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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외’되지 않으려는 타인지향의 사회…‘나의 인생’을 선택하라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
이 기획의 이름은 ‘세계를 뒤흔든 사상 70년’이다. 뒤흔든다는 것은 충격을 안긴다는 의미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당대에 큰 충격을 줬지만 현재에는 영향력이 적잖이 줄어든 저작이다. 1950년에 발표된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즈먼(David Riesman, 1909~2002)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말한다.
<고독한 군중>은 대중사회론의 효시를 이룬 책 가운데 하나다. 엘리트가 아닌 일반 시민인 대중이 주도하는 사회가 곧 대중사회다. 오늘날 서구사회든 비서구사회든 모두 대중사회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중사회라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에 대중사회의 도래를 예고한 <고독한 군중>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더불어 <고독한 군중>은 미국이 어떤 사회인지를 본격적으로 알린 책이다. 유럽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미국이 세계 헤게모니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다. 흔히 대중사회로 불린 전후 미국사회가 갖는 특징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데 이 책은 크게 기여했다.
지식의 발전은 사회·경제적 발전에 상응한다. 미국 사회과학이 전후 자본주의를 주도한 경제적 위력을 앞세워 지구적 차원에서 지적 헤게모니를 본격적으로 행사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C. 라이트 밀스의 <파워 엘리트>(1956),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풍요로운 사회>(1958), 윌리엄 콘하우저의 <대중사회의 정치>(1959),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1960) 등 미국사회를 조명하고 해부한 저작들의 선구자적 위치에 놓인 책이 바로 <고독한 군중>이었다.
데이비드 리즈먼은 <고독한 군중>에서 1950년대 미국이 비개인주의적인 사회임을 역설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사회의 타인지향적 성향에 주목
<고독한 군중>은 세 사람의 공저다. 리즈먼을 대표 필자로 네이던 글레이저와 루엘 데니가 함께 썼다. 부제는 ‘변화하는 미국의 성격에 대한 연구’다. 부제가 암시하듯 <고독한 군중>은 미국인의 사회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국민성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서다. 리즈먼은 사회변동에 따라 세 유형의 사회적 성격이 잇달아 등장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제시한다.
원시사회에 대응하는 ‘전통지향형’,
19세기 산업사회에 대응하는 ‘내부지향형’,
20세기 전반 도시생활에 대응하는 ‘타인지향형’이 그것들이다.
리즈먼이 특히 주목한 것은 타인지향형이다. <고독한 군중>에 따르면, 다수의 미국인들은 친구와 동료들이 갖는 가치체계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인지향형의 특징을 보인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조직으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고려하는 성격을 낳았다는 게 이 저작의 핵심 메시지다.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사회의 요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율형 인간이 돼야 한다고 리즈먼은 제안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뜻하는 개성의 존중은 근대 서구인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대중사회가 본격화되며 공고화된 현대사회에서는 개성보다 대인관계가 더 중요해졌고, 이로부터 비롯된 타인지향형의 사회적 성격은 불안감에 사로잡힌 ‘고독한 군중’을 등장시켰다. 개인주의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이 기실 비개인주의적인 사회임을 역설함으로써 <고독한 군중>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고독한 군중>은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근대인의 자유에 내재한 독립성과 불안감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주목했다면, <고독한 군중>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착안해 미국인이 갖는 사회적 성격의 변화과정을 분석했다. 이 책의 성공에 힘입어 리즈먼은 <군중의 얼굴>(1952), <개인주의의 재검토>(1954) 등을 출간했다.
■고독한 군중과 군중 속 고독
<고독한 군중>이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까닭 중 하나는 그 제목에 있었다. 1950년의 시점에서 미국은 인류가 이제까지 누리지 못했던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안정된 일자리, 표준화된 주택, 다양한 여가 등은 그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물질적 풍요라는 동전의 다른 면에는 고독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고독한 군중’이라는 말을 바꾸면 ‘군중 속 고독’이 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치고 군중 속 고독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책 제목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와 대인관계의 어려움이라는 사회생활의 조건은 이 책이 당시 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지를 설명해준다.
리즈먼은 ‘1961년판 서문’에서 이 저작에 대한 비판들에 응답했다. 당대를 대표한 정치학자 시모어 립셋은 미국인이 과거나 현재 항상 타인지향형 성격이라는 이의를 제기했고,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는 노동과 가족생활의 소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리즈먼은 내부지향형에서 타인지향형으로의 변화가 여전히 유효한 문제제기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식 대중사회의 지구화는 전후 70년의 세계사회를 특징지어온 흐름이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유기적 결합 속에 증가해온 문화의 표준화, 인간 소외, 정치적 무관심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민주화 시대의 한국사회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빈곤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자아정체성을 가져야 하고, 어떤 인생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인문학이 답변해야 할 실존적 질문이자 사회과학이 응답해야 할 사회적 질문이다. 오늘날 의미 있는 개인적 삶을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다소 철 지났다 하더라도 <고독한 군중>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어판 저작은
<고독한 군중>은 1964년 사회학자 이만갑 등에 의해 을유문화사에서 우리말로 옮겨진 이후 최근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다. 1962년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같은 제목의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일간지 칼럼들을 모은 이어령의 <고독한 군중>은 서구 문화에 대한 그의 번득이는 해석들을 담고 있다.
■한국의 대중사회는 1980년대지만 대중사회론은 민중담론에 묻혀져
대중에 대한 담론의 계보학은 멀리 19세기 후반 구스타브 르 봉의 <군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사상가들은 대중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명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대표적인 비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중을 이성·합리성·도덕성을 결여한 집단으로 파악했다.
대중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한 구스타브 르 봉(왼쪽)과 대중의 개방적이고 진취적 성향에 주목한 다니엘 벨.
미국 사회과학자들은 대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론을 제시했다. 다니엘 벨과 에드워드 실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민주적인 대중의 성격을 주목했다.
대중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은 문화적 기회가 시민사회에 확대되는 것을 간과하는 엘리트주의적 해석이라는 게 반론의 핵심이었다. 대중과 대중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유럽과 구별되는 미국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대중사회론은 유럽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을 선택했던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담론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대중사회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였다. <고독한 군중> 등 일련의 책들이 소개되고, 대중사회로서의 한국사회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대중문화가 급속히 유입돼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그 사회적 배경을 이뤘다.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1960~70년대의 산업화 시대에 상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미국 대중문화의 소비가 적극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중사회 경향이 부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영화와 대중음악, 근대화론·대중사회론과 같은 미국 사회과학 담론의 소비는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경제발전의 수준을 고려할 때 미국과 한국의 사회적 거리는 매우 멀었다. 자본주의를 선도하며 더없이 풍요로웠던 미국과 초기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이 여지없이 분출했던 한국은 상이한 발전단계에 놓인 사회였다. 요컨대, 미국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이질성과 문화적 동질성’이 1960~70년대 한국사회의 실체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대중 담론이 1980년대 이후 부상한 민중 담론에 의해 빠른 속도로 대체되고 망각됐다는 점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유기적 결합과 함께 등장하는 대중사회가 한국사회에서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였다. 대중사회론의 설명력이 높아진 시대가 도래했지만, 이미 소비된 담론은 위력을 되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