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레이션 이 민혜
* 남자친구들과의 설전,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인가 연애의 가능성을 열 것인가
- 일 년 중 하루, 꼭 이런 날이 있다. 바람의 결이 속수무책으로 바뀌어서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아아, 이 계절이 이렇게 가는구나, 하고 느끼는 날 말이다. 어젯밤 비 그친 뒤에 서늘한 바람이 몰아쳐서 잠자리에서 이불을 끌어당기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는구나.
찬바람이 불면 “아아 연애하고 싶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더 이상 진할 수 없는 초록으로 물들어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서 있는 여름. 길가에 옥수숫대가 수풀처럼 무성하고 수직으로 꽂히는 직사광선 아래 모든 생물체들이 그늘에서 헉헉 숨을 들이마시며 엎드려 있는, 생명의 정점에 있어서 충만하되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요한 그런 여름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어쩐지 그런 날들을 거의 겪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여름과 작별해야 하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마음이 서운했다. 그냥 서운한 게 아니라 퍽 서운해서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 과장된 감정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이토록 여름을 사랑했다는 말일까, 하고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이건 나이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올 것이고, 가을이라는 것은 필히 겨울을 불러 일 년을 끝내고 나면 나는 또 한 살을 먹게 된다는 그런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무너뜨린 게 아닌가 싶은 거다.
잠은 안 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바람 소리를 듣자니까 언제나 그렇듯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여자 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을 막론하고 요즘 내 나이 또래들은 저녁이 되어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면“아아, 연애하고 싶다”이런 말들을 한다. 집에 가면 다 짝들이 있는데 듣기도 민망해서 내가“너 네 남편이랑 다시 연애를 해봐”하면, 친구들은 아이큐 65짜리를 보는 듯 나를 아래위로 훑는다. 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만 독신의 자유를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 모범생처럼 어머 내가 좋은 말 했는데 왜 그래?’하는 표정으로 얄밉게 호호 웃는다. 물론 남자친구들에게는 이런 말을 묻지도 않고 무시해버린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알아서 짐작하시기 바란다. (살짝 귀띔하면 이렇다. 가을바람이 불기 전에는 여름이니까, 그 전에는 봄이 와서 꽃이 피니까, 그리고 그전에는 흰 눈 내리는 날 덕수궁을 걷고 싶어서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사시사철 그러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서로 바빠서 좀 뜸하지만 예전에 함께 여행을 다니던 남자와 여자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중의 한 친구가 일간지에 꽃 기행 면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 친구가 자신의 차에 올라타 하동 구례의 매화며 영덕 인근의 복사꽃이며 등등을 보러 다닐 때 우리는 그의 차에 그야말로 편승을 해서 함께 전국 각지를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중의 한 남자친구(그를 A라 부르자)와 함께 외국 출장을 다녀온 내게 꽃 기행을 담당하던 친구(이 친구는 B)가 물었다.
“니네들 둘이 외국여행 가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
나: 있긴 무슨 일? 밖에 나가면 술집의 술값이 너무 비싸서 둘이 매일 호텔방에 앉아서 술 마시긴 했지. 그런데 우린 친구인데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니?
둘이 여행 가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당사자 A : 무슨 일 있으면 어때? (대체 이 무슨 일이란 무슨 일인지 @#$!)
옆에서 듣고 있던 여자친구: 니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지영이 말이 맞아. 우리들은 친구야! 애인은 헤어지지만 친구는 영원하잖아. 우리에게 너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 우리는 너희들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 죽 함께 소중한 존재로 간직하고 싶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운전하던 B : 소중한 존재는 무슨 소중한 존재. 사람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나: 무슨 소리야! 너희들은 정말 소중하니까 우리는 무슨 일이 있으면 큰일 나. 그러면 결국 헤어지게 되니까. 그리고 나는 너희들하고 아무 일 없는 게 자연스러워.
A: 무슨 일 있고 안 헤어지면 되잖아. 우리는 그렇게 소중한 거 싫어.
그때부터 우리들의 여행길의 주제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달라는 여자들 측과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남자친구들의 갑론을박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들의 소중한 존재들을 잘 데리고 소중하게 여행을 다녀왔던 거였다.
그러던 중 다른 한 친구(이 친구는 C)와 우리 여자 둘이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C는 원래 그런 곳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마침 우리가 소중 운운하는 여행을 할 때는 사정상 빠지고 없었다. 이 친구는 별로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그저 그렇고 얼굴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언제나 주변에 어여쁜 언니들이(그것도 이상하게 C에게 모두 헌신적이다. 물론 이상은 C자신의 주장이다) 끊이지 않는 이상한 친구였다. 게다가 독신으로서 자신이 하면 언제나 로맨스가 된다는 것을 생의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친구였다. 가끔 날 보고 있다가 “지영아, 널 좋아한다는 남자들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심지어 너보고 예쁘다는 사람도 있더라. 참 세상에 별 사람이 다 있어. 이 오빠는(여기서부터 말투는 느끼해진다) 마음이 건강해서 도무지 네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아. 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내가 뭐라고 핀잔을 주면 머리를 감싸며 몹시 고통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아아, 안 돼 지영! 핀잔주지 마….나는 나한테 쫑크 주는 여자에게 꼼짝도 못 해.그러니 여자가 핀잔만 주면 필이 온단 말이야, 으윽윽!”이러는 친구다.
우리는 그 친구에게 A와 B가 도무지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 달라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C는 우리말을 끝까지 다 듣더니 큰오빠와 같은 말투로 우리에게 말했다.
“A와 B가 언제 변변히 연애 같은 거나 해본 아이들이냐? 그러니 뭐가 연애고 뭐가 여자 친구인지 구별을 못 하는 거예요. 자 진정들 하고 술이나 먹자. 이 오빠 봐라. 난 너희들이 절대!! 여자로 안 보여. 그러니 나한테는 소중한 존재라는 개념이 통한다구. 내가 너희들이 여자로 보였으면 벌써 연애를 했겠지… 그러니 너희들이야말로 내게 너무 소중한 존재들이야.”
쓸쓸히 서로를 지켜보자는 결론으로
아아 몹쓸 것도 사람의 마음이고 정말 오묘한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그 순간, 갑자기 화가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듣던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였는지 순간 우리 두 여자의 눈꼬리가 험악하게 올라갔다. 여자 친구와 나는 그 순간 동시에 A와 B가 소중한 존재라는 우리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바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 A와 B도 그 자리에 왔다. 우리의 소중 타령을 듣고 있던 A가 말하는 것이다.“내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여자가 남자를 친구로 여기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인 거 같아. 하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응해줄 택도 없으니까.
또 하나는 정말 필이 안 와서…. 잠깐! 너희가 둘 중의 어떤 상태인지 내게 절대 말하지 마, 입 꼭 다물고 있으라구~~. 그리고 남자가 여자 친구를 가지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야. 혹시 언젠가 애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창밖에 비는 내리고 가을바람은 불어 가는데, 곧 오십을 앞두고 머리가 희끗거리는 이 이십년 지기 친구들 다섯 명은 소중한 존재들로서 쓸쓸하게 서로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술자리가 더 무르익었을 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맞아. 뭐, 나쁘지 않다!”
- 공 지영 소설가
첫댓글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있는 우리들에게 공감가는글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늘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다 삼봉초교앞을 지나는데 카페에서 뵙는 sambong(26)님 닉생각이...좋은 음악이 많이 흐르네요 올려주시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