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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 인사(갈1:1-5)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시기에 대하여 두 주장이 있다.
이를 판단하는 중요한 관점은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 방문이다(갈2:1-3).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을 판단하는 관건은
유대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문인지(행11:27-30),
아니면 종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방문인지 문제이다(행15:1-29).
다른 중요한 관점은 갈라디아의 명칭에 관한 것이다.
갈라디아라는 명칭이 민족적인 측면에서 언급되었다면 북갈라디아를 가리키고,
행정구역에 의한 언급이라면 남갈라디아를 가리킨다.
북갈라디아는 바울 사도의 제2차 선교여행 때의 경유지이며,
남갈라디아는 바울 사도의 제1차 선교지역이다.
남갈라디아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2:1-10의 내용이 예루살렘 방문과
유대 형제들을 위한 구제가 함께 이루어진 일로 본다(행11:27-30).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유대 형제들의 구제를 위한 것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작되는 말과(갈2:1) 끝맺는 말이(갈2:10) 이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계시 때문이라고 말한다(갈2:1).
여기에서 언급된 계시는 흉년이 들 것이라는 계시이다(행11:27-30).
그래서 끝말인 가난한 자들을 부탁하였다는 말은(갈2:10)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에게 지속적인 구제를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갈라디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의논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를 지속할 것을 부탁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의 통상적인 인사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은 서신의 특징과 서로 상응한다.
사도직은 그리스도께서 파송하신 권세의 직분이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하는 동료들을 언급할 때에 ‘형제’라고 칭하여 바울 자신과 구분한다.
그러나 교회를 격려하는 서신에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언급하지 않는다(빌립보서, 데살로니가서, 빌레몬서).
그런데 섬김을 격려하는 빌립보서에서는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한다(빌1:1).
신실한 교회를 위로하는 데살로니가서는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만을 나열하며(살전1:1),
노예 신분인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간청하는 빌레몬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중에 갇혀있는 자’로 말한다(몬1:1).
그러나 교회를 훈육하는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고린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변증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변증하는 주제와 함께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구원 역사적인 직무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라고 인사한다(롬1:1).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도이다.
바울의 통상적인 인사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다(갈1:3).
목회 서신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긍휼을 강조한다(디모데서 디도서).
바울이 언급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샌드위치 구조이다.
가운데 위치한 긍휼은 은혜와 평강의 통로이며 이는 인사말의 핵심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문안한다(갈1:3).
이에 대한 구약 배경은
이전 언약을 새롭게 갱신한 출애굽기 33:18-19, 34:5-7,
대제사장의 축복 기도인 레위기 9:22-24, 민수기 6:22-27이다.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은 로마서의 인사말과 유사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강하게 변증하고 그가 전한 그리스도 복음을 요약한다.
인사말에서 바울이 사도직을 강하게 변증하고 그리스도 복음을 요약함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그리스도 복음이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직의 신적인 기원과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 복음을 한 단위로 묶어서 반복하여 변증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고 형제들에게 문안함으로 내용을 시작한다.
이러한 바울의 소개와 문안 인사는 상
투적인 것이 아니라 서신 내용의 도입부를 이루며,
이는 서신 전체 내용과 상응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보내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여(1:1),
그를 사도로 보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운다.
이는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분의 권위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특별하게 사도직 기원을 언급하여 사도로서의 권위를 강하게 내세운다(갈1:1).
갈라디아서의 인사말(갈1:1-5)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은 로마서의 인사말과 유사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강하게 변호하며,
그가 전한 그리스도 복음을 요약하고 설명한 후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라고 영광을 돌린다(갈1:4-5).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는 아버지 뜻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은 먼저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들이며,
이어서 이방인 중에서 택한 백성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가 그의 사도직을 강하게 변증하고 그리스도 복음을 요약함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그리스도 복음이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그리스도 복음을 하나로 묶어서 반복하여 변호한다(갈1:1, 11-12).
그리스도의 사도가 됨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표적에 있다(롬15:10, 고전12:12, 4:19-20).
구약교회는 모세율법 위에 세워졌으나,
신약교회는 사도들이 해석하여 기록한 그리스도 복음 위에 세워졌다.
구약교회는 모세의 말이 시행되는 세상에 속한 교회이나,
신약교회는 예수의 말이 시행되는 하늘에 속한 교회이다.
세상에 속한 교회라고 함은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워진 교회라는 말이고,
하늘에 속한 교회라고 함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 품 안에 세워진 교회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약교회 직분의 정통성은
구약선지자들이 선포한 모세율법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 복음과 일치함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과 함께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성도에게 문안을 한다(갈1:2).
따라서 바울은 모세를 이어받은 구약선지자들 이름으로 문안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 문안한다(갈1:1-3).
바울과 함께 한 형제들이 바울과 같은 내용의 문안 인사를 함은
그들도 모세에게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바울과 같은 길을 걷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함께 한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세움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율법의 613개 조항을 가르치거나,
613개 율법 조항을 해석한 장로들의 전통이나 유전을 가르치지 않으며,
한국교회 목사들처럼 십일조를 행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복음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바울과 함께 한 형제들은
모세가 명한 할례나 성전제사, 십일조처럼
613개 모세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가르치도록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바울의 문안 대상
바울 사도의 문안 대상은 갈라디아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다.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문안의 대상이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방인 출신 형제들과는 한 상에서 먹을 수 없으며(갈2:11-14),
율법이 명하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갈4:10).
이는 모세가 반드시 지키라고 명한 안식일이나,
칠칠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나,
희년과 같은 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거짓 선생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이(갈1:6-8)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르치고 시행하는 십일조이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십일조를 행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갈1:8-10).
이처럼 거짓 선생들은 모세율법을 가르쳐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따르도록 하였다.
예전의 구약으로 돌아가서 모세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유혹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그리스도 몸이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라고 문안한다(갈1:3).
생각해보라.
구약의 모세나 다윗, 이사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겼던가?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유대 땅에 보내시지도 않았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행되지도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해석하여 설명한 사도들도 없는데,
어떻게 구약백성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 아들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개혁신학 가르침처럼 아무리 모세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더라도,
율법 아래에 있는 한 하나님 앞에서 종(머슴)으로 남는다.
종(머슴)으로 남는다고 함은 죄와 사망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개혁신학의 가르침처럼 예수께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켰더라도,
율법을 지켜서 얻은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의로움이며,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히10:4,11).
따라서 바울의 문안 인사는 단순히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사도의 권위로 비는 축복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 복을 빌며 문안하는 인사이다.
이러한 사도의 축복과 문안이 ’은혜와 평강‘이다.
맺는 말
율법 아래에서 직무를 받은 자는 율법이 약속한 복으로 축복하며 문안 인사를 한다.
율법의 복은 아래로부터 난 옛 백성에게 합당한 복이다.
옛 백성에게 합당한 복은 가나안땅에서 전쟁이 없고
풍성한 소출을 누리며 전염병이나 질병이 없이 장수를 누림과 같은 복들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행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축복한다(민6:24-26).
이러한 대제사장의 축복은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언약의 복이다.
옛 언약에 신실한 자에게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복은 아래로부터 난 옛 백성에게 합당한 복이다.
이스라엘의 기업인 가나안땅에서 전쟁이 없고 소산물이 풍성하며,
전염병이나 질병이 없이 장수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이 아니다.
이처럼 땅에 속한 복을 베푸심은 대제사장이나 옛 백성들 모두가,
아래로부터 나서 모세율법에 충실함으로,
겉만을 정결케 되어서 여호와의 백성이 된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아래에서 대제사장은 율법에 속한 은혜와 평강으로 백성들을 축복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고 문안한다(갈1:3).
이는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축복 대상이 위로부터 난 하나님 아들(자녀)이기 때문에,
바울도 하늘에 속한 복으로 축복하고 문안한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하늘에 속한 복이다.
은혜와 평강은 같은 가치의 말로써 은혜로 주신 평강을 의미한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다.
이는 구약처럼 죄가 지배하는 가나안땅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가 어찌하지 못하는 하나님 품 안에서 있는 은혜와 평강이다.
이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서 시행된 율법으로부터 속량이 된 하나님 아들(자녀)들,
하나님과 아무런 장벽이 없이 온전히 하나가 된 아들들(자녀)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다.
이처럼 종말에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들과 이방인 중에서 믿는 자들은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았다(갈4:4-5).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로 믿는 자들은 613개 율법과 상관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갈1:8).
이는 종말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는 어떤 율법의 그림자도 없어야 한다(갈1:8).
율법 그림자를 그리스도 몸인 교회에 들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암세포를 투입하는 일이다.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행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그리스도 복음을 변질시켜서 그리스도 몸을 병들게 하는 일이고,
종말의 그리스도 왕권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반역이다.
그것은 신약교회는 예수의 말이 시행되는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