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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초생(釋迦牟尼佛初生) 일수지천(一手指天) 일수지지(一手指地)
주행칠보(周行七步) 목고사방왈(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也"
태어나자 마자 '내가 제일 존귀한 존재'라고 세상에 공표했다는 세존의 말씀입니다. 일컬어 우주만물을 통틀어 '나'라는 존재가 제일 귀하다는 인간의 실존성에 대한 석가의 깨달음의 철학이자, '고타마 싯탈타'라는 속인이 부처라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리는 현사(賢思)이기도 하지요.
우주라는 드넓은 공간에서 한줌의 티끌에 불과한 태양계의 별. 하지만 이 푸른별 지구는 어쩌면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체가 살고 있는 공간이요, 그 중에서도 이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교우하고 사는 인간이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씨받이와 교미를 통해 종족을 번식하여 개체를 유지하고 지구의 질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양보의 미덕으로 오늘도 안녕합니다.
봄이 오면 죽어가는 고목나무의 등껍질에서도 푸른 이끼가 피어납니다. 오월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귀중하여 금가루 섞은 모이를 주어 기르는 농부처럼 귀하디 귀한 계절입니다. 그러나 한달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찰나지요, 아쉽습니다. 한귀퉁이가 낡아 부스러진 오래된 벤치에 기대앉아 작은 공원에서 뛰어노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전거타는 아이들, 농구하는 성장(成長)들, 그리고 황토빛 축구장에서 열심히 공을 차는 조기축구 회원들, 모두는 저렇듯 부지런히 제 몸 놀려가며 운명을 개척합니다. 오래 살기위해서, 다이어트를 위해서, 고혈압이나 당뇨, 심장병이나 심지어 우울증에도 운동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아프리카 마사이족들의 걷는 방법을 본 따 마사이 신발과 워킹법을 개발한 스위스의 한 학자는 그 발견으로 세계적 선세이션을 일으키고 부호가 되었으며 그의 걷기운동법(MBT:마사이 워킹)은 지금 한국에서 조용한 혁명입니다. 하긴 세존께서도 태어나시자 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셨다니 걷기운동은 분명 좋은 것임엔 분명합니다. 소공원의 구석구석에도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열심히들 걷는 모습이 곳곳에서 아름답습니다.
공부는 어렵지만 책읽기는 조금 덜합니다. 공부는 시험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령 논문, 저술 등)를 대비하여 기억해야한다는 부담이 잔존하지만 책읽기는 그냥 읽으면 되기 때문이지요. 과거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것이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서점이 작고 영세하여 오랜 시간 책을 보고 있노라면 주인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서점에 들를 때마다 도서를 구입하기는 어려운 까닭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서점은 다른 모든 상행위가 그러하듯이 거대한 시장이고(대신 영세 책방의 존립이 어려워졌지만) 대형 서점들끼리의 경쟁은 고객 유치 마케팅의 당연성을 노크하여 이젠 서점마다 책읽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복사기에 책상까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북카페'같은 것이 성업중이고 인터넷에서는 상당히 할인된 금액에 서적을 구입할 수도 있는 등,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책읽는 환경은 얼마든지 구비되어 있지요. 허나 환경이 구비됐다고 인프라까지 형성되지는 않는 법, 마치 전세계적으로 수 천편이, 우리나라에서도 수백 편이 만들어지지만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는 몇십 편에 불과하듯이 수십 만 종씩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과거처럼 백 만을 넘기는 베스트셀러가 드문 것을 보면 역시 메스컴에서 한탄하듯 독서 인구의 함량은 미달인가 봅니다.
"이상문학상"을 매년 접합니다. 마치 초경(初經)을 겪는 소녀의 어쩔줄 모름이나, 처음 타는 비행기의 이륙에 오줌지리듯 일 년에 한 번씩 발표되는 그 해의 이상문학상은 나를 설레게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희귀하다는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이 우리나라에는 참 많습니다. 최고권위의 이상문학상을 위시하여 쌍벽을 이루는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한국창작문학상''동서문학상''대산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등 고인이나 단체가 제정한 문학상에다,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공모, 지자체의 문예상 등 이 나라에는 이루 헤아리기가 다 어려우리만큼 많은 문학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이 세계최고 권위의 문학상이고 미국에는 퓰리처, 영국에는 부커상, 불란서에는 콩쿠르상이 있듯이 한국에는 소설부문의 '이상문학상'과 시부문의 '소월시문학상'이 그래도 조금은 그 권위가 인정되는 이 나라의 진정한 문학상 같습니다. 물론 김동인의 업적을 기리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이 들으면 많이 섭하겠지만 말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거대함을 이룰 수 있고,
산은 하챦은 양의 흙과 돌이라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 높음을 이룰
수 있는 것'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내는 문화 쟝르 중에 '팬터마임'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무언극'인 이 연극의 형식은 대사 없이 몸동작과 표정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연극이지요. 서구나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매우 친근한 이 문화쟝르를 우리는 흔히 접하지 못합니다. 다행히 유진규라는 마임이스트가 강원도 춘천에 살고 있어 해마다 '세계 팬터마임 대회'를 유치하여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지만 이 나라에도 꽤나 많은 마임이스트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극단에서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더군요. 얼마전 우연히 본 예술TV에서 마임을 보았습니다. 무척 반갑고 그냥 TV가 고마운 것이 '아, 가끔은 느닺 없이 TV를 트는 재미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고지마야 만스케'라는 비쩍 마른 사람이 운영하는 '고지마야 만스케 극장'이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것을 동영상에 담아놓은 것이었는데, 도시에 사는 소시민의 일상에서 스케치한 단조로운 삶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표현과 더불어 공감 있게 연출해내는 그의 마임에서 생활은 하나의 용광로였습니다. '웃는 액자'라는 마임에서는 살아감 속에서 전혀 웃음을 찾을 수 없는 한 셀러리맨이 우연히 발견한 액자(생의 에너지가 되는 어떤 것이겠지요)안에서는 웃음을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액자를 늘 곁에 두고 그 액자를 통해서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즐겁지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 상태는 반전되고, 이제는 액자 속에서는 울고 있고 액자밖에서는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합니다. 작은 몸짓 언어를 통해 잊고 지내던 생활의 큰 부분을 되찾은 것 같아 잠시 혼곤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년에 한 번씩 발표되는 문학상을 보는 것도 그 잃어버린 기억의 '팬터마임'에 다름 아닙니다.
'전경린'이라는 62년생 경남 함안 출신의 작가에게 2007년도 이상문학상의 영예가 돌아 갔습니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라는 작품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 선택한 일탈적인 사랑이 도달하는 지점에 파괴적인 폭력을 놓고 그에 대응하는 주인공이 광적(또는 스토키즘적) 폭력(때로 광기 속에는 이성도 살아 있다)에 시달리는 상황을 놓습니다. 시간이 지나 지친 화자가 백색결혼이라는 인간적 교류를 위하여 달려간 독일에서 폭력의 증거인 반지를 꺼내고, 그 반지에 비추이는 빛을 보며 내 안의 천사를 불러내는 과정을 통해, 내 안에 존재하는 광기와 천사의 이중적 분열을 보여줍니다. [물의 정거장]의 작가 전경린은 이 작품에서 뛰어난 묘사와 세련된 문체를 통해 한 여인의 그로테스크한 내면을 보여주는데 성공합니다. 전경린은 이제 중견작가의 이름을 얻은 것 같습니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 중 "빗 속에서"의 공선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63년 전남 곡성 출신의 이 스토리텔러는 생활과 가족의 붕괴라는 절체절명의 가장이 일탈하려는 여인의 살내음을 통해 피폐된 삶을 겪는 우리 시대 가장들의 도피하고 싶은 출구 없는 중년의 욕망을 보여주는데 성공합니다. 공선옥의 의식은 같은 시대를 사는 젠더로서의 중년들 모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한창훈이라는 전남 여수 출신의 이 바닷가 작가가 그린 "아버지와 아들"은 쓸쓸합니다. 어느 아버지인들 자기 자식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어느 자식이라고 자기 아버지의 약하고 슬픈 모습을 보고 싶은 아들이 있겠습니까. 각박한 현실을 부딪고 사는 바닷가 두 부자의 해학적인 진실과 현실은 그대로 이 나라의 '한(恨)의 미학'입니다. 한창훈은 오래전 읽었던 작품에서 한결 세련되고 많이 진화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단순히 제가 바라보는 시각 안에서 말입니다.
글 잘쓰기고 상복 많기로 소문난 작가 김연수의 "내겐 휴가가 필요해"를 보는 눈은 착잡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암울한 시절 고문 수사관으로 도피해 살다가 자수하여 실형을 살은 이근안이 모티브인 것 같은데, 이 아픈 시대의 모습을 바닷가 작은 도서관에서 벌어진 한 작고 소소할 수 있는 일상과 대비시켜 전혀 무겁지 않게 풀어나간 수작이지만 일상속에 용해되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가 가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작가의 균형 감각은 공감할 수 있는 기재입니다.
65년생의 안동 출신 작가 권여선을 처음 접한니다. 서울대를 나온 이 범생이 작가의 작품은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심사위원'들도 이 작품의 무게감에 한껏 당혹들 했는가 최종 결선에 올라 있었습니다. 한 노교수가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가 되는데, 대학측은 노교수의 업적을 고려, 정년 때까지 집에서 연구하고 가끔 과제물이나 보내면 정년 때까지 교수직을 인정하려 합니다. 대신 조교를 가끔 파견하는 조건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이 작가 작품을 그리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교수집에는 시중드는 아주머니 (순천댁)한 분, 그리고 노교수가 사고나자 들어와 눌러 앉은 나이 든 미혼의 아들이 둘, 그리고 연구조교인 미혼의 여성이 기거합니다.성격을 보자면 끊임 없이 자기 밖의 일에 관심을 보이는 노교수, 쓸데 없는 대화로 시간을 죽이면서 조교에게 관심을 보이는 두 아들, 그리고 사건의 중심축 같으면서도 어딘가 떨어져 있는 순천댁 등 서로 다른 고립된 현대인들의 삶을 실혐적(?)인 관점에서 그린 작품입니다. 조교로서 제 일을 잘 해내며 때로는 이야기의 리딩도 하던 여학생 서영이 집 앞에서 교통사고로 교수와 같은 처지인 휠체어 신세(억지스런 측면이 있다)가 되자 남학생이 대신 와서 거문고를 들고 교수를 대학으로 모시는데--,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약콩이 끓는 동안" 연구 대상일 것입니다.
71년생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삶이 점점 피폐학 무기력해져 가는 중년의 사진사가 추구하는 젊은 육체와 성적 에너지에 대한 갈증과 일탈한 소년이 찍어내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자연스러움을 대비시키며 사라져가는 시간의 안타까움과 이루지 못할 현실적인 사실들을 현실감있고 자연스러운 문체로 그려내는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천운영을 지켜봄도 즐거운 일이될 것 같습니다.
72년생 편혜영의 "첫번째 기념일"에서는 일상성 속의 현대인의 고독이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그려지며, 80년생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에서는 인삼껌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데, 독립된 공간 속으로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순간적인 즐거움이 곧 내 세계를 침해받은 것 같은 의식의 이중성으로 인해 윤색되어 내보내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러나 입에 침을 고여가며 그리고 있습니다. 신인인 것 같은 김애란은 금년도 '현대문학상'에서도 [성탄특선]이라는 작품으로 우수작이 되는데 그 작품에서도 지금 우리네 일상과 젊음의 모습을 잘 포착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중국 혁명전의 전략 문제]라는 논문에서 '마오 저둥'은 다은과 같이 주장합니다.
"거렁뱅이와 용왕이 서로 보물 자랑을 한다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우리 군대의 기본
전략은 모든 것을 적으로부터 탈취하는 것이다. 국민군(쟝제스부대)을 상대해 싸울 때는
물론 우리 군도 많은 소모를 하게 되지만 국민군을 포로로 한다면 다시 그만큼 군사는 보충
되는 것이다. 물자도 마찬가지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이승우라는 59년 전남장흥 출신의 작가에게 마오쩌둥의 철학은 잘 들어 맞습니다. 소설가 문순태는 자신의 소설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 말은 작가가 되려면 아무리 습작이 중요해도 어느정도 타고나는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거의 8,90%)인데,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철저히 잘 쓴 작품을 베껴 쓰고 거기에 자신의 말로 살을 입혀가며 습작 연습에 몰두,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거죠. 이승우라는 작가에게 문순태의 예는 아니지만 이 작가가 엄청 노력하는 작가라는 사실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인 박완서 선생의 말마따나 수상작 "전지수(傳奇搜) 이야기"는 우선 전기수가 뭔지 궁금해서 읽어볼 수 밖에 없이 만드는 소설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낭독해주던 사람"이 전기수라는데, 문맹이 많았던 그 시대에 저자 거리에서 주로 '설인귀전''심청전''숙향아씨전' 등을 읽어주었답니다. 가장 대신 21세기 현대판 전기수 사이트를 프랜챠이즈화해서 돈을 버는 능력있는 아내를 둔 전직 출판사 직원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내가 우연히 대타로 전기수 노릇을 하면서 격은 일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이승우는 소설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지적 감흥을 적당히 요리해가며 이야기를 원숙하게 이끌어가는 미덕을 숨기지 않는다. 이승우식 세상보기는 이제 만개한 꽃입니다.
같은 수상 작품집에서 박민규의 "누런 강 배 한 척"을 보다가 이 작가의 재미 있고 유쾌한 청소년식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모습에 잠시 숙연합니다. 사회에 정식으로 편입되기 전의 비제도권의 치기어린, 도는 냉소적인 감수성으로 장낭끼 가득한 정경으로 경쾌하고 기가막힌 문장으로 그려내던 이 작가에게 이런 진지한 글을 쓸 줄 아는 재주도 있구나 하는 이유 때문이지요. 현대 우리 사회의 노인층의 문제를 치매에 걸린 사지 멀쩡한 노인인 화자에게 잔잔하게 나레이션을 맡기면서 밀도 있게 써내려간 작품을 보며, 비록 끝부분에 박민규다운 치기를 살짝 엿보였지만 그것이 전혀 거부감 들지 않은 이 작품 "누런 강 배 한 척"은 새삼스레 박민규라는 나이와 상관 없을 것 같은 문학적 '이반'에게 중견으로서의 성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개그라는 말을 처음으로 고안했다는 시대의 허허로운 만담꾼 전유성씨도 나이가 솔챦습니다. 알려지기로는 술과 여행과 사람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무골호인이라 하는데, 이 사람이 최근에 삼국지를 그만의 감수성과 유머로 써낸 '구라삼국지'를 상재했습니다. 별 시더워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2권동탁과 초선 그리고 여포편을 보다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개그맨다운 치기로서의 글쓰기야 차치하고라도 문장의 흐름이나 강설본식의 글쓰기가 아닌 그만의 언어로된 그야말로 '전유성 삼국지'엿던 것이었기 때문이었죠.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에서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품행과 아버지에게서 배운 겸손과 남자다운 기상, 어머니에게서 배운 절제와 너그러운 마음, 스승에게서 배운 무술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 디오네투스에게서 배운 철학의 기초, 친구 루스티쿠스에게서 배운 인격도야와 독서방법 그리고 아폴로니우스에게서 다져진 자유에의 의지, 막시무스에게서 도야한 도덕적 품성 등이 아루러져 오늘날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 언어중 아래를 기억하겠습니다.
" 죽음은 종말이다. 고통은 이성으로 극복하라. 명성은 한갖 모래성이며 보잘 것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사랑하라.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