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왜적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병영에서도 가족의 제삿날에는 공무를 쉬고 그리움에 젖곤 했다.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았으니 그리워서 마음을 달랠 길 없다.(11.15)”, “둘째 형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1.23)”, “맏형님의 제삿날이라 공부를 보지 않았다.(1.24)” 그는 또 왕이나 왕비를 기리는 나라 제삿날에도 공무를 보지 않았는데, 공식적인 휴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관리에게 식가(式暇)라는 휴가를 주어 조상과 형제자매 등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우리의 정신세계에 뿌리 깊이 남아있는 조상에 대한 제사에는 자신의 근본과 시작을 기억하려는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게다가 제사는 가계계승이나 가족 공동체 결속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제사가 있다 보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빚을 얻다가 가산을 탕진한 사례가 회자되곤 했다. “지금 세상의 부인들은 제사 음식을 풍성하게 차리지 못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긴다. 제사가 다가오면 일가와 이웃에게 넉넉히 먹일 것부터 생각하며, 돈이 없으면 빚을 얻기까지 한다. 결국 빚쟁이에게 모욕을 당하고 조상까지 욕을 보이니 어찌 그리 불효한가!” 이덕무의 『사소절』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상 제사에 담긴 뜻 올해 추석 명절은 연휴가 열흘이나 되어 제사보다는 휴가에 열중하는 모양이다. 같은 자손이지만 제사의 임무를 띤 부류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집마다 제사로 인한 고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흩어져 사는 자손들의 제사 참여 문제, 제수 비용의 문제, 제사 수를 조절하는 문제 등을 놓고 시대 상황과 타협을 모색하는 눈치들이다. 사안이 복잡할수록 근본으로 돌아가 제사의 의미를 묻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조상이란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와 무관하게 존재 자체가 후손에게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제사는 자기 속에 깃든 조상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인데, 그의 사회적 가치를 묻거나 공리주의적 평가를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식이다. 그래서 유교의 조상 제사를 만민 평등적 종교로 보는 이도 있다.
사자(死者)와 산 자의 교감에 제사의 근본 뜻이 있다면 사실 4대(代) 봉사나 3대 봉사는 그 뜻이 맞지를 않다.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은 증조부모까지 지내는 3대 봉사, 7품 이하는 조부모까지 지내는 2대 봉사, 서인은 부모만 제사지내도록 했다. 봉사 대수를 신분에 따라 다르게 규정한 것인데, 제사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은 셈이다. 그런데 주자가례의 도입으로 아무런 벼슬이 없는 서인도 4대 봉사를 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세종은 봉사대수에 구별이 없게 되면 신분질서가 흐트러질까봐 걱정한다. 다시 말해 본 적도 없는 고조부모를 제사 지내는 4대 봉사는 조상과의 교감보다는 계보의 질서와 형식에 의미를 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사의 방법과 형식은 사람이 정한 것이지 무슨 절대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식 제사의 법식을 마련한 『예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제사든지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한다. 자주 지내면 번잡해져 공경심이 없어진다. 하지만 제사를 너무 오랫동안 지내지 않아도 안 된다. 오랫동안 지내지 않으면 태만해져 잊어버리기 쉽다.” 이것이 곧 일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되 잊을만한 시점에 제삿날을 배치한 뜻이었다. 제사, 교감과 대화의 시간 조상 제사는 장남이 지내야 한다는 원칙도 특정 사상의 산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외손봉사나 윤회봉사가 역사 속의 한 시기에는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16세기를 무대로 한 이문건의 일기에는 “어머니의 기일이다. 제사는 누님 댁 차례다.(1545.1.5)”라고 하고, “어머니의 기일이라 당(堂)에서 혼자 제사를 지냈다.(1567.1.5)”고 한다. 또 그의 집안은 외조모의 기일도 친손과 외손이 돌아가며 지냈다. 외조모의 기일이다. 제사는 신온의 집에서 지내므로 아침 일찍 참석하러 갔다.(1537.3.25) 외조모의 기일이다. 이휘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에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갔다.(1545.3.25) 외조모의 기일이다. 내가 지낼 차례여서 혼자서 제사를 지냈다.(1555.3.25)
이문건은 장모의 기일도 꼬박꼬박 챙겼는데, 다른 집 차례일 때는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으로 임하고, 아내의 차례가 되자 자신이 직접 차려 지냈다. 또 “증조부의 기일이나 제사가 어느 곳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어 소식(素食)만 했다.(1546.1.29)”고 한다. 어느 해에는 아버지의 기일 제사를 지낸 후 다시 큰 누님과 큰 형님의 신위(神位)에 국수·떡·술을 올렸다. 아버지의 제삿날에 그 죽은 자녀들을 한 자리에 초대한 것일까.
외손봉사는 아들딸을 구별하지 않아 각각의 인격이 존중될 수 있고, 윤회봉사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제사의 임무를 형제자매가 나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주자가례에 의해 외손봉사와 윤회봉사는 금지되고, 봉사의 자격은 동종(同宗)의 적장자에게 주어졌다. 이것을 합리화할 논리가 만들어졌다. 하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의 뿌리만을 주었다. 하나의 사당에 서로 다른 두 출계 집단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며 그같이 부정확한 제물은 조상의 영(靈)도 좋아하지 않으리라.『예의류집』 신(神)은 겨레붙이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으므로 모든 제사는 동성(同姓)의 친속이 주재하도록 해야 합니다.『명종실록』
“조상은 이성(異姓)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비판한 김육(金堉)은 수천 개의 가지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예로 든다. 그는 “아들의 아들은 동성의 손자가 되고 같은 성을 가진 딸의 아들은 성이 다르더라도 역시 손자이다. 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어찌 다르겠는가?” 라고 묻는다. 외손봉사와 윤회봉사를 금지하자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다면 제사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지낼 것인가? 제사를 구성하는 형식은 시대마다 늘 논쟁거리였다. 형식이란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는 그릇이기에 늘 변할 수밖에 없다. 제사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한 형식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면 왜 제사를 지내는가? 율곡 이이의 「큰 형을 위한 제문」을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잔을 올려 작별을 고하니 정신이 아득하고 흩어지는 듯합니다. 집 지을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형님의 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조카들을 가르쳐 성취시켜 맹세코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형님이시여, 눈을 편안히 감으시고 외로운 처자 걱정일랑 조금이나마 놓으소서.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죽은 형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고, 형을 향해 자신을 다짐하는 것이다. 제사는 죽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매체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