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106]시(詩)에 비친 ‘오수 이야기’(2)
뭇 시인들이 '오수'라는 조그만 면소재지에서 천 년 전에 발생한 ‘오수개 실화’에 대해 어디서든 들었을 것이니, 그 느낌이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요. 하여 서너 분의 시인들이 오수를 읊었는데. ‘섬진강 시인’임을 뽐내는 김용택 시인은 <오수 장날>이라는 시를 써 조금은 이채롭더군요.
<비 오면 비 오는 대로/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강물은 제 길을 가는데/오수 장날/장터 한 구석/강물소리 들으며/국밥 한 그릇 말아놓고/늙은 아내와 마주 앉아/세상 이야기 나누는 저 노인//굽은 등 위로/비가 내리고/바람이 분다/세상은 바삐 돌아가도/강물을 제 길을 가고/노인의 수저 끝엔 강물 소리가 걸려 있다>
지사예전의 오수는 조선시대 ‘오수찰방’이 있었던 전라도 교통의 요지였는데, 근대에 이르러 오수리 인구가 2만명으로 전국 최다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일장이 얼마나 굉장맹장, 성황이었겠습니까? 기생집이 4곳이나 있었다더군요. 지금은 쇠퇴할 대로 쇠퇴해 면 전체 인구가 5천명에 밑돈다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겠지만, 흐름 따라 살아가는 게 세월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군소재지인 임실과 임실장은 오수와 오수장에 비해 상대도 안된 시절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35사단 등이 들어서 역전된 지 오래입니다. 아무튼, 시인 김용택 님이 오수장을 와본 적이 있던 모양이지요. ‘강물(오수천) 소리 들으며, 국밥 한 그릇 말아놓고 늙은 아내와 마주 앉아 세상 이야기 나누는’ 촌로의 굽은 등 위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았겠지요. 시인의 감수성은 이래서 시를 쓰는 데 필요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남들은 모두 ‘뻘로’(아무렇지 않게) 보아도, 시인은 ‘노인의 수저 끝에 강물 소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는 눈이 있으니, 시인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별종이라 하겠습니다.
오수가 고향이라는 월촌(月村) 이기반(1931-2015) 시인의 <오수에서>라는 시도 좋았습니다. 같이 감상해 보시죠.
<주인은 잠들고/불길은 산을 덮는데/제 몸을 적셔/주인을 살리고 간/그 충직한 넋이여//천 년을 하루같이/원동산 마루에/푸른 바람으로 살아/지나가는 길손의/옷깃을 여미게 하네//꽃은 피고 져도/그 이름은 지지 않아/오수천 맑은 물에/굽이굽이 흐르나니/의로운 그 숨결/우리 가슴에 남았네>
시인 이기반(1930-2024) 님은 고향 이름의 유래가 된 설화 속 ‘의로운 정신’이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오수천과 원동산에 면면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시로 형상화했군요. 어쨌든 아름다운 운문입니다. 언제 한번 오수 장날 국밥 한 그릇 들고 원동산 공원을 거닐며, 이 시를 떠올려 보는 것도 매우 운치있을 것같지 않나요?
또한 정양(1944-2023) 시인이 읊은 <오수개>는 어떤가요?
<주인은 술 취해 잠들고/들불은 사방에서 혀를 낼름거리는데/미물인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만/시냇물에 몸을 적셔/수천 번 수만 번 구르고 굴러/주인의 잠자리를 지켜냈구나//사람들은 제 살 길 찾아 등을 돌려도/너는 젖은 털 하나로 불길을 막아서고/지쳐 쓰러진 네 무덤가에/주인이 꽂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어/오늘도 푸른 잎을 틔우고 있다//개만도 못한 세상이라 손가락질해도/오수 장터 흐르는 물소리엔/아직도 네 젖은 몸 터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오수는 익산(이리) 이전의 전라도 교통의 요지에 앞서 ‘오수개 설화’가 빠져서는 얘기가 되지 않을 것같습니다. 푸르른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와 의견의 죽음을 통시적(通時的)으로 엮어 세상 인심과 의리, 충절을 노래한, 주로 전북 출신 문인들의 시가 제법 있더군요. 조선조에도 오수와 오수의견묘를 소재로 한 한시들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노숙동(1403-1463)이 쓴 작품입니다.
月出天邊水暎樓(월출천변수영루) 달이 하늘가에 뜨니 물은 누각에 비치고
庚公淸興更悠悠(경공청흥갱유유) 경공의 맑은 흥취는 더욱 유유하구나
驛前忽見埋獒樹(역전홀견매오수) 역 앞 나무 아래 개를 묻었다는 곳을 문득 바라보며,
却起征人戀主愁(각기정인연주수) (이 설화를 들으니) 되레 이 나그네로 하여금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는 근심을 불러일으키는구나.
*暎(영)은 ‘비치다’
*庚公(경공)은 중국 동진의 유량(庾亮)으로, 금수저 출신이자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었다함. 노숙동 자신을 풍류객이라고 빗대 말한 것임.
*忽(문득 홀)
*埋獒樹(매오수)의 ‘매’는 묻다. 즉, 개를 묻고 지팡이가 자란 개나무 지칭.
*却起(각기) ‘도리어 각’ ‘일어날 기’. 도리어 (마음속에서 수심이) 솟구쳐 일어나다
*征人(정인)은 나그네(노숙동 본인).
셋째 구절 <驛前忽見埋獒樹>을 보면, 말을 빌리려 찰방이 있는 오수역(현재의 옮긴 역이 아니고, 예전 역은 번영회 광장터로 추정됨)에 들러, 개무덤(의견비가 발견된 상리 근처 추정)과 노거수로 자란 나무를 바라보며 감회를 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세기까지 개무덤이 있었으니, 언제 훼손되고 일실이 되었을까요?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만약에 지금까지 그 무덤이 보존돼 내려왔다면, 그 이후 기록이 한 줄이라도 더 있었다면, 이는 무조건 세계적인 토픽일 것입니다. 일부러 홍보를 하지 않아도, 지구촌의 수많은 반려인구들이 한국 관광을 겸해 오수를 찾아 무덤과 의견비 그리고 노거수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 정신이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원통절통한 일이 아닐는지요? 그날이 올 수 있을까요? 아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