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이곳’에서의 ‘오늘’을 건너는 시의 방식들
박완호
최근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오징어 게임」, 「지옥」 등의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는 우리 사회현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오늘’ 속에 존재하는 다양하고도 구조적인 모순점을 진지하게 깨닫고 반성하도록 한다. 오랫동안 왜곡된 시선에 의해 굴절된 TV 드라마 화면 속 세상에 갇혀 있던 시청자들에게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 같은 작품에서 마주친 은유와 직설이 적당히 뒤섞인 강렬한 표현 방식은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사건임을 부정할 수 없다.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인간은 숙명적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의 가려진 본질을 밝혀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삶의 주체가 되기를 진작 포기한 존재라면 그럴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겠지만. 시인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곳’의 ‘오늘’이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모순들에 대해 큰 관심을 지니고, 자기 눈에 비친 현실의 문제를 독특한 어법의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려는 욕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각자가 지닌 ‘이곳’에서의 ‘오늘’을 건너는 방식을 읽어내는 일은 남다른 가치를 내포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파란 물감으로 점 하나 찍을 수 없어
노란색으로도 선 하나 그을 수 없어
붉은색으로도 무엇 하나 그리지 못해
무엇을 말해도 무엇이 되지 아니하고
무슨 일을 해도 무슨 일이 아니 되고
어떤 것도 무슨 의미가 아니 되어
열세 살의 사내아이가 골목에서 무릎이 깨져도
일곱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도
가로수 벚꽃의 봉우리가 소리 없이 터져도
구두수선 아저씨의 수선요령이 개선되지 않아도
세탁소 아줌마가 날마다 로또복권을 사도
음식물쓰레기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도
공원에서 할머니가 박카스를 들고 다녀도
텔레비전에서 철학자가 거품 물며 오늘을 외쳐도
절망하거나 다치지 아니하고
죽거나 소망하지도 아니하고
사랑하거나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고
- 조병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전문
조병완 시인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에서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띤 푸른 호랑이의 모습을 독특하게 담아낸 그의 미술 작품에서 엿볼 수 있었던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질을 다시금 마주치게 된다. 너무나도 많은 일이 벌어지고 날마다 되풀이되면서도 정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바뀌는 게 없는 ‘이곳’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시인은, 특유의 반어적 어조로 “무엇을 말해도 무엇이 되지 아니하고/ 무슨 일을 해도 무슨 일이 아니 되고/ 어떤 것도 무슨 의미가 아니 되어” 버리고 마는 부조리한 세계의 핵심을 단번에 짚어낸다. 누가 아프거나 불행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거나 말거나 아무도 “절망하거나 다치지 아니하고/ 죽거나 소망하지도 아니하고/ 사랑하거나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고”라는 절망 섞인, 그러면서도 풍자와 해학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자기가 속한 세계의 모순을 깨닫는 한편,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일어나면 좋은 일들은 도무지 생겨나지 않는 ‘이곳’에서의 ‘오늘’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막막한 날들이 반복되는 현실, 일상의 반복은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면서 내 삶의 원동력이다.”라는 시인의 말(산문)처럼, ‘이곳’에서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무엇으로도 달래지 못하는 원초적 갈증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는 에너지원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쪽 방은 카톡 저쪽 방은 까톡 단톡방은 까악톡
불길하게도 행복하게도 장소 불문 시도 때도 없이 까마귀 떼들 출몰한다지 빠르게 느리게 후미진 방들을 떠도는 우리들은 까마귀들 비행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늙어간다지 행방불명의 검은 테를 두른 그녀도 명을 못다 한 파리한 그도 까마귀 떼 울음 속에서 살아났다가 영정사진만 살짝 비추고 사라진다지
조문 문자에 국화꽃 이미지에 그가 묻혀 버렸다
단톡방에서 쉴 새 없이 조의를 표하는 까마귀들 안녕을 뭉개는 까마귀들 조문으로 밤새 퍼덕거리고 안녕은 안녕답게 액막이까지 전해준다지 사람 없는 쪽방에도 비보를 날리며 오래 잠긴 깃털이 어느 언저리쯤에서 까악 운다지 사람 노릇에 질린 안녕이 침묵을 물어뜯으면 단톡방 이마에 걸린 조등도 얼음처럼 죽어간다지
우리는 국화꽃 무더기에 운명한 그를 묻어버렸다
- 정미, 「톡톡, 까톡으로」 전문
언제부터인가 인간 사이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직접적으로 교감이나 소통을 나누는 대신 페이스북이나 카톡,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간접적인 소통을 나누는 방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현실 속에서 인간 사이의 정상적인 교류는 나아갈 길을 잃고, 우리는 이제 SNS 같은 매체에 의존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소통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가까운 사람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직접 찾아가 봉투를 건네며 축하와 위로의 뜻을 표현하는 대신 인터넷 뱅킹으로 부조금을 보내면서 문자나 카톡을 통해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정미 시인의 「톡톡, 까톡으로」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대신 ‘카톡’으로 조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풍경을 고스란히 펼쳐 보인다. 시인은 ‘카톡→까톡→까악톡’의 소리 변주를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까마귀가 지닌 이미지를 적절하게 끌어옴으로써, “국화꽃 무더기에 운명한 그”의 죽음과 “사람 노릇에 질린 안녕이 침묵을 물어뜯으면 단톡방 이마에 걸린 조등도 얼음처럼 죽어”가는 세상 속에 내포된 의미 맥락을 개성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다리를 걸어가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살던 비밀은
나와 함께 영원히 봉인되는 걸까
죽음과 함께 유효기간이 끝나는 걸까
유효기간이 끝난다는 것은
이제는 자유롭다는 걸까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봤다
죽음으로 인해 비밀이 같이 묻히면
그러면 좋을까 그러면 슬플까
달이 뜨는 시간이 되면
입구부터 폐쇄되는 다리 위를 걸었다
날마다 한 번씩 비밀을 닦았다는 거
비밀은 꿀처럼 유효기간도 없이 달았다는 거
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있는 곳은
금지된 생각을 하기 가장 적당한 곳
달이 미치도록 밝아오는 다리 위에서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거
- 이상은, 「금지된 장난」 전문
하루하루 살아가는 만큼 매 순간 죽어가는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인간은 누구나 남과 공유할 수 없는 무언가(비밀)를 지니고 살아간다. 삶을 하루하루 이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비밀이 그만큼 늘어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금지된 장난」(이상은)의 화자는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살던 비밀은/ 나와 함께 영원히 봉인되는 걸까’ 하고 되물어가며 ‘죽음과 함께 비밀의 유효기간 또한 끝나는 것인가”를 궁금해한다.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나’는 그것에 얽매인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서, 그런 그에게 비밀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로움을 안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꿀처럼 유효기간도 없이” 달기만 한 비밀을 날마다 한 번씩 닦아가며 ‘입구부터 폐쇄되는 다리 위’를 걷는 그는 “죽음으로 인해 비밀이 같이 묻히면/ 그러면 좋을까 그러면 슬플까”를 고민하느니 차라리 “달이 미치도록 밝아오는 다리 위에서/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금지구역’ 같은 ‘이곳’에서의 ‘오늘’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그만의 삶의 방식인 셈이다. 시에 나오는 표현처럼 “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있는 곳은/ 금지된 생각을 하기 가장 적당한 곳”일 테니까.
내 몸이 너를 기억하는 속도는 얼마일까?
비가 오면 바람으로 바람이 불면 비로
0.4651㎞/s 속도로 달리는 지구에서
그만
뛰어내리고 싶다
너의 목소리가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처럼 팽팽해진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이 공존하는 전화번호에서
삭제키를 누르다 잠시,
나는 돌을 맞고 싶다
간음한 마리아
오늘은
간신히 바람이 불고
- 나정숙, 「매듭」
누군가의 부음을 전해 들었을 때,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는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의 전화번호 목록 및 카카오톡 친구 이름에서 그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 되어 버렸다. 가끔은 미처 지우지 못한 지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고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런 방식으로 ‘이곳’을 떠나간 누군가와 완벽하게 결별하는 쪽을 택한다. 지니고 있던 목록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영영 지워지는 순간 ‘나’와 ‘그’ 사이를 잇고 있던 실제의 매듭은 사라져버리고 ‘그’는 오로지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나정숙 시인의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인 「매듭」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공존하는 전화번호에서/ 삭제키를 누르다 잠시,” 멈칫하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던 ‘매듭’이 풀려나가는 순간이 지니는 의미 맥락을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한다. 더는 ‘이곳’에서 마주칠 수 없게 된 ‘너’를 기억하는 내 몸의 속도는 “비가 오면 바람으로 바람이 불면 비로/ 0.4651㎞/s 속도로 달리는 지구”에서의 삶과 맞닿아 있을 터, 지구가 도는 속도를 따라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처럼 팽팽해”지는 ‘너’의 목소리는 내게는 그리움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밀려드는 것이다. “지구에서/ 그만/ 뛰어내리고 싶다”라는 목소리에는 화자가 겪는 그리움과 아픔이 역설적으로 깃들어 있다. ‘그만’이라는 두 글자의 시어를 한 행으로 처리함으로써, 시인은 ‘간신히 바람이 부는 오늘’ 같은 날 ‘간음한 마리아’처럼 돌을 맞고 싶은 ‘나’인 화자가 겪었을 아픔의 강도와 시간의 깊이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얼마나 부러뜨릴 듯이 바람이 불고 급강하하던
겨울 날씨였던가.
그래도 직립의 나무는 쓰러지지 않고
제 빛깔의 꽃을 피우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라 생각했다.
그런 어려움을 알기에 나무는
피는 꽃의 영광보다는 지는 꽃으로부터 위로받는다.
- 김왕노, 「목신의 오후」
누군가가 떠나든 죽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우리는 언제나처럼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를 이어가야만 한다. 김왕노 시인의 「목신의 오후」에 형상화된 “부러뜨릴 듯이 바람이 불고 급강하하던/ 겨울 날씨”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제 빛깔의 꽃”을 피우려는 ‘직립의 나무’는 가파르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어려움을 헤쳐가며 꿋꿋이 살아남아 어느 순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기어이 실현해내고야 마는 인간 존재를 상징한다. “피는 꽃의 영광보다는 지는 꽃으로부터 위로받는” 존재인 ‘직립의 나무’를 통해 시인은 부조리와 절망으로 가득한 ‘이곳’에서의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내고자 하는 정신의 깊이를 간결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전 지구인이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현상의 이면에는 기후 및 환경 문제를 포함한 수많은 지구의 위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초래한 장본인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이야 그럭저럭 견딜 만하겠지만 우리 후손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도 한없이 두려운 일이다.
시인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의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돌파구를 찾아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그대로 안주하고픈 욕망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쳐들겠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렵고도 안락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반복을 개선하는 방법’ ‘갈증을 즐기는 방법’(조병완)을 꿈꾸며 매 순간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을 찾아 시로 써 가는 가운데 삶을 즐겁게 꾸려나가려 애써야 하리라. 웃기지도 않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이곳에서 그만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툭하면 고개를 쳐들더라도 ‘제 빛깔의 꽃을 피우려는 나무’(김왕노)처럼 직립으로 버티고 서서 ‘금지구역’ 같은 ‘이곳’에서의 ‘오늘’을 살아내려는 절실함이야말로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