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방역 때문에 생방송 없이 혼자 미사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신자를 만난다는 설렘에 조금 흥분도 했는데, 4명만 허락되니 나와 사진 찍는 형제 빼면 2명인데 누구를 부릅니까?
여러분을 인생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옛날 노래에는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했지만, 인생은 만남입니다. 결국 수많은 만남이 이어져 그 사람의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만남의 무대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만남의 무대에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이, 진리와 거짓, 신의와 배신의 만남이 있죠,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어찌 보면 치열한 대결의 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성서에 처음 나오는 인류 최초의 불행한 만남은 남도 아닌 형제지간, 카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살해의 만남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과 유다스의 만남은 배신과 가책의 만남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진리를 사랑하는 깊은 내면적인 만남이었죠. 또 암브로시오 주교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만남은 회개시키는 역사적인 만남이었죠.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성인의 만남은 기울어지는 중세 교회를 재건하는 큰 계기가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단종과 성삼문의 만남은 신과 의를 잇는 불멸의 충성을 빛나게 하던 만남이었죠. 또, 공자와 안회의 만남은 유교를 창립하게 한 만남이었고요. 석가모니와 아난의 만남은 불교의 기본교리를 적립하는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인류 구원 기관인 교회를 탄생시키는 참으로 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면 김웅열 신부와 김웅열 신부를 만났던 많은 신자와의 만남은 행복한 만남일까 아니면 불행한 만남일까?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성당의 신자들이 나를 생각할 때 신부님과 같이 있을 때 참 행복했다고 기억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불행한 만남으로 기억에 남아 있을까? 여러분은 김웅열 신부와의 만남이 행복하십니까? 어떤 분은 ‘늦게서야 신부님 알아 유튜브 듣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왜 진작 못 알았을까요?’ 하는 분도 계십니다. 35년 이상 피정 지도 다녔지만, 피정에 잘 참석하지 않는 분은 모르죠. 그리고 이렇게 사제와의 만남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 분명히 때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유튜브 신자들과의 만남, 또 제가 거의 20년째 운영하는 느티나무 카페 식구들과의 만남은 어땠을까? 은퇴 후 뒤를 돌아보면서, 제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와 만남을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잘못된 만남이라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라는 말처럼 저는 ‘나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분명히 행복해하고 있다.’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아무튼 인간이 선하게 변하는가, 악하게 변하는가는 어떤 만남이었는가에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성경 공부의 만남은 어떨 것 같습니까? 성경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회개의 마음, 감사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고, 하나씩 깨우쳐 가는 기쁨도 클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의 흉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 각자 각자는 악하게 변하지 않고 분명히 선하게 변하리라 생각됩니다. 또 실제로도 그렇죠? 성경 공부하고 더 나빠졌다 한다면, 그 사람은 성경 공부 잘못하고 있는 것이겠죠. 제 강론을 오랫동안 들으면서 더 못돼지고 악해진다면 듣지 마십시오. ‘신부님 얼굴은 뵌 적도 없이 유튜브를 통해 강론을 들으면서 제가 많이 선해졌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셔야 합니다. 긴 세월 동안 유튜브, CD, 테이프 등으로 나와 있는 제 강론을 계속해서 들으면 아마 돌멩이도 회개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계 모임의 만남은 어떨까요? 그 모임을 연결해 주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돈입니다. 돈으로 연결되어 있죠. 물론 모든 계가 다 망가지거나 이상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연결된 계 모임의 만남은 자칫 잘못하면 시기와 질투, 허세 등으로 망가지게 됩니다. 인간적인 재미는 있을지 몰라고 내적인 평화와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성당 미사 다녀올 때보다 계 모임 다녀올 때가 더 마음이 평화로워’ 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요? 성당 가서 평화롭게 만들지 못한 교회가 잘못일까요? 혹은 은혜로운 계 모임이라는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계모임은 유리잔처럼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습니다. 또 시집가기 전에 착했던 자매가 남편을 잘못 만나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할 수도 있죠. 반대로 남자도 역시 여자를 잘못 만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의 만남은 분명히 성령의 만남이었고, 역사에서 여인들의 만남 중 이토록 아름답고 흥분되고 짜릿한 만남은 분명히 없었을 겁니다.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에서 위대한 만남을 갖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 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첫째, 두 여인의 만남이 거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질은 언어의 내용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도 자주 말에 대해 회개하고 뒤를 돌아봐야 합니다. 1년 동안 내가 만났던 형제자매와의 대화에서 습관적으로 했던 거짓말, 생각지도 않고 내뱉어 상처 주었던 말, 책임질 수 없었던 말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 자체는 신비스럽고 귀한 것이지만, 나중에 경솔함이나 악한 마음 등으로 그 만남이 추하고 냄새나는 만남으로 어둡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 묵상해야 할 것은 ‘말’, 정확히 ‘말씀’입니다.
두 번째,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훨씬 위였지만, 마리아에게 찬사를 드립니다. 딸뻘인 마리아에게 찬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마리아 태중의 예수님 때문이었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모셔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성당 다니시는 분인데 세상의 법과는 반대로 사는 것 같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다른 이에게 존경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의무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감실인 우리는 당연히 존경받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내 가족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지 못하다면 분명 문제 있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묵상할 것은 엘리사벳의 겸손입니다. 나이로보다 족보로 보나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엘리사벳은 예를 갖춥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며 겸손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듯이,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열 달 동안 분노를 품고 화를 품고 적개심을 갖고 아이를 품었으면, 그 아이는 폭력적이고 늘 화에 차 있습니다. 열 달 동안 착한 마음, 겸손한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태교하면, 그 아이는 분명히 기본적으로 선한 인성을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태교는 그만큼 자식들에게 중요하죠. 교만한 부모 밑에서는 교만한 자식이, 욕심 많은 부모 밑에서는 욕심 많은 자식이 나옵니다. 뱃속부터 엄마 기도하는 소식을 들은 자식은 커서도 열심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교육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제대로 된 역사에 남을 인물 하나 만들려면 3대에 걸쳐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두 여인의 만남처럼 우리 신자들의 만남은 거룩하고 복된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앞으로 만날 사람들, 또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상처받지 말고, 마치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서로 존경하고 찬미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또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존경받듯이, 움직이는 감실, 걸어 다니는 감실, 성체를 모시고 말씀을 모시고 사는 우리도 분명 세상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아야 하는 것을 명심합시다.
여러분들 대림 마무리 잘하시고 거룩한 성탄절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2021년 대림 제4주일 (12/1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