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에도 취향이 있다. 호젓한 산책, 돗자리 깔고 담소를 나누는 여유로움이 누구에게는 또 간절하다. 해남 보해매실농원에 가면 이런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장독대, 영화 세트장 등 꽃길 산책을 돕는 다양한 액세서리는 물론 없다. 다만 넓은 땅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있다.
흐드러지게 핀 보해농원 백매화
봄꽃 구경의 딜레마는 이렇다. 사람보다는 꽃이 많았으면 좋겠다. 4월의 문턱을 기점으로 나들이객들은 꽃향기를 찾아 전국으로 총출동한다.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관광’ 차량들이 어느 시기보다 많은 때다.
동백이 어우러진 매화밭
사실 ‘남도의 매화’ 하면 광양 다압면의 매화농원이 언뜻 먼저 떠오른다. 매화 필 때면 한 해 평균 10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열흘만 피어도 하루 10만 명, 보름 정도 개화한다면 하루 7만 명이 모이는 셈이다. 매화나무보다 넘치는 사람들이다. 섬진강, 장독대, 영화 세트장, 산책로, 맛난 먹을거리… 광양 다압면에는 나들이객을 유혹하는 소재들이 즐비하다. 어디 봄 구경이 꽃뿐이겠냐만은 이제는 좀 흩어질 때도 됐다.
매실농원 초입 간판
매화, 동백, 야생화가 어우러진 꽃대궐
이런 고민에 한 번쯤 사로잡혔다면 이제 해남으로 가보면 어떨까. 해남 산이면의 보해매실농원은 갖춘 게 없어 오히려 여유로운 꽃밭이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46만㎡의 들판에는 1만 4,000그루의 매화수가 식재돼 있다. 백매화가 주종을 이루지만 간간이 홍매화도 어우러진다. 꽃밭 양쪽 길에는 동백이 울타리 역할을 한다. 매화꽃 아래로는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녹색 풀밭이다. 그 풀밭에 야생화들도 자욱하게 피어난다. 돗자리 하나 깔고 앉으면 주변 전체가 매화, 동백, 야생화 천지다. 평일 오전쯤이면 그 꽃세상을 온통 독차지할 수 있다. 인공이 크게 가미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꽃밭이다.
1978년 문을 연 보해매실농원은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꽃밭을 개방하고 있다. 관리사무실 옥상은 전망대용으로 공개한다. 올 3월 16, 17일에 매화축제가 열렸는데 매년 축제 때는 이곳도 시끌벅적하다. 난타 공연, 평양예술단 공연, 풍물패 공연 등이 무대에 오르고, 매화 페이스페인팅, 김장담그기, 봄나물 캐기 등 체험 행사가 곁들여진다. 매실농원에서 직접 수확한 매실로 담근 매실주도 판매된다.
홍매화
매화는 3월 중순에 절정을 이루고 말까지 만개할 전망이다. 사실 꽃축제도 좋지만 축제를 피해 찾는 꽃밭이 한결 넉넉하고 운치 있다.
매실농원 전경
보해매실농원은 큰길가에 확연하게 들어서 있지 않다. 초입 간판이 없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쉽다. 도로에서 논과 밭을 가로질러 1.8km를 걸어야 농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걸어가는 길에는 작은 암자도 있고, 백구가 컹컹 짖어대는 시골집도 지나쳐야 한다. 그 집 마당에 매화가 피어 있는 풍경과 마주칠 때쯤이면 농원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하게 된다.
만개한 매화
영화 <너는 내 운명>의 배경이 되다
중앙 주차장이나 관리사무동까지 들어서기 전부터 온통 꽃잔치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고 찾아갈 필요가 없다. 길에서 벗어나 나무 아래 걸터앉으면 그만이다. 이곳에서 피는 매화는 백가화, 앙숙, 남고 등인데, 듣기에는 생소한 매화들이 터널을 이룬다. 매화 터널은 동서남북으로 한없이 이어진다. 걷다 보면 한 귀퉁이에서 가족들의 웃음이 쏟아지고, 먼 구석에선 연인들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 꽃밭을 에워싼 붉은 동백과 마주쳐야 그때쯤이 매화 터널의 끝이다. 산이면의 매화동산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너는 내 운명>, <연애소설>의 꽃향기 흐드러진 봄날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꽃동산에서의 오붓한 휴식
농원에서 수확하는 매실은 가공 방법에 따라 이름이 제각각이다. 껍질이 파란 청매는 신맛이 강하며 노랗게 익은 황매는 향이 좋다. 청매 껍질을 벗겨 훈연한 오매는 한약재로 이용하고, 청매를 소금물에 절인 후 말린 것은 백매라고 부른다. 이름이야 어떻든 매실은 피로회복과 장 기능을 돕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실주 외에도 매실장아찌, 매실된장 등이 매실농원 인근에서 단연 인기 품목이다.
매화 분재
매실농원을 좀더 한적하게 즐기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우선 주차 공간이 넉넉지 않고, 꽃이 차와 뒤엉키는 안타까운 장면이 싫다면 더더욱 버스를 이용한다. 목포터미널에서 산이면을 경유해 해남읍내까지 하루 여덟 차례 완행버스가 다닌다. 그 버스가 매실농원 초입에 세워준다. 바로 옆에 송천정류소가 있지만 송천에서 내리면 제법 걸어야 한다. 목포터미널에서는 해남 직행이 아닌 반드시 산이면행 완행을 타야 한다. 보해농원까지는 50분가량 소요된다. 해남종합터미널에서는 산이면, 목포행 버스가 출발하며 보해농원까지 20분 남짓 걸린다. 해남에서 서울행 막차가 17시 30분에 끊기는 것을 감안하면 해남~보해농원~목포 구간을 버스 소요시간을 고려해 적절하게 활용하면 좋다. 안타깝게도 대중교통을 통해 접근하는 뼈와 살이 되는 정보가 군청, 매실농원, 축제 홈페이지 등에는 없다. 블로그 등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해농원 간판이 있는 초입에서 꽃밭까지는 걸어서 20분가량 걸리는데 그 정도면 운치 있는 길이다.
초록 산책로의 매화
해남 여행에 둘러볼 곳도 널렸다. 땅끝마을, 미황사, 우항리 공룡화석지 등을 두루 방문하면 좋다. 미황사는 새벽 예불이 아늑하며, 땅끝전망대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