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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권 38호](통권 188호)(2009년 10월 10일)
학문(學問)과 인간관계: 이퇴계, 이율곡 그리고 정다산
강 병 조
며칠 전 다산연구소에서 보내 온 글 한 편을 읽었다. 남인(南人)의 거두요 영남학파의 수장인 이퇴계(退溪, 1501-1570) 선생님과 서인(西人)의 지지를 받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두 이율곡(栗谷, 1536-1584) 선생님간의 이기(理氣) 논쟁이 벌어졌을 때, 남인에 속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1-1836) 선생님은 율곡 선생님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당파 싸움이 심하던 조선조 중기 남인인 다산이 반대파인 노론의 율곡을 학문적으로 지지한 것은, 얼핏 보면 간단한 행동 같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결코 간단하고 쉬운 행동 거취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다산이 율곡을 지지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이들 세 분의 생애와 사상을 찾아보았다.
조선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수용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퇴계와 이율곡이라는 두 산맥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理를 중시하는 주리론(主理論)이다. 한편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氣를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퇴계의 생애와 사상
1)퇴계의 생애
퇴계(退溪)는 호이고, 본명은 황(滉)이다. 이황이 자기 호(號)를 퇴계로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기 고향 토계(토계동 시내 이름) 동쪽 바위 옆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양진암이라 이름 붙이고 산 적이 있었다. 이 후 이황은 토계를 퇴계로 고치고 자기 호를 퇴계라고 사용하였다.
퇴계는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진성(眞城) 이씨 종택 태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보려던 뜻을 펴지도 못한 채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이 때 퇴계는 태어 난지 7개월이었다.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퇴계의 어머니는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 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하였다. 12살 때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고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품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 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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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위장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영주에 사는 매우 넉넉한 집안의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중종 22년, 1527년)에 경상도 향시의 진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생원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뒤이어 과거인 진사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또한 대과 복시에 응하여 두 번째 단계를 치던 10월 둘째 아들 '태'가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퇴계선생의 장자가 일찍 사망하고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자부는 친정이 9대 독자의 딸이었다. 선생은 아들을 잃은 슬픔 못지않게 그 자부의 청상과부를 슬퍼하였다. 그래서 친정으로 보내면서, "9대 독자의 딸로 우리 집에 시집와 절손됨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너의 절행을 알지만 다시 돌아오지 말고 친정 부모 명령에 따르도록 해라"하고 타일러 보냈다. 그리고 수십년 후, 선생이 단성 지역을 지나다가 한 양반 가정에 묶게 되었다. 주인이 저녁 식사를 아주 풍성하게 잘 차려 왔는데, 보니까 청장(淸醬)을 큰 그릇에 가득 담아 올려놓았다. 선생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인척관계를 물으니, 주인은 주부가 어느 집안의 딸이라고 일러주었다. 곧 이 집은 선생의 옛날 자부가 개가한 집이었고, 이 날 선생이 유숙한 것을 안 주부는 선생이 늘 좋아하던 청장을 만들어 올린 것이었다.
30세에 권질이라는 사람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퇴계는 34세(1534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37세(1537년) 승의랑이란 벼슬을 할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 후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명종즉위) 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으며, 다음 해 46세시 부인 권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된다.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년)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퇴계는 스스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퇴계는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4년 뒤 1574년에 도산서원이 창설되었고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2) 퇴계의 사상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한다.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 설명한다. 理와 氣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 理는 氣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氣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理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理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사상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라고 한다. 즉 理가 발하여 氣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氣가 발하여 理가 氣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르는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퇴계는 理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理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理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히 있는 것(有)이다...능히 음양, 오행, 만물,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氣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理와 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理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善)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 물질적 조건에서 유리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다.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천황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론적 학문으로 뒷받침 되었다.
2. 이율곡의 생애와 사상
1) 이율곡의 생애
율곡은 덕수(德水) 이(李)씨 집안의 14세손, 7남매 중 3남으로 1536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 165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이(珥)이고,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3세인 1548년(명종 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여 딸 하나를 생산하였으나 딸은 일찍 사망하였다. 둘째 부인 용인 이(李)씨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 경정(景鼎)을 44세의 나이에 두었다. 셋째 부인 해주 석담(石潭) 출신 김(金)씨와의 사이에 맏아들 경림(景臨)을 39세 나이에 두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미혼 시에 사망하여 후손이 없다. 딸이 한 명 생존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수(12세손)의 4명의 아들 모두 후손(14세손)이 없다. 율곡이 후손이 없는 것을 후대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다. "퇴계는 밤일을 할 때 본능적으로 재미있게 하여 후손이 번창 하였고, 율곡은 밤일 할 때도 너무 젊잖게 하여 후손이 없다."
율곡은 1558년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기자실기(箕子實記)》와《경연일기 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 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2) 이율곡의 사상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으로 들어가 그 기본 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 규범(規範: 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율곡 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의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리(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일본 (하기-고꾸라) 구경 - 2009.9.28.부터 닷새간
장 기 홍
(1) 명치유신 胎動의 땅
부산에서 출발하는 관부연락선의 종점인 시모노세키(下關)항은 일본 혼슈(本洲)의 서남단(端)이자 야마구찌(山口)현의 서남단(端)이다. 그렇게 야마구찌(山口)현은 한반도에 가까운 일본 땅인데 나는 거기 구경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야마구찌(山口)현은 그 전체가 하나의 오지이다.
이상경교수는 야마구찌(山口)현에 사는 친구에게 가까운 관광지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다. 가와무라 교수는 그 현의 동해(東海)측 촌읍(村邑)인 하기(萩)를 향해 차를 몰았다. 대략 말하면 야마구찌현은 옛날의 장주(長州)번(蕃)에 해당하는데 하기(萩)는 번주(藩主) 毛利氏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옛 지방 수도(首都)였다는 말이다. 교수는 쇼인(松陰)신사(神社)로 직행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모시는 신사이다.‘명치유신(明治維新) 태동의 땅’이라는 팻말이 있고 松下村塾(쇼카 손주쿠)라는 옛 서당도 남아 있었다.
조선조 末에 그랬듯이 일본의 막부(幕府, 쇼군 즉 대장군의 본영) 말기(‘幕末’이라 한다. 1850-60년대)의 청년들은 정치체재에 변화가 와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막부의 무사(武士)정권을 뒤엎고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절박한 기운이었다. 그것이 장차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연결되는데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그는 1853-4년 미국 페리(Perry) 함대가 일본의 문호개방을 요구해왔을 때 그 함대에 대항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신문명(新文明)을 배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유학을 위해 그 함대가 귀국할 때 밀항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여 자수했다. 당국은 그를 금고형에 처하되 무사였던 그의 아버지의 감시 하에 집에서 칩거하도록 가택연금의 판결을 내렸다. 쇼인신사 가까이에 吉田松陰幽囚(유수)라는 팻말이 붙은 조그마한 집이 그것이다.
그렇게 유폐된 20대 청년에게 학문을 배우겠다고 원근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松下村塾(쇼카 손주쿠)라는 우리나라의 옛 書堂 같은 데서 공부했다. 松陰은 병학(兵學)과 유학(儒學)을 강론하되 시문(詩文)을 배격하고 명리(名利)와 출세(出世)를 위한 학문이 아닌 수기치인(修己治人), 국가(國家)경세(經世)의 도를 가르쳤다. 쇼인은 그 후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29세에 옥사했으나 그의 문하생들은 장차 명치유신의 주역이 된다. 이또히로부미(이등박문), 다카스기 신사꾸(高杉晉作, 1839-1867) 등의 명단과 사진이 촌숙(村塾) 건물에 걸려 있다.
우리는 萩박물관과 성터도 구경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마침 이등박문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을 때 흘렸던 피가 흰색 내의에 대량의 혈흔으로 남아 있었다. 萩성터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성의 궁전은 1874년(명치 7년)에 파괴되고 없다. 봉건체제의 부활을 겁낸 이등박문 등은 모리(毛利)가(家)와 그들의 보물을 세도 나이카이(內海)에 면한 호후(防府)에 옮겼다. 호후(防府)에 가면 毛利氏庭園과 毛利박물관을 볼 수 있다.
요시다 쇼인 문하의 인사인 다카스기 신사꾸(高杉晉作, 1839-1867)는 장주번을 위해 기병대(奇兵隊)를 조직했다. 전에는 싸움은 무사들이 맡아 했으나 기병대는 지원자들로 구성되고 총기로 무장했다. 신사꾸는 28세에 장주번의 해군총독이 되었고 29세에 결핵으로 병사했다. 막부는 장주번을 정벌하려다 약화되어, 결국 명치유신이 쉬워졌고 천황이 복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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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09년 10월 모임
3木 모임 -- 2009년 10월 15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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