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지. 다 이해해.” 실수한 사람을 위로할 때 하는 말이다. 사정을 헤아려 보니 당신의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내가 당신을 이해한 순간이다. 이해했다고 해서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또 아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해’의 영어 단어 ‘understand’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당신이 있는 곳 아래(under) 서는(stand) 것이 올바른 이해의 자세라는 뜻이 담겼다. 상대보다 낮은 곳에 한 번씩 번갈아 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위아래 구별 없이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이해가 이루어진 다음의 모습이다. 어쩌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둘 사이 교감과 공감의 출발점이 될 공통의 나무 그늘을 찾았다는 뜻일 수 있다. 그 아래에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 우산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모습이 ‘이해’의 모습이다. 한 나무, 한 우산 아래 함께 나란히 서는 것이 서로의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다.
파인만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른 문장이다. “제발 날 좀 이해해줘”라고 할 때, 양자역학을 이해하듯이 나를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슈뢰딩거 방정식에 동의하지 않고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객관적인 논리가 중요치 않은 너그러운 받아들임이지만, 양자역학의 이해는 논리적인 사고로 내용을 깨달았다는 뜻일 뿐, 너그러움이 필요치 않다. 나도, 콧대 높은 양자역학도, 서로에게 너그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양자역학 시험 점수가 100점으로 같은 두 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자신이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다른 학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배운 모든 물리학도가 가지게 되는 근원적인 질문이 바로 ‘이해’의 의미다. 양자역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과학의 이해도 사람의 이해와 닮아서, 그 아래 그늘에 설 한 그루 나무가 필요하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바로 이해를 위해 그 아래 설 나무의 이름이다. 과학은 햇볕 쨍쨍한 마른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다. 패러다임의 나무는 수많은 가지와 나뭇잎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하다. 양자역학을 처음 배우는 학생에게 “입 닥치고 계산 먼저(Shut up and calculate)”를 추천하는 이유다. 수학적 방법론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나서, 이후에 그 의미를 고민하라는 충고다. 양자역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면, 일단은 양자역학의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익숙해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오로지 고전역학으로 기술되는 세상의 모습에 맞춰 생각의 모듈이 장착된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전자, 양성자와 같은 작은 세상을 직접 감각해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시적인 크기의 세상에서 양자역학은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아,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총알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당연히 우리가 익숙한 고전역학의 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양자역학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의 나무 아래 서야 한다. 똑 같이 100점 만점을 받아도,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모두 가능하다. 어느 나무 아래에 서서 ‘이해’를 말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를 뿐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한 물리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말도, 물리학자라면 양자역학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말도, 모두 맞는 이야기다.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때의 ‘이해’는 고전역학의 나무 아래에서 본 양자역학 이야기일 뿐이다.
과학이나 사람이나, 공통된 지점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라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함께 한 나무, 한 우산 아래 나란히 서야 한다. 세상을 얼마나 넓게 이해하는지, 내 이해의 폭은 내가 그 아래 선 나무가 드리운 그늘의 면적에 비례한다. 누구 하나 같은 이 없어 유일하고 소중한 우리 모두의 머리 위, 숲처럼 울창한 이해의 나무를 꿈꾼다. 서로 제각각 달라도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이의 발아래 누구도 서지 않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