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고통 없는 지옥’이란 말이 있다.
고통이 없는 것이 지옥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복이란 뜻이다.
케나다의 브랜드 박사는 한센병을 연구하는 의사다.
그는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는 그분이 그보다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센병은 한 마디로 고통감각기관을 파괴하는 질병이다.
이 분은 한센병 환자에게 손가락만이라도 가시에 찔리거나 불에 대면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골무 같은 피부조직을 만들어 끼워주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피부만큼 민감하게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인공피부조직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말한다.
손가락의 경우 어떤 때에는 아주 격렬한 활동에는 잘 견딜 수 있도록 강인하기도 하지만 그릇에 손을 넣고 밀가루를 반죽하는 요리사나 방직 공장의 직물 감촉사의 경우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직물의 질을 비교할 만큼 아주 민감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손끝 조직이다.
동시에 뜨거운 물체에 닿기라도 하면 빨리 감지하여 화상을 입지 않도록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한센병 환자의 경우에는 이 감각이 없기 때문에 끔찍한 일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촌락에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숯불 가운데로 직접 들어가서 떨어진 감자를 주워오는 것을 보면 안다고 하는데 그만큼 감각이 없다고 한다.
브랜드 박사가 인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볼 때 관찰한 사실은 불타고 있는 양초의 심지를 손가락으로 끄거나 조각난 유리 위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한번은 브랜드 박사가 작은 창고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녹슨 자물쇠가 잘못되어 애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때 한센병 환자인 한 소년이 자신이 해보겠다고 하면서 한손으로 비틀자 자물쇠가 열렸다고 한다.
그런데 소년의 손가락에 뼈를 드러내는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을 발견했는데 피부와 지방 그리고 관절 까지 모두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이 한센병 환자인 소년에게는 손가락이 베이는 아픔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환자에게는 매일 손이 잘리고 발이 잘려 없어져도 아무 고통이 없기 때문에 손발이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 삶의 비참한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브랜드 박사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찬양하기 까지 했다.
싸이코패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감정적으로는 매우 깊이가 없다고 하며 울 줄을 모르고 웃을 줄을 모른다.
2) 아주 과장된 자존심과 자만심을 가지고 있으며
3)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한다.
4)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데 거짓말이 밝혀져도 당황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한다.
5) 스트레스 상황에서 매우 담담하고, 말초신경계가 둔감하여 무감정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싸이코패스는 심적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심적 한센병 환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 타인을 살해하고 상해를 입히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싸이코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자신의 스트레스에도 무감각하여 죄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무서운 병이 있는데 바로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영혼의 싸이코패스다.
죄의 고통에 대해 괴로워 할 줄 아는 마음이 없는 영혼의 싸이코패스는 영적 질병이다.
그러니까 싸이코 패스가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라고 한다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서 영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질병을 영혼의 싸이코패스라 할 수 있다.
영혼의 고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모든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 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으셨는데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더 이상 의로운 분이 아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죄인이기 때문에 죄로 인한 고통을 울부짖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될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뒤집어 쓰셔서 하나님이 외면하고 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시인 윤동주는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노래하면서 애통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 시는 윤동주가 모든 죽어가는 것들 때문에 괴로워 할 줄 아는 호젓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말한다.
심지어 잎새가 보이지 않는 아주 극미한 바람에 이는 모습에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공감하면서 아주 작은 고통도 고통으로 느끼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말하고 있다.
애통해 하지 않았을 때 나중 어떻게 될지를 주님께서 눅 6:2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웃는 자여 애통하며 울리로다” 울어야 할 때에 울지 않고 웃고 있기만 하면 나중에는 처절하게 울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어서 눅 6:21에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 역시 산상수훈의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와 맥을 같이 하는 말씀이다.
만약에 울어야 할 때에 울게 되면 나중에 웃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애통해 해야 할까?
1. 자신의 죄를 위해 애통해 해야한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결코 근심의 차원에서 말하는 애통이 아니다.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한 것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또 단순히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두려움이 생기는 그런 애통 즉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오니 견딜 수 없나이다” 와 같은 고통도 아니다.
‘애통’ 이란 원어의 뜻은 “우리 속에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하여 아파하는 것, 또 우리 안에 없어야 할 것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아파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속에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이다.
결국 주의 영이 떠난 것을 슬퍼하며 아파하는 것이 애통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우리 속에 없어야할 죄가 있어 그것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바로 애통이다.
애통은 시 51:3에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언제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주께 돌아가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불의한가를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렇게 탄식하는 애통이다.
이런 애통은 고후 7:10 “하나님의 뜻 대로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2. 이 시대와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나사로의 가족들을 보시면서 우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는 믿음 없는 세대를 위해 우셨고, 감람산에 올라 가셔서 예루살렘 성을 굽어보시면서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지게 될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당신을 위해 우는 여자들을 보시고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고 하셨는데 이것은 시대를 아파하면서 울라 하신 말씀이다.
지금은 시대를 위해 울어야 할 때이다.
믿음이 없는 이 시대를 아파하면서 울어야 하고, 교육이 무너져 황폐해진 이 땅을 바라보면서 울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황폐한 교육환경을 보면서 아파해 하고 통곡해야 한다.
물질 만능주위 시대를 아파해 해야 하고 애통해 해야 한다.
이 시대의 미디어 문화에 대해 아파하며 울어야 한다.
사기와 거짓이 만연한 이 시대를 아파하며 울어야 하고 거짓과 사술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아파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이 병든 사회와 시대를 아파해 하며 애통해 해야한다.
만약 죄와 슬픈 시대 현실 앞에서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애통해 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다.
위로란 말은 ‘곁에’ (전치사)라는 말과 ‘부르다’(동사)라는 말이 결합된 말이다.
곁에 부르심을 받아서 누군가 서 계시는 것이 위로란 뜻이다.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말씀 하셨는데 보혜사란 ‘곁에 부르심을 받는 자’를 말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주된 일은 곁에 서 계시면서 위로를 주시는 일이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그 죄에 대하여 참으로 아파하는 그 곳에 성령이 임하여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참된 위로가 임하게 된다.
성령께서 위로를 주실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영혼의 물이 있는데 바로 눈물이다.
눈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눈물 흘리며 울게 하시는데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영혼은 치유를 받게 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고통 중에 이뤄지는 것이다.
알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 하듯, 아기가 태어날 때 산모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듯, 애통함이 있어야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된다.
자신이 새로워지고 시대가 새로워지고 사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려야 한다.
눈물을 흘리는 자가 영혼이 치유를 얻고 구원을 얻을수있다.
눈물이 메마른 시대, 애통함이 사라진 시대, 그저 웃고 즐기는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어야 이 사회가 구원을 받을수 있다.
ㅡ좋은 만남교회 강창효 목사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