바꿔라.
개구착(mouth-open is, namely,
an error)의 도리는 깊이 새기되
말과 글로서 중생을 구제하라.
그것이 바로 문자반야의 이치다.
이제 그 땟목의 이름을 아름답게
짓고 진리를 노래하고 춤추며
진리의 저 언덕으로 나아가라.
사진출처: 블로그 아도니스(님께 감사
드립니다)
ㅇ관세음보살의 노래
https://m.youtube.com/watch?si=XNawOq4-20t4NfzF&v=gOnR6QSuz5o&feature=youtu.be#bottom-sheet
ㅇ그레고리안 챈트
https://youtu.be/8nlnJDNaj78?si=vDb9S-gzjYZqtRF-
ㅇ파파로티의 아베마리아 https://youtu.be/XpYGgtrMTYs?si=geEEDt9lcyVhfL1W
ㅇ자비송 https://youtu.be/ILoceK-zWH8?si=kCRCm04GmxBRYGI0
[유나기도문]정목스님의 음성으로 듣는 자비송 l The Chant of Metta
#자비송#유나기도문#정목스님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진실로 행복하기를 기원하는'자비송'마음을 치유하는정목스님의 음성으로만나봅니다-제목 : 자비송 (The Chant of Metta)아티스트 : 이미 우이 (Imee Ooi) & 정목스님▶ 유나방송 콘텐츠 후원하기1.계좌후원 : 신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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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22일(음) 우암국교졸업(70년) 부산중졸업(22회) 부산공고(50회) 동아대법학과(84년 졸업) 전.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11기) 부울경 회장 연꽃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 / 스마트커플러(주)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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