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9
12월31일[성탄 팔일 축제 제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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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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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diEoaTl9Ps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도회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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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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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u2k9-kg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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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죽지 않아. 한 말씀만 있으면>
오늘 복음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말씀이 어떻게 생명이 될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말씀을 갈망합니다.
‘책도둑’은 나치 독일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인공 리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말씀’을 통해 글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의 잔인한 폭정에 반대하는 책들은 다 불태웠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리첼은 그래도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불타다가 남은 책들을 주워 읽습니다.
그가 글을 배우고 읽고 쓰는 작은 지하실은 독일에 남은 작은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유대인을 숨겨주며, 훔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시켰습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파괴된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그 작은 지하실에서 글을 쓰다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잔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면 결국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리젤의 이야기는 암흑 속에서도 빛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의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었던 흑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 안젤루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큰 고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는지 안다’라는 그녀의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래합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야 안젤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바라는 이는 새의 날개처럼 힘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그녀의 삶에 잘 들어맞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오며 깨달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너는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여 믿음을 키웠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오프라 윈프리를 절망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말씀은 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한 번은 성체를 영하면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사제로서 길로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제직의 여정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제 길의 빛이옵니다.’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이끄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진리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이를 믿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한 말씀은 나의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말씀으로 나의 길을 닦는다면, “난 결코 쓰러지거나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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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손님들이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운동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9명이라서 한 명이 남았습니다. 제가 양보하려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빠질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이 양보하겠다고 해서 8명이 운동하려고 출발했습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했지만 즐겁게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본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신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양보하기로 한 분에게 저 대신 운동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도 춥고, 피곤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르신도, 어르신을 모시는 따님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이번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잘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을 아시는지, 하느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곤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복음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죄지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겸손한 이들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는 2024년의 마지막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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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기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여지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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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부임 첫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에 사제관에 전화가 왔습니다. 본당 총회장님이었습니다. “신부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저희가 성전에 모여 있는데, 잠깐 오셔서 강복 좀 주실 수 있나요?” 성전에 들어가 보니, 몇몇 교우들이 성체 조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일출 보러 바다로 산으로 떠났는데, 저희는 예수님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1,16)라는 복음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은총의 샘이십니다. 그러나 사목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제1독서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예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은총과 생명, 구원의 빛이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좋았던 모습도 그러지 못하였던 모습도 모두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어 나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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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지나가는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다가오는 시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두 경우 다 하느님이 ‘시간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입니다(묵시 1,8). 시작하는 것도, 마치는 것도 전부 다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내일’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일’이 나에게 주어질지, ‘내일’에도 내가 살아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내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다.”라는 말은, 인간이란 정말로 보잘것없는(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인생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이 아니라면......
2)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시작할 때, 그 일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계시를 받아서 명시적으로 허락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또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확신하는 경우라도, 결과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바벨탑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창세 11,1-9) 하느님께서는 처음에는 인간들이 탑을 쌓는 것을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고 사람들을 흩어 버리신 것은, 사람들이 한창 공사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간 것을 하느님께서 허물어 버리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바벨탑처럼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건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전부 다, 세속의 불의한 권력들도, 부정하게 모은 재물들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도 바벨탑의 경우와 같습니다.(마태 24,1-2)>
4) 자신의 인생을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바람’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희망’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인가?
<세속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면 ‘선한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바벨탑을 쌓는 ‘악한 욕망’일 뿐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태도는,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드리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진정한 감사는 참된 겸손과 하나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말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도 잘난 체 하고 교만하다면, 그리고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그 사람의 말은 ‘빈말’이고 ‘위선’입니다.
루카복음 18장 9절-14절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위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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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여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잠은 어디서 잘지, 먹는 것은 어떻게 할지, 꼭 찾아보아야 할 곳은 어디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3박 4일의 여행을 알차고 의미 있게 만들려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일주일의 휴가와 휴가비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계획을 열심히 세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만일 한 달이 주어진다면? 한 달의 계획도 세울 것입니다. 만일 일 년이 주어지면? 백 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제 인생의 계획이자 목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인생길에서 제가 찾은 별은 하느님입니다. 살아 계시고, 사랑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은 사람, 곧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의 참의미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다른 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본래에는 하느님만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선 상기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한 인격이나 물건을 하느님의 소유가 되도록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서로 보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것에서 따로 떼어 내어 구분하고 인간의 사적인 영역에서 ‘따로 떼어 놓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영역으로의 이 ‘넘겨 줌’에는 ‘보냄’, 곧 파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졌기에 성별된 현실, 성화된 인격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바쳐집니다. 하느님께 바쳐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 기도』, 203-20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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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루에 한 개씩 칠한 그림의 색이 벌써 365개나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뒹굴던 형형색색의 하루하루 그린 조각들을 오늘은 한 데 모으는 날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나의 2024년이 되시어’라는 이름으로 초상화가 되었습니다.
예순 다섯번째 그려진 2024년 삶의 초상화 앞에서 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두려움, 위로와 쓰라림, 영광과 고통의 색이 어울려진 얼굴입니다. 환하다가 어두웠고 역동적이다가 정적이었으며 적극적이었다가 소극적인 삶이 그려져 있는 얼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그려진 내 삶의 초상화는 점점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삶을 잘 살아서 아름답다기보다, 잘 살지는 못했더라도 이젠 그저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나 봅니다.
그려진 초상화가 날이 갈수록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초상화가 모두 따뜻한 색이기때문이 아니라, 아주 작은 따뜻함도 느낄 수 있는 여유 때문입니다. 차가운 삶을 헤쳐서 나온 만큼 따뜻한 삶을 느낄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어울려진 삶의 초상화는 나만의 그림 성서입니다. 내 삶의 행복과 불행이 여러가지 색으로 표현된 그림 성서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 그리고 사랑과 미움을 겪었지만, 궁극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이기에 우리의 초상화는 하나의 그림 성서입니다.
“말씀이 되신 나의 2024” 초상화를 오늘은 마무리하여 하느님과 통하는 내 영혼의 방에 걸어 두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말씀과 함께 가끔씩 꺼내어 보고 싶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 영혼의 방에 거는 2024 초상화 나만의 그림 성서는, 내일부터 다시 그리는 2025 초상화를 위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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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살았다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매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아내, 엄마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분이었다. 또 이웃에게도 친절했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죄짓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매님에게 충격적인 일이 다가왔습니다. 글쎄 말기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의사에게 암이 생긴 이유를 물었습니다. 뭘 잘못 먹어서인지,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인지, 뭐든지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분명히 자기 탓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그냥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같은 것이에요.”
무엇이 잘못되면 원인을 찾고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이때 드는 생각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평으로 삶 전체가 부정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일상 삶 영역을 넘어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하느님의 영역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하느님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의 영역을 넘어 진정한 행복이 있는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고 또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맡길 때 바뀔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요한은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한이 과연 아무런 문제 없이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역시 많은 고통과 시련으로 겪었고, 그러나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더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 뜻을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벌써 2024년의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올 한 해 과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어도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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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요한 1,1-18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나 있음에>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나 비록
빛은 아니지만
빛 머금은 나
세상을 비추어
빛께서 더욱
빛날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말씀은 아니지만
말씀 품은 나
세상에 울려 퍼져
말씀께서 더욱
말씀하실 수 있었기를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생명은 아니지만
생명 깃든 나
세상에 스미어
생명께서 더욱
생명 돋우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 모신 나
세상을 보듬어
하느님께서 더욱
하느님이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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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들리는 소식은 맑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둡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정치, 경제의 성숙한 모습은 기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을 가진 책임의 실종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국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 권력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걱정입니다. 믿는 이들만이라도 서민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이 위로가 되길 희망합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라고 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찾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해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워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 1,10-11) 오늘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 잇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명, 하늘의 말씀, 하늘의 법칙이 살아있어 감사할 수 있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복 많이 지으시고,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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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한 처음에”라는 이 단어는 창세기의 첫 단어이기도 합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1)
“한 처음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베레쉬트)는 ‘집’, ‘안에’(베트)라는 말과 ‘처음’, ‘시작’(레쉬트)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세상이 집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집’(베트)이란 곧 ‘하느님의 집’, ‘하느님이 거한 처소인 성전’을 의미하고, ‘처음’(레쉬트)이란 곧 ‘첫 열매’, ‘하느님의 맏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해석해 보면, ‘맏아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집인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들’(바르)이란 단어의 뜻은 ‘집의 사람’, ‘집에 거하는 사람’, 나아가서 ‘집에 거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온전한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들’은 ‘아버지가 거처하는 집’인 셈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10)
그러니 오늘 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말씀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아 우리 가운데 사신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곧 우리를 ‘하느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뜻은 ‘집을 다스리는 사람’, 곧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며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안입니다.”(히브리서 3,6)
그러니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는 사람이 바로 아들’입니다. 여기서 ‘경작하다’, ‘다스리다’는 말의 히브리어(아바드) 뜻은 성경에서 주로 ‘섬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집의 문을 보는 것’, 곧 ‘주인의 집에 문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종’의 모습을 말합니다.
탈출기에서는 ‘주인을 사랑하여 함께 살고자 하는 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은 그를 하느님께 데리고 가서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 세우고,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그의 종이 된다.”(탈출기 21,6)
이처럼, ‘종’은 항상 주인의 집의 문에 서서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을 섬기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서 2,7-8)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자녀인 우리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섬기는 삶이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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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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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되기”의 평생과제
<성화의 여정>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요한1,12)
2024년 한해 365일 꼬박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매일미사와 매일강론, 매일기도로,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음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립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 받으소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평생 기도이자 삶의 요약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성 베네딕도의 평생 기도이자 삶의 요약입니다.
두 고백 기도와 더불어, 이런저런 나눔으로 2024년12월31일 마지막날 강론을 시작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 1면 기사는 “교황 프란치스코, 지미 카터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다.”였고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내용이었습니다.
엊그제 29일 ‘1차 북핵위기 해결’에 크게 기여했던,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제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이 향년 100세로 별세했습니다. 퇴임 후로도 최선을 다한 봉사활동의 삶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위인입니다.
<다산, 어른의 하루> 어록의 12월31일 말씀도 좋은 가르침의 지혜가 됩니다.
“기적은 힘차게 내디딘 첫걸음에서 시작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디딘 마지막 걸음에서 완성된다.”<다산>
“함 삼태기의 흙을 더 붓지 않아 산을 못 만든 것도 내가 그만두는 것이다. 한 삼태기 흙을 부어 평지에서 시작하는 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논어>
모두가 한결같이 시종여일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독려하는 말씀입니다.
2014년 마지막날을 맞이하여 새삼 생각하는 참사람되기, 성화의 여정중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면 90세 전후로 선종을 예감한다면 14년 정도 남았습니다. “아직도”라는 기대와 “벌써” 라는 아쉬움 중, 하루하루 계산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인생, 남은 세월 허영이나 환상이 걷힌 맑고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참사람되기의 성화의 여정중에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오늘 일년 마지막날 복음은 언제나 요한의 장엄한 “말씀찬가”(요한1,1-18)입니다. 요한 사도가 제1독서에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이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에 속할 때 온전한 진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화의 여정은 진리이신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성화의 여정을 잘 살아 참 사람이 되겠는지요?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참사람의 신원의 나눔입니다.
첫째, “말씀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게 되었으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참사람의 원형이, 성화의 여정의 궁극목표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바로 인간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가난도 허무도 탐욕도 인간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명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하고 역동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평생 말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생명과 빛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생명과 빛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생명과 빛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부터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생명과 빛의 사람이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죽음과 어둠이 그를 지배할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새삼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죽음이자 어둠입니다. 참생명이며 참빛이신 말씀이신 주님을 깨달아 아는 부단한 수행이 얼마다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셋째, “은총과 진리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사람의 원형인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분입니다. 사랑의 은총, 사랑의 진리요 결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요한의 은혜로운 확신에 넘친 힘찬 고백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품위의 삶의 원천은 은총과 진리의 주님뿐이요, 주님과 일치가 깊어져 주님을 닮아갈수록 비로소 아버지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은총과 진리의 참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사람으로 태어난 선물 인생들입니다. 성화의 여정을 통해 참사람되는 평생 과제를 부여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첫째,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생명과 빛의 사람이 되십시오.
셋째, 은총과 진리의 사람이 되십시오.
더불어 이렇게 살 때 하느님 영광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거룩한 참나의 삶이겠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답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 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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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처음이신 주님>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한 해를 마치면서 지난 한 해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 지향적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내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와 미래가 같이 있는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현재의 자기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의 감정과 상태가 과거도 미래도 매몰시킬 뿐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눈 다른 사람들을 같이 돌아볼 수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나의 한 해 동안 나에게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뿐 아니라 나의 삶을 힘들게 했던 사람까지 함께 돌아보는 사랑의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안 좋은 일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안 좋은 것만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는 사람은
나 같이 부족한 사람, 나 같은 죄인에게 좋은 일도 많았고 너무도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고 한 해를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인간과 인간사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일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일과 사람들을 보는 사람은 그 일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느님이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내다보면서
모든 시간의 원천이요 주인이신 한 처음을 봅시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주시는 하느님을 봅시다.
2024년도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새해 모든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은총으로 껴안으실 수 있는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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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1)동병상련!>
오늘 복음(요한 1,-18)은 '요한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머리글'입니다. 이 머리글을 '로고스(말씀) 찬가'라고 부릅니다. 이 로고스 찬가의 배경이 되는 말씀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3.9.14)
오늘은 '주님성탄대축일 팔일 축제 제7일째 날'입니다. 주님부활대축일과 함께 주님성탄대축일이 아주 큰 축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팔일 동안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전례적으로 이 큰 기쁨의 축제일에 여객기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179명이 사망했고, 2명이 구조되어 치료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임신한 엄마와 함께 태아도 죽었고, 어린 아이도 죽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 형제 자매들이 안타깝게 그것도 순식간에 하늘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 할 일은 그 대참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처럼 여기면서 조용히 유가족들의 마음에, 아픔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기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부는 1월4일 자정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일들, 그리고 약속되어진 일들도 있겠지만, 희생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큰 아픔에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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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2)한 해의 끝 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미사(송년미사)가 거행되는 끝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어두운 세상과 어두움이 드리워진 인간의 마음을 비추시어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사도는 오늘 복음(요한 1,1-18)에서 세상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때 본기도입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의 탄생으로 참된 믿음을 일으키시고 완성하셨으니, 저희를 인류 구원의 샘이신 성자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 독서(1요한 2,18-21)에서 요한 사도는 '지금이 마지막 때'이고,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빛이신 성자의 지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해의 끝 날인 오늘, 나는 '성자의 지체'로 살아왔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성찰해 보고, 깨끗한 마음 안에서 새해를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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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
2024년은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본분을
다시 배우는
가치있는
한 해였습니다.
가장 쉽고도
평범한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늘의
빛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밀어낼 수 없는
하늘의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은
우리의
본모습을
찾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오늘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참빛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의 참빛은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을 키우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뜨거운 마음을
태우며 사랑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세월의 발걸음은
차갑지 않아야
합니다.
2024년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얽매임과
사로잡힘이
아닌
평화의 빛을
믿기에
우리 안에
피어나는
많은 감정들을
하느님께
내려놓습니다.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더욱 빛나는
은총의
2025년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024년의 고통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더 한층
성장하는
2025년의
참빛이 되길
희망합니다.
서툰 묵상이지만
제 마음을
받아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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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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