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8
12월30일[성탄 팔일 축제 제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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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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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yZzcTOIwHZc
[예수회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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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세상사나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두 사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품에 안아보는 특전을 누린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 의롭고 독실했습니다.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계셨으며, 성령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 36-37)
보십시오. 한나 예언자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짧은 문장 안에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7-80대 자매님들처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며, 교회 일에 협조적이었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는데, 신명기에 따르면 아세르 지파는 모세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모범적인 지파였습니다. “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아세르. 그는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되어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너의 빗장은 쇠와 구리 너는 한평생 평안하리라.”(신명 33, 24-25)
한나의 좋았던 시절 7년과 현재 나이 84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7년 세월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사셨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84세에 대해서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84가 됩니다. 일곱은 또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낸답니다. 열둘은 열두 사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한나 예언자가 84세란 표현은 그녀가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신앙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한나는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84년 동안, 아니 평생토록 충만한 은총 속에 주님을 섬겨온 신앙인의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한나 예언자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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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N5jJE-Rc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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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지 않는 희망은 합리화된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있는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고 싶고 힘든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저는 그저 인내를 가지고 희망하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이 강론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사.시.를 끊임없이 읽었고 단식하였습니다. 만나주실 때까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36-40절에서는 예언자 안나가 오랜 세월 동안 금식과 기도를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안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기도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메시아를 볼 수 있는 그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희망 속에서 도전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다림과 희망은 반드시 실천과 도전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월터 미티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제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 보여줍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주인공 월터 미티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월터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상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모험적인 삶을 꿈꾸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희망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희망과 상상의 반복일 뿐,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순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월터는 회사의 중요한 사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진정한 모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빙하를 건너고, 화산이 분출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도 연결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상과 희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도전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희망은 단순히 합리화된 절망일 뿐입니다. 월터의 삶은 도전과 실천이 있을 때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또 다른 실화를 통해 희망과 도전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아이’(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는 말라위의 한 소년 윌리엄 캄쾀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윌리엄은 극심한 가뭄과 기아 속에서 절망에 빠진 마을에 희망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학교 도서관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폐품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작은 자원을 활용해 풍차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이 풍차는 마을에 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그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윌리엄은 단순히 기적을 기다리며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들의 열정과 결심에 감동해 마침내 협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람과 아버지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와주었다가는 자신이 바람과 아버지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희망이 당신을 감동시키기를 기다리시는 이유입니다.
결국 윌리엄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참된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며, 희망은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무엇을 하였을까요?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또 어땠나요?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가요? 절망하지 않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희망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희망은 믿음을 낳고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희망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기다림, 실천하는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길들일 수 있는 도전과 준비를 통해 우리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응답하며 도전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참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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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봄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오니까, 교우들이 ‘창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창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하고 떠나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창고 공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초를 놓았고, 바닥, 벽, 지붕, 창문, 문, 전기 공사를 했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다음에는 청년들이 멋진 벽화로 마무리했습니다. 2월에 시작한 창고 공사는 7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도 매주 토요일 현장에서 형제님들과 함께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선물한 것은 ‘창고’가 아니라, 창고 공사를 통해서 형제님들과 청년들을 선물했습니다. 지난 8일에 ‘사도회와 이냐시오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도회는 40대 형제님 모임이고, 이냐시오회는 50대 형제님 모임입니다. 모임 자리가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창고 공사를 통해서 얼굴과 이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이 제게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세요?’ 제가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이유는 가능하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자녀와 아버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글을 쓰는 이유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악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 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여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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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2월 30일
복음: 루가 2,36-40: 안나라는 과부의 기쁨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탁하는 경우이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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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의 출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루카 2,36) 아세르 지파는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주목받는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나는 ‘여자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출신으로나 성별로나 그리 주목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가 한 일에 주목합니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여기서 ‘같은 때’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30-32)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순간입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한나 예언자는 시메온이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한나의 역할도 시메온 못지않게 비중 있게 바라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탄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모두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널리 알리는 매우 중요한 부르심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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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은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6-40)
1) ‘같은 때’는,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본 시메온 예언자가 하느님을 찬미한 때이고(루카 2,28-32),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시메온 예언자가 했던 말을 한나 예언자도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모든 이에게’ 이야기했다는 말이 시메온 예언자의 이야기에는 없고,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에만 있는데, 그 차이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시메온은 선포를 하고, 한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메온이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한 것이고, 그 찬미를 요셉과 마리아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들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같은 찬미를 했고,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언자가 두 명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두 명의 증인은 법적인 효력이 있음을 뜻합니다.(마태 18,16) 여기서는 두 예언자의 찬미와 증언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의 일’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2) 시메온 예언자는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 찬미에서 중요한 말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즉 이방인들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시메온 예언자가 처음으로 이방인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3) 또 시메온 예언자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난을 예언한 것도 시메온 예언자가 처음입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다.’ 라는 말은, 혹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4)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예수님께서 겪게 될 십자가 수난을 천사가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메시아가 겪어야 하는 고난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24,26)
<그리고 로마제국 식민지였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메시아’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는,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겪게 될 고난과, 자기 자신이 겪게 될 고난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응답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성모 마리아는 첫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5)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 교육 때에도 배우는 것이고, 세례를 받은 뒤에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강론을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로 끊임없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든 생활인 줄 몰랐다.”라고 불평하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그 경우는 예비 신자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았거나 성경 말씀 묵상을 제대로 안 한 경우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즉 세속의 부귀영화 같은 것을 바라는 경우이거나, 현세적인 소원이나 비는 경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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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바로 예언자 한나입니다.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오자..."(루카 2,27)
오늘 대목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메온이 아기와 그 부모를 맞아 하느님을 찬미하여 마리아께 예언을 하지요.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루카 2,38)
마침 그때 한나도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뵙니다. 그녀가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봅니다. 그녀야말로 하느님께 일생을 건 여인이니까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후 그녀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성전 안, 하느님 앞을 지키며 머무릅니다. 그녀의 단식은 세상의 죄에 대한 보속이고, 그녀의 기도는 우선, 하느님과의 사랑, 그리고 세상을 위한 전구와 중재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1요한 2,15)
여기서 말하는 "세상"을 성과 속의 대립 개념으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좋고 아름다우며 그 본성상 선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서간의 저자가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본성을 왜곡하고 해치는 악의 힘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영혼을 유혹하고 무너뜨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대적하게까지 만드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도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지요. 선과 악, 하느님과 베엘제불,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복음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그 축복 넘치는 장소 안에 있던 인물 중, "세상"에 한눈이 팔린 이가 있었던가요? 시메온과 한나, 요셉과 마리아, 네 명의 공동 주인공들은 오직 한 분 아기 예수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에 오기까지의 그들의 삶이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했었기에 이 엄청난 축복의 증인이 된 것이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세상 것입니다. 거기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이에게는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셔도 아무 관심 없을 것이니 그저 놓치고 말 것이고, 어쩌면 놓쳤다는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오늘 성전에 머물러 하느님을 섬기던 노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들이 바쳐온 사랑과 섬김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미 주님 곁에서 영원을 살던 그들의 행복은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갈수록 한나의 삶에 끌립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 멋지지 않나요?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르며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며, 세상의 아픔을 그분의 발치께로 보듬어 올리는 기도를 밤낮없이 지속하는 삶. 깨어 있어도 잠을 잘 때에도 오로지 하느님께만 몰두하니 주님께서는 구원의 현장을 그의 앞에서 감추실 수 없을 겁니다. 신비는 그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삶의 형태로 살아가건, 어떤 처지이건 영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발은 우리 사랑의 저울 추를 세상 쪽에서 하느님 쪽으로 조금씩 옮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Shall we start?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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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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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루살렘의 속량이 왔습니다. 죽음의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며 무너지고 짓밟힌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속량이 왔습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분이 속량되어 왔습니다. 군림하던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봉사하는 하늘나라의 새 예루살렘을 염원하는 속량이 왔습니다.
하늘나라의 새 예루살렘은 함께 사는 곳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감하는 곳이기에 행복합니다. 서로에게 들어주는 시노달리타스가 진행되는 곳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혼자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함께 가져서 행복합니다. 삶을 함께 하고 죽음까지 함께하는 형제자매 관계이기에 행복합니다.
하늘나라의 새 예루살렘은 우주가 형제자매로 사는 곳입니다. 형님인 태양이 되고 누이인 달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사랑스런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생명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서로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새가 되고, 꽃들에게 생명을 주는 춤추는 나비처럼 됩니다. 온갖 바다의 생물체와 물고기, 산과 언덕의 동물들이 매일 삶의 축제를 벌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이 되신 구세주 예수님으로 모든 관계는 회복됩니다. 불통에서 소통하는 관계로, 경쟁에서 친교의 관계로, 서로 죽이는 관계에서 생명을 주는 관계로 변합니다. 집착하는 관계가 자유로운 관계로, 무관심한 관계가 배려하는 관계로 쇄신됩니다.
예언자 한나는 속량이 되실 아기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람들은 출세할 아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이 되신 주님은 오셨으나 우리는 그 분을 몰라보고 더 큰 속량을 기다립니다.
오신 아기는 새 예루살렘을 세우려고 자신을 희생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고 예루살렘을 희생시킵니다. 인류의 죄값은 이미 속량으로 이미 치렀지만,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세상은 더 큰 죄를 저지릅니다.
주님, 여객기사고로 회생된 179명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또한 부상자 2명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유가족들에게는 위로의 은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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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자리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한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성실한 여인이었지요. 그녀의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생활의 행복을 누린 시간은 고작 7년이었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여든 네살이 될 때가지 거의 60년에 달하는 시간을 외로이 살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의지할 자식조차 없었으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겨드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하루 하루 극복해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한나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모든 과정을 이겨냈고 그 보답으로 구세주를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분을 굳게 믿고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부귀영화에 마음을 뺏기고, 시기와 질투에 마음을 뺏기며, 증오와 복수심에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하느님이 내 마음 안에 안계시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1분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한나 예언자가 주님을 직접 뵙고 구원에 대한 확신 속에서 참된 기쁨을 누린 것은 단 한 순간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깊은 절망을 통해 하느님께 더 깊이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때문에 하느님께 실망하여 신앙에서 멀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한나는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하느님께 대한 자기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많은 이들이 상황과 조건과 환경을 탓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핑계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절망과 고독 속에서 슬픈 결말을 맞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면 희망과 기쁨 속에서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실망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그것을 욕망하는 내 마음도 언젠가 사그러들고 말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분과 깊이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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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공기 소총 10m에서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 100번째 금메달을 거머쥔 반효진 선수가 자기 노트북에 붙여 놓은 쪽지가 화제였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에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큰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것에 맞게 자기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기억납니다. ‘말이 씨가 된다.’
생각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데도 생각을 닫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 변화를 멈춰버립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언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중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방에 나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그 부모가 한 번 만나주길 원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 세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가상의 세계에서의 삶만이 이 아이에게 행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 텐데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렇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해 볼 걸….”
생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힘을 키우는데 주님과의 대화는 결정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생각 안에서 큰 힘을 주시며,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후회를 줄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생각의 힘을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한두 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만을 바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큰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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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 흐르다>
루카 2,36-40 (한나의 예언, 예수님의 유년 시절)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 흐르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믿음을
믿는 이
믿음이 된다네
믿음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희망하는 이
희망이 된다네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된다네
사랑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기쁨을
기뻐하는 이
기쁨이 된다네
기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의로움을
의로워하는 이
의로움이 된다네
의로움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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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 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늘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 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한나' 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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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의 창, 영혼의 창>
-하느님 중심의 내적자유의 삶-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제주항공 참사...탑승객 181명 중 179명 사망, 세밑 한파 속에 모처럼 따뜻한 남국으로 여행했던 사람들, 타이 방콕발 제주항공 비행기의 무안공항에 착륙하던중 충돌, 폭발로 일어난 대 참사입니다. 179개 별이, 세상이, 우주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분들을 위해 오늘 아침 연미사봉헌합니다. 부활축제내 어제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상상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새벽 강론 쓰는 시간도 참담하고 무거운 마음에 주님의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조속히 사고가 수습된다해도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의 슬픔과 상처는 얼마나 깊을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참 허약한, 두렵고 불안한 삶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제일이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수록 초연한 무욕의 삶에 내적자유와 부요하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불가의 사고四苦와 사성제四聖諦의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진리에 공감합니다. 생노병사, 인생사고의 삶 자체가 고통이요, 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집멸도의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집착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기적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만이 탐욕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고해가 아닌 인생축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하느님 중심의 날, 성탄축제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 데 없는 짐
이보다 임 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12>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세상 떠난 그리운 셋째 형님입니다. 이 시를 강론에 올렸던 다음날 셋째 형댁에 들렸을 때 형님 방의 활짝 열린 커텐에 창이 참 맑고 깨끗하여 물었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어제 제 강론에서 이 시를 읽었다하는 것입니다.
예전 피정집에 안내할 때 방에 안내 받으면 피정자들이 본능적으로 확인하며 만족하며 반색하는 것이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창에 밝고 따뜻한 방입니다. 마음의 창도, 마음의 방도 이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정말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창을 지닌 밝고 따뜻한 방이라면 하루종일 방에 있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방의 창이 상징하는 바, 바로 하느님 향한 마음의 창, 영혼의 창입니다.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영혼의 창, 마음의 창을 지닌 이들이 바로 탐욕의 집착에서 벗어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이들입니다. 무소유의 삶에도 내적자유와 부요를 누리며 사는 무욕의 지혜로운 참 행복한 삶입니다.
정주의 관상수도자들이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답답해 하지 않고 내적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도 이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강론 쓰는 시간은 이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맑게 씻어내는 시간입니다. 이런 활짝 열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통해 은총의 햇살, 성령의 바람이 들어오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취도 관상, 관조할 수 있으니 참으로 내적부요에 내적자유의 참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런 하느님 향한 넓은 영혼의 창, 마음의 창을 지니고 있는지요?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한나라는 여예언자입니다. 앞서의 시메온에 이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한나입니다.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오로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니 한나의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은 정말 한없이 넓고 깊고 맑고 깨끗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구세주 탄생을 목격한 한나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하느님 향해 활짝 열렸던 영혼의 창을 지녔던 한나만이 예수 아기의 구원자 탄생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한나가 영혼의 창을 지니고 내적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함으로 세상을,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초연히 바라보며 탐욕이 말끔히 사라진 무욕의 삶을 살았던 한나같습니다. 탐욕의 어리석음이요 무욕의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의 무시나 멸시가 아닌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이탈과 초연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는 물론 예수님을 추종했던 모든 성인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하느님 향한 영혼의 창을, 마음의 창을 지니지 못했기에, 참 보물 주님을 모시지 못했기에 세상 것들의 집착에서, 탐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지만 결과는 중독에 폐인이요, 여전히 계속되는 영혼의 목마름에 굶주림입니다. 눈들면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마음의 창 가득히 들어오는 자나깨나 늘 앞에 있는 정주의 불암산을 볼 때마다 되뇌이는 자작 고백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주님
이 행복에 삽니다
나는”<2024.10.25>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집착의 탐욕에서 벗어나, ‘영혼의 창’ 활짝 열린 내적자유와 내적풍요의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 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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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무것도 너를>
미드라쉬라는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을 불러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답니다.
"내가 큰 승리를 거둬 환희를 주체하지 못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반대로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 하나를 반지에 새겨 넣어라."
보석 세공인은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런 양극의 상황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촌철살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인은 결국 지혜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솔로몬 왕자가 말했답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 중에 그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얘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오늘 서간에서 세상 것들과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은 지나간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것들은 본래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 욕망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며, 욕망에 따른 근심과 걱정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질 때 우리는 허무감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라질 때 영원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해가 나타나듯 세상 것들과 욕망이 사라져야 영원하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 갈망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 성인의 뛰어난 권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하나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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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하느님의 봉사자!>
오늘 복음(루카 2,36-40)은 '한나의 예언'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은 이름인데, 히브리어 '한나'는 그리스어로 '은혜'라는 뜻을 지닌 '안나'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는 프누엘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모세의 축복을 받은 아세르 지파 출신입니다.
한나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뵙고 기뻐 찬가를 부르던 때에 함께 있었습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한나는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 알린 '예언자'입니다.
한나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가련하고 보잘것 없는 여인'입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인간 취급을 당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인데, 거기에다 남편을 여위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낸 불쌍한 여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여인을 부르셔서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기쁜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소명을 받은 많은 예언자들은 대부분 한나 예언자처럼 약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당신 구원 사업에 도구로 쓰셨습니다.
요즘 시기적으로 많은 본당에서는 새로운 봉사자들을 뽑느라 애를 먹고 있을 것입니다. 사목위원들은 본당 사목자를 도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봉사자'입니다.
혹시라도 하느님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게 되면, 성모님의 순종을 드러내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도록 합시다!
어제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정말 내 일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희생된 분들의 가족들과 마음을 함께 합니다.
"주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안타깝게 희생된 179명의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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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성탄의
이야기가
우리의 온 세상을
다 뒤덮어
버렸습니다.
희망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이야기 하나가
우리에게
가장 강한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희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희망을 통해
우리들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납니다.
희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희망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아
주십니다.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되게합니다.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할
희망과 속량은
없습니다.
성탄을 기쁘게
이야기하는
우리의
일상되십시오.
우리 삶안으로
주님의 속량이
성탄으로
들어왔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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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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