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수동 적십자병원
제가 고등학교 1학년(1970년)때 어느늦은봄날 대한통운에서 제공한 대형(12톤 이상으로 기어됨)트럭을 타고
연수동지역으로 전교생이 모내기 지원을 갔던적이 있었읍니다
트럭이 숭의로타리를 지나 용현고개를 넘어 동양화학 부근에 이르자
우리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듯 흥겨웠읍니다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에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지만 동양화학 앞에서 부터 펼쳐지기시작하는 바다와
송도역을 지나 구불구불 비포장 산길을 따라 펼쳐진 시골풍경이 마냥 좋았읍니다
우리들을 태운 트럭이 목조건물의 정미소앞 공터에 섰고
정미소앞 비교적 넓은공터에는 우리를 맞으러 나온 농부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읍니다 그곳에서 저는 예닐곱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 아주머니를 따라 약간을 걸어서 어느 모내기논에 도착을 했읍니다
그날 저희가 모내기를 했던 논 옆에는 잘 정리된 정원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건물이 있었읍니다
그곳이 바로 적십자인천결핵요양소 였읍니다
그곳은 인천 토박이들 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한가지 정도의 추억을 갖고있을 관광명소였고
당시에는 이곳에서 영화촬영을 자주 할정도로 탁트인 바다와 경관이 수려 했었읍니다
이곳 적십자병원 앞에는 넓은 염전 저수지가 있었는데 망둥이가 무척 잘 잡히는곳 이었읍니다
이 저수지에 오기 위해서는 송도역에서 버스를 타고 적십자병원입구에서 내려
적십자병원 구내를 가로질러서 접근하는 방법과
송도역에서 수인천 철로를 따라 걸어들어오는 방법이 있었는데
저는 수인선철길을 따라 이곳에 오곤 했었읍니다
1954년의 연수동지역 항공사진 사진 오른쪽 위에 지금은 없어진 낙섬과 낙섬염전이 보이고 위쪽 가운데에는 송도유원지와 아암도도 보입니다 송도역을 출발하여 남동염전 저수지에 다다른 수인선 철로 (지금의 승기천을 가로지르는 남동철교)가 사진 왼쪽 중앙에 보입니다 사진 정가운데 결핵요양원(현 적십자병원)이 보이고 그 주변의 논들이 보이는데 고교시절에 모내기 지원을 나갔던 추억이 있는곳 입니다
80년대 초반 하얀나비의 김정호씨가 이곳에서 결핵치료와 요양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지기도했던 이곳이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밀집한 주거단지로 변했고 결핵요양소는 적십자병원으로 바뀌었고
적십자 혈액원과 사할린동포 복지관이 들어서 있읍니다
몇일전에 저희 아버지(현 95세)께서 이병원에 입원을 하셨읍니다
아버지 덕분(?)에 적십자병원 구석구석에 아직도 남아있는 옛자취들을 더듬어 보았읍니다
2011년 9월 24일 작성글
옛날과 정 반대방향에 출입구가 생겼읍니다
지금은 철수하고 그흔적만이 산정상에 남아있는 문학산 레이다기지가 바라다 보입니다
인천토박이들은 지금도 그산을 배꼽산 이라고 부릅니다
사진 중앙에 가천 길대학 건물이 보이고 산이 깎여 돌이 보이는 곳이 문학터널로 추정 됩니다
김정호씨가 만들고 어니언스등 여러가수들이 불렀던 노래 <외길>은
김정호씨가 이곳에서 요양을 할때 이소나무를 보고 만들지 않았을까하는 제 생각 입니다
수령이 320여년된 보호수 입니다
적십자병원 신축건물뒤에 남아있는 옛 결핵요양소건물 입니다
예전에는 흰 벽돌건물 이었는데 지금은 도색을 하고 철재지붕을 얹었읍니다
사할린동포들을 위한 복지관
옛날에 사용하던 원래 요양원 입구부근은 지금은 장례식장이 들어서 있읍니다
옛날에 논이 펼쳐진길을 따라 적십자요양원에 들어오던 길 입니다
1960년 전후의 사진으로 추정을 합니다.
화도진도서관 소장의 사진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위 멀리 보이는 섬은 옥구도입니다.
왼쪽 중앙 끝에 대원례도가 보이고 있습니다.
이곳 바로 오른쪽에 남동역이 있습니다.
사진 중앙의 하얀 부위가 남동염전의 저수지 중 한 곳인데..
저수지 아래쪽 제방으로 수인선이 지나고 있습니다.
아래 제방 수인선 오른쪽 끝으로 철교가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철교는 훗날 오른쪽 논 자리에 생기게 됩니다
1960년
1961년
1962년
이 해에는 결핵퇴치 특별모금 운동으로 극장에서 입장객의 입장료에 일정액을 첨가하는 극장모금이 시작되었다.
1963년
이 해에는 결핵예방 특별 성금모금으로 고궁의 입장료에 모금액이 첨가 되었읍니다
1964년
1965년
이해에는 "당신을 노리는 무서운 결핵 크리스마스씰을 사서 예방하자"라는 호소문을 넣은
포스터도 발행 되었읍니다.
1966년
1966년도 크리스마스씰은 크리스마스 씰의 크기가 당시의 보통우표만큼 작아졌고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 도안(1932년)이었던 숭례문의 그림이 들어갔읍니다
우리나라 최초 씰의 도안(1932년)
1967년
1932년에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씰을 발행코자 도안하였던 것이 거북선이었읍니다
임진왜란때의 거북선에대한 수모를 안고있던 일제는 그 도안을 허가하지 않았읍니다
1967년도의 크리스마스 씰에 거북선이 등장을 합니다
1968년
1969년
근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결핵이었다.
천재 시인 이상, 소설가 김유정도 결핵에 걸려 요절했다.
신문에는 폐병을 비관해 자살했다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실렸다.
당시 결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공포의 전염병이었다.
도스토옙스키, 발자크, 쇼팽 등 천재 예술가들과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우리나라 결핵 발병률은 세계 평균 비율을 훨씬 웃돌았다.
1929년 세브란스병원의 자료를 참조한 〈중외일보〉 10월 16일자 사설은,
조선의 2천만 인구 중 3백만이 결핵환자(보균자)고,
전세계 인구 중에서는 8퍼센트인 1억 2천여만 명이 결핵환자라면서,
결핵 퇴치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7명 중 1명이 결핵환자(보균자)고, 세계 평균은 12명 중 1명이었으니,
세계 평균을 꽤 웃도는 수치였다.
우리나라 근대의 결핵환자 수에 대해서는 기관마다 수치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정확한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러 통계와 보도를 종합해보면, 1920~1930년대에 약 40만 명의 환자가 있었고,
매해 5만 명 이상이 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에 전체 결핵환자가 60만 명이고 사망자가 106,283명이었으니,
일제강점기의 환자와 사망자 수가 터무니없는 통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선 이는
캐나다의 의료선교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였다.
평양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박사의 장남으로,
1893년 서울 출생인 그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외국인이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인 1894년, 평양성에서 청일전쟁으로 인해 부상당한 조선인 환자들을 돌보던 아버지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상심한 어머니는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가
1897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우리나라 첫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여관의 의사로 일했는데,
평양에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을 기념하는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보구여관(保救女館)
1887년에 여의사 M. D. 하워드가 정동 이화학당 안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이다.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기관’이라는 뜻의 보구여관은 왕실에서 내려준 이름이다.
첫 두 해 동안 8,000여 명을 진료한 하워드는 건강이 상해 미국으로 돌아갔고,
캐나다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이 뒤를 이어 10개월간 2,400여 명을 진료했다.
최초로 여성들에게 의학 교육을 실시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김점동(박에스더, 1879~1910)을 배출했다.
1930년에는 동대문부인병원, 1945년에는 이화여자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셔우드 홀은 1900년 평양 외국인학교의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네 명의 학생과 함께 1908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마친 후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1923년에 졸업했다.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메리언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1922년에 결혼했고,
1924년에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결핵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에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가 된 그는,
이듬해 4월에 어머니가 의료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고향’ 한국으로 부인과 함께 왔다.
그해 7월 해주 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한 셔우드 홀은
1928년에 결핵 전문 치료요양소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세웠다.
셔우드 홀은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결핵요양원을 세운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스무 명에 한 사람꼴인데 한국에서는 다섯 사람 중 한 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여긴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는 세계적 불황으로 선교본부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여의치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결핵 퇴치 운동을 위해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실은 덴마크의 우체국 직원 아이날 홀벨(Einal Holboell)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그는 당시 많은 어린이가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던 중,
연말에 쌓이는 많은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무릎을 쳤다.
그 우편물들에 동전 한 닢짜리 ‘실(seal)’을 붙여 보내는 계몽운동이 성공한다면,
그 판매금으로 결핵에 노출된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1904년 12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실이 세상에 나왔다.
호벤의 아이디어는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곧 덴마크 국민운동이 되었고
큰 성공을 거뒀다.
곧이어 온 유럽에 크리스마스실이 퍼져나갔고, 미국에서도 실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양에서는 1910년 필리핀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일본에서는 1925년, 우리나라는 1932년부터 실을 발행했다.
1932년 12월 3일에 발행된 첫 번째 실에는 남대문 그림이 실렸다.
원래 첫 도안은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해서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패한 일본의 반발이 염려되어 남대문으로 변경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셔우드 홀은 자서전에서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를 상징한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동아일보〉는 1932년 11월 28일자 ‘조선의 폐병 박멸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실 발행,
정말(丁抹, 덴마크의 한문 표기) 폐결핵 박멸 운동 본따서 해주 구세요양원 중심’이라는 긴 제목의 기사에서
“전조선에 100만 명 가까이 되는 결핵환자를 위하여 훌륭한 시설을 갖춘 해주 구세요양원이 더욱 발전하면서
폐결핵 박멸 후원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조직의 방법으로는 크리스마스를 기회로 해서 ‘크리스마스실 사업’을 시행하는데,
이를 찬성하시는 분과 후원회가 전조선으로 다니면서
가입 권유 운동을 하면서 조직할 것이라고 한다”라고 소개하면서 홍보에 앞장섰다.
셔우드 홀은 자서전에서, 크리스마스실을 가장 먼저 구입해준 사람은
배재학당의 헨리 닷지 아펜젤러(배재학당 설립자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목사의 아들) 목사이며,
실을 홍보하고 보급하는 선봉대를 조직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9천 명의 학생과 3천 명의 어른에게 실을 판매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해외 선교단체들에게 단체주문도 받았는데, 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전에 많이 팔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구정(설날) 즈음에 많이 팔았다고 회상했다.
셔우드 홀은 자서전에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받은 웃지 못할 내용의 편지들도 소개했다.
“저는 당신이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광고를 보고 실을 샀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이 실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약은 나의 심한 기침을 조금도 낫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주시기를 청구합니다.”
“여러 사람들 입에 자자한 그 훌륭한 크리스마스실 약을 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값은 얼마라도 지불하겠습니다.”
“당신의 요양원에 입원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실 입원권을 좀 보내주십시오.
저의 친구들도 많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셔우드 홀은 첫해의 크리스마스실 운동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했다.
경비를 제하고도 170달러의 이익금을 남겨,
당시 우리나라에서 결핵 퇴치 운동에 힘쓰고 있던 평양의 연합기독병원,
여주의 영국 교회병원, 함흥의 캐나다 연합교회병원, 세브란스 유니언 결핵병동, 해주 구세요양원에
25~35달러씩 보조금을 주고 나머지는 결핵서적 구입비와 연구 · 병리 실험비로 책정했다고 한다.
셔우드 홀은 계속해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고,
당시 언론에서도 결핵 퇴치를 위해 매해 기사와 사설로 동참을 호소했다.
셔우드 홀은 자서전에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햇수가 늘어가면서
해외 선교단체들로부터 조선의 풍속이 담긴 도안이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첫해에는 자신이 도안을 했고, 이듬해인 1933년에는 미국의 도안을 변형해서 사용했으니,
미국이나 캐나다 후원자들로서는 조선 고유의 실 도안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셔우드 홀은 1934년의 크리스마스실 도안은, 조
선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집에 머무는 엘리자베스 키스에게 부탁했다.
키스는 이런 인연으로 우리나라 결핵 퇴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1934년 실 도안은 동대문을 배경으로 한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다.
키스가 동대문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서울에 올 때마다 동대문 바로 옆에 있던 감리교 의료선교회관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역시 키스가 그린 1936년 도안은
팔각정과 원각사지 탑이 보이는 탑골공원에서 남매가 연날리기를 하는 정겨운 모습이다.
키스가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 그린 것이 사월 초파일날 한복을 입은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아이들을 각별히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1934년과 1936년 도안 모두 왼쪽에 ‘기덕(奇德)’이라는 서명이 보인다. 키스의 우리식 이름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다음으로 크리스마스실 도안을 많이 그린 화가는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4~2001)이다.
김기창은 1937년에 팽이치기를 소재로 도안을 했는데, 이 해는 그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해다.
당시 그는 23세의 청년이었지만 기량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그래서인지 셔우드 홀은 이 팽이치기 실이 외국 선교단체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고 회상했고,
다음 해에도 도안을 부탁했다.
김기창이 1938년에 그려준 도안의 소재는 제기차기였다.
그해 실 역시 세계 각국으로 배달되었고, 많은 결핵환자를 살릴 수 있는 돈이 모금되었다.
실 모금 운동에는 하와이에 사는 동포들도 동참했는데,
당시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신문 〈국민보〉는 1938년 11월 16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하와이 한인대학생회에서 연년이 황해도 해주에 있는 폐병요양원, 호놀룰루 리아희홈을 후원하는바,
조선 크리스마스실을 금년에도 팔기로 작정하고
각 지방 동포에게 조선 크리스마스실을 소개하오니 많이 사주시기를 바랍니다.
해주요양원은 10년 전에 조선 감리교 선교부 관할하에 홀 의사 부부가 창설하여
그동안 산수경치 좋은 기지에 수만 원 가격의 병원을 건축하고
수만 명 환자를 치료하여 폐병 박멸에 큰 공효가 많습니다.
조선에 폐병환자가 40여만 명이라는데 해주요양원에서는 폐병 박멸을 선전키 위하여 월간잡지를 출판하며목장 · 양계 · 과원 등을 경영하여 병원에 용달한다 하며,
매년 본국과 미국에 있는 모모 한국 친우들이 크리스마스실을 팔아서 경비를 써간다 합니다.
1전짜리 실을 얼마든지 사시는 것이올시다.
지방에서 만일 못 사시면국민보사(國民報社) · 태평양주보사(太平洋週報社) · 각 지방지회 · 교회에 문의하시오.
하와이 한인대학생회장 강영복, 조선 크리스마스실 위원장 김영기, 위원 임두화.
셔우드 홀의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계속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는 1940년 실 도안을 마침 우리나라에 와 있던 엘리자베스 키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셔우드 홀에 의해 발행되는 아홉 번째 크리스마스실이었고, 키스로서는 세 번째 도안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일제로부터 어이없는 탄압을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위의 그림이 키스가 원래 그린 1940년 크리스마스실 도안이다.
그런데 오른쪽 실에서 볼 수 있듯이 발행되지 못했다.
좀더 정확하게는 이 도안으로 실을 인쇄했는데 일본군 검열관이 국방안보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압수했다.
일제는 첫째 그림 뒤 배경의 산 높이가 20미터 이상이라는 점과,
둘째 일본 건국 2600년 대신 표시한 1940이라는 서기 연대 등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실 발행인 셔우드 홀은 너무나 어이없는 검열과 탄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째서 천진한 아이들이 국방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이 일본의 막강한 군대에 무슨 해를 미친단 말인가?
(······) 나는 2600년이라는 일본 연호는 결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과 대립되지 않는 대안을 생각해냈다.
실 보급 운동이 시작된 지 9년이 되었다는 의미로 ‘NINTH YEAR’로 대치하겠다는 내 안은 성공했다. (······)
나는 가장 외교적인 방법으로 설득했지만 키스 양은 내 예상대로 펄펄 뛰었다.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는데, 다행히 키스 양이 겨우 배경을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수정한 그림도 역시 멋있었다. 색동옷을 입은 소녀와 소년이 예술적인 대문 앞에 서 있는 그림이었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먼 산이 대문을 통해 그대로 보였다.
이건 키스 양이 일부러 짓궂게 그렇게 한 것인데도 육군 검열관은 이를 알지 못했다.
이 실이 2차대전까지의, 조선에서 만든 마지막 실이 되었다.
- 《닥터 홀의 조선회상》, 김동열 옮김, 좋은씨앗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크리스마스실 발행이 다음 해에 중단된 이유는,
셔우드 홀이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8·15해방 후에 재개되었다.
해주에서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동이 되어 1949년 한국 복십자회에서 다시 발행했고,
1952년에는 한국기독의사회에서 발행했다.
1953년에는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크리스마스실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셔우드 홀의 뒷이야기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추방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가서 다시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양소를 세웠고,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그렇게 인도에서 23년 동안 결핵과 싸운 셔우드 홀은, 캐나다에 돌아가 은퇴생활을 하다가
1991년 4월 5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부모가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9월 19일 타계한 부인 또한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