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되어 큰형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갑자기 장남을 잃은 슬픔에
한밤중에도 뒤산에서 큰애가 부른다며 산에 올라가시기도 하던일이 많았고 하던 사업이 기울어 우리집은 끼니를 못이을
정도가 됐다.
나는 하던 재수를 그만두고 새벽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불타버린 시민회관 공사장까지가서 데모도(당시 표현)를 했다.
그러다 같이 독서실 다니던 친구가 당시 유행했던 전기장판 공장이 우리동네에도 생겼다고 다니자 하여 며칠만에 공사장일을 그만두고 전기장판공장에서 도라이버로 장판에 나사를 조이는 일을 했는데 손바닥에 피가 나올정도였다. 그런데 그 공장에 아주 예쁘장한 소녀가 있었다. 한 16.7살쯤 되어 보이는데 어느날 저녁 퇴근후 동네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한잔하는데 그애가 배불때기 공장장과 지나가길래 따라가봤더니 둘이서 여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다니다 같이 다니던 친구가 구두를 닦으면 수입이 더 좋다하야 둘이서 구두통을 메고 등촌동까지 가서 구두를 얼마정도 닦았는데 어떤 아저씨가 어린 학생이 기특하다고 당시돈으로 거금을 준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에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이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어려운걸 알고 같이 곰인형 장사를 하자고 했다. 나는 당시 신정동 우리집에서 월곡동 가내수공업하는 곳에 가서 곰인형을 받아와 육교위에 올려 놓고 팔기도 했었다. 여름에는 어머니가 목동 오목교아래에서 냉차장사를 몇달하시다 단속반원에 뺏겨 그만두시는 일도 있었다.
그후 아버지가 다시 안정을 되찾으셔서 나는 학원갈 형편은 안되고 독서실에서 혼자 하루종일 지냈는데 어느날 저녁 독서실사람들이 벽보를 보고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어서 가서 보니 세무공무원 모집공고였다. 덩달아 나도 지원하여 명지고등학교에 가서 시험을 봤는데 그애들은 다떨어지고 나만 붙었다. 40대 1의 합격율이었고 우리 교실에서 나혼자만 붙은 꼴이었다.
나는 어린나이에 갑자기 세무공무원의 길에 들어섰고 영등포 역전뒤에 있던 모세무서에 첫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퇴근때마다 사창가를 지나는게 고역이었다. 힘쎈 아줌마들이 총각 놀고가요 하며 양팔을 잡아당겨 끌려가다 억지 탈출하기 일쑤였다.
회사에서 그 고충을 얘기했더니 금방 놀다 왔어요 하면 안잡아 간다고 비결을 알려주었다. 그러다 첫교육후 국세청에 차출되어 안양교도소옆 삼화왕관이라는 술병마개 제조공장에 파견되어 주세감독하는일을 2달간 다녔다. 우리집은 정릉이었는데 회사에서 보내준 차로 아침에 데리러와 저녁에 퇴근시켜주었다. 나는 복귀해서 소득세과에 배치되었고 나의 담당구역은 김포군 4개면(양촌, 대곶, 월곶, 검단면)이었고 아침에 영등포로 출근하면 노란 봉투를 옆에 끼고 시외버스를 타고 김포까지 출장을 다니곤 했다. 내가 만나는 분들은 대개 축산업을 하시는 분들인데 실사라하여 현장에서 사육두수와 농장 현황을 조사하고 과표자료로 활용하는 일이었다. 출장을 나가면 아버지 또래의 사장님들이 저녁먹고 가라고 시골동네 요리집에 자리잡고 나를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어쩔수 없어 참석은 했지만 그래도 대학에 가는 꿈은 버리지 못해 동네 독서실을 잡아놓고 가기도 했지만 자다오는날이 더 많았다. 그해 가을 추석엔 국세청 암행감사반에 차출되어 서울의 유명했던 술집들을 기습조사했다. 생각나는 곳은 종로세무서옆 오진암이라는 한옥기생집이었는데 저녁엔 아가씨들이 대학배지를 달고와 한복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와 시중을 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와 성당을 나갔는데 신부님이 바리새인과 세리라는 제목으로 강론을 하시는데 꼭 내얘기같았고 그일이 싫어졌다. 그러다 군대영장을 받고 나는 너무 어린나이에 공무원하는게 내적성에 맞지 않다 생각하여 사표를 내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79년 10월 어느날 연대체육대회에서 우리대대가 꼴찌를 하여 단체기합으로 연병장을 돌다가 갑자기 비상발령이 나고 나는 밤새 보초교대없이 외곽보초를 서다가 내무반으로 돌아왔는데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것이다. 그다음날 대대장님이 전병력을 연병장에 집결시키고 조국이 백척간두에 섰으니 우리는 목숨바쳐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훈시를 하셨다. 곧 전쟁이 날것 같았고 나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후 부대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조동진의 작은 배였다. 당시 나의 상황은 그노래말과 똑 같았다. 제대후 내게는 모아논 돈도 돌아갈 학교도 직장도 없지만 긴터널 같은 70년대의 악몽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선배님들의 그시절얘기를 보고 저도 70년대의 추억을 적어봤습니다.
내기억에 전적으로 의지한 글이라 사실과 다를수도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어려운 시기에 데모도(일본어 작업 보조원이란 뜻)를 하시다가
전기장판 공장의 공돌이로 변신을 하고, 다시 구두딲이를 했으며
곰인형 장사도 하고, 세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40대 1로 합격
하는 영광도 안았으며 세무일을 보며 대학생들의 불건전한 요식
업 출입을 보면서 회의감도 느끼셨겠습니다.
그리고 사표를 내고 군입대를 하시며 인생사 굴곡진 삶을
걸어 오셨군요
대부분 우리네 삶은 비슷하지요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위에 안적은 과외교사까지 치면 짧은1년사이 참많은 직업을 가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무공무원을 계속했으면 넉넉한 연금에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15개월 간의 짧은 공무원 생활동안 죄도 없으면서 늘불안했지요. 그냥 맘편히 사는게 좋은거 같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군요
세무공무원 계속 했더라면 참 좋았을것을
조금 아깝네요
글치만 어쩌면 잘 했을 수도 ......
전 79년도 박정희 대통련 시해 당시
인천 월미도에 있는 해군 5해역 사령부에
대위로 근무 하고 있었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제주변이 다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라 힘들지는 않았지만 더 나은 생활에 대한 갈망은 있었습니다. 79년도에 해군 대위셨군요. 멋진 군인이셨을거 같습니다. 지금 매스컴에 검단 양촌 지역이 많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보면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때는 초가집 투성이의 농촌이었고 도로포장도 안되어있었지요.
나하고 같은시절 군생활과 학교 생활
이곳은 5사단관내 일까요
난 6군단사령부 ㅎㅎ
네 반가워요. 같은 서울하늘아래 같은 시기를 보냈네요^^ 저는 5군단예하 8사단에 있었지요.
아~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리 쉽지 않은 인생 여정길을 단시간에 넉넉히 음미해 봤네요
참 잘살아 오셨씀니다 수고도 많았구요 앞으로의 여정길은 그져 순탄하기를 기원 함니다
감사합니다. 한해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요. 제대후에는 큰 굴곡없이 살아왔고 현재는 잠시 쉬면서 자격증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참 열심히 살아오신 기정수님!
40대 1의 경쟁률이라뇨, 게다가 그 시험이 쉬운 시험도 아닌데요.
성실함과 총명하심을 익히 알겠습니다. ^^
인생의 여정 중에 어느 자리에서 어느 역할을 맡으셨을 때에도 항상 최선을 다하며 살아오셨을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조동진의 작은 배, 나지막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깊이 있는 가사를 담아 부르는 그 노래를 저도 참 좋아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당시 공무원시험은 예비고사 과목과 비슷했기에 제또래애들이 많이 붙었지요. 총명하지는 않지만 한길을 꾸준히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작은 배는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제 현실과 똑 같았고 그후에 나온 "나뭇잎사이로" 도 많이 좋아합니다. 보라수정님의 과분하신 격려와 차선배님의 끝없는 창작력이 저에게 계속 글을 쓰게 만듭니다^^
지난 추억의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때 그시절이 그려집니다
고생끝에 낙이라 했으니 ᆢ지금은
행복하시겠죠 ᆢ
감사합니다. 지금은 밥걱정안하고 사니 외형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지난 추억을 회상할수 있다는것 자체가 행복이겠죠^^
훌륭한 삶의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가 공감하는 부분이 너누나도
많이 글속에 있네요.
시민회관 화재로 불탄 뉴스도 그
당시에 보았읍니다.
세무공무원 사표내신것은 너무나
아쉽고요.
저도 그런 아쉬운 부분이 있읍니다.
10.26 사태때도 저는 ㅇㅇ중요한
정부 요소에 게엄군으로 나가서
3일동안 뚠눈으로 지내기도
하였지요.
참 열심으로 살아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7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제게는 참어려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 넘긴것 같습니다. 당시 친구들이 대학다닐때 서류봉투들고 다니는 내 모습이 싫어 나왔는데 다니는게 더나을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10.26부터 12.12까지 저희도 비상의 연속이었지요. 즐거운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76년도에 저랑 비슷하게 고생을 하셨네요 ㅜㅜ
호구지책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보지 못한 사람은
배고픈 설움을 모르지요
이북에서 피난오신 분들 다 비슷할겁니다
고향이라는 비빌 언덕이 없으니
사업이 기울면 그걸로 끝이지요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글을 왜 못 봤을까요?
그 때는 다른 게시판을 누빌 때라서 그랬나봅니다
건강글, 미술작품, 그런데 더 가서 놀았지요
용띠방에서도 놀고...
이곳에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배님과 저는 5년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집도 한때 2층집에 가정부와 입주 가정교사를 두고 생활한 적있는데 목재산업의 사양화에 밀려 초등학교6학년때 부터 많이 고생했습니다. 다지난 일이고 고생하는 가운데도 무한한 사랑을 보내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