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나임의 약속
구약성경에서 때로 하나님은 독특한 이름으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가령 연합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아브라함을 다시 공략할 수 있는 상황에서(창 1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방패」로 알리셨습니다. 이는 불안정한 침략적 상황에 놓여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친히 지키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마하나임」이란 이름으로 야곱을 만나고 있습니다.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두 무리의」 군대입니다. 한 무리도 아닌 두 무리의 군대로 자신을 야곱에게 드러내신 뜻은 무엇일까요?
오랜 외삼촌의 그늘에서 빠져나온 야곱을 외삼촌 라반은 7일간이나 추격하여 따라왔습니다. 결코 야곱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야곱을 해하지 못한 채,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아 야곱과 조약을 맺으며 영토 경계를 삼게 됩니다. 외삼촌과의 관계 문제가 일단락되고 이제 야곱은 20년이나 떠나있던 고향으로 향하면서 미리 고향집 동향을 살피고자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온 종들의 보고는 야곱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동생의 귀향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 형 에서가 4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야곱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자기를 속여 장자의 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에 대한 깊은 복수심을 안고서 형 에서가 다가오고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게 됩니다. 전에 형 한 사람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쳤던 야곱 앞에 무려 400명의 병력이 마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방향을 돌려 다시 외삼촌의 진영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경계석으로 엄격한 조약을 맺은 뒤입니다. 영토를 침범함은 곧 피의 대가로 이어지는 그런 조약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급박한 상황입니다. 「두렵고 답답한」(7절) 마음의 야곱은 아직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한 무리의 군대가 뒤편의 라반으로부터 애곱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하나님의 군대는 에서의 군대로부터 야곱을 지킬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약속이 「마하나임」의 이름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자녀를 지키며 보호하십니다. 야곱을 「마하나임」 두 군대의 하나님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도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여전히 인간적인 야곱
흔히 위기에 처하게 될 때 답답한 심정으로 인간적 방법을 강구하기 쉽습니다. 사실 약삭빠른 인간적 처신은 야곱의 장기였으며 본문에서도 그의 장기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첫째 형의 군대를 앞에 두고 야곱은 모든 짐슴들을 두떼로 나누게 합니다. 형 에서가 한떼를 치면 나머지 한떼를 갖고 도망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기도나 해볼까」하는 의도로 하나님께 아뢰지만(8-12절) 그런 기도는 평안과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형에게 예물을 드리겠다는 방법을 강구해 봅니다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야곱은 종들에게 가장 교묘한 마지막 작전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형에게 선물할 550마리의 짐승을 행렬의 선두에 위치시키도록 명합니다. 형을 만나면 우리 주인 야곱의 선물이라고 말하도록 손을 쓰는 것입니다. 상당한 물질적 보상으로 형의 상처를 위로하겠다는 계산입니다. 그 뒤에 두 떼의 짐승이 따르게 한뒤 두 여종과 그 자녀들을, 그 뒤엔 레아와 그 자녀들을,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따르게 합니다. 야곱 그 자신을 어디에 있습니까? 맨 끝에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비굴한 야곱입니까! 라헬과 요셉 그리고 자기만은 살아야겠다는 의도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오래토록 생명을 보존하고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하고자 하는 야곱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생명과 이익에 집착하는 인간적 술수와 나약함이 남아있습니다.
패배와 승리의 비밀
그러나 창 33:1-3로 자리를 옮겨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400인과 함께 도착한 에서를 가장 앞서 만나러 나간 사람은 다름 아닌 야곱입니다. 비겁자 야곱이 가장 선두에 나서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외견상으로 전과 달리 다리를 저는 야곱의 모습이 눈에 뜨입니다. 장애를 입어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중심은 담대해졌습니다. 분노에 찬 형을 최선두에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같은 변화에는 얍복강 나루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모든 가족과 짐승의 떼를 앞서 보낸 뒤 야곱 혼자 얍복강가에 남았을 때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야곱과 하나님의 대결, 과연 누가 승리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승리를 인정하며 그의 손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분명 일격에 환도뼈를 크게 다친 야곱은 패배자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야곱으로 이기게 해 주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애곱의 손을 번쩍 들어주셨을까요? 32장 26절의 야곱의 시인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말은 자신의 노력과 수단으로는 결코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두손 높이 들어 항복하는 야곱의 모습니다. 항복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도리어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맞아 환도뼈가 위골되어 장애자로서 절뚝거릴 때 야곱은 강자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까? 손을 들 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철저히 인정할 때입니다. 마하나임의 하나님은 높이 손 든 야곱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튿날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눈녹듯 녹여 놓았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얼굴을 비비는 눈물의 형제 상봉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들 역시 절대 의존자가 되어 야곱을 도우셨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