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사랑은 생명을 투자하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틀을 보면 조금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투자하면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을 내어놓음입니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열정은 또한 수난(passion)을 전제합니다.
열정이나 수난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무석 교수가 의무관이었을 때 본 자해하는 청년은 몸에 피를 내지 않으면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 계속 자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내는 것은 수난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내 피를 쏟을 목적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은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남자는 고아로 자라서 애인에게 배신 당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여자는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어머니에게 외면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내 피를 쏟을 수 없다면 스스로 피를 내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 없는 삶은 열정이 식은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위해 피를 흘리면 될까요? 돈과 쾌락과 명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게 다야?”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공갈젖꼭지처럼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이 오지 않고 결국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어차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곧 피를 쏟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목적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피 흘림, 아기를 기를 때의 피 흘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욕도 잃지 않고 투자한 만큼의 생명을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낳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투자는 더 많이 벌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무언가를 사랑할 때 하게 됩니다. 투자로 나의 피, 곧 생명을 바치게 되는데 그 피, 곧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상책입니다.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비용이 회수될 수 없는 곳에 투자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 회사는 망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거나 생명을 되돌려받을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투자하며 살아야 한다면 투자비용이 더 회수되는 것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에 투자해봅시다.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만 봐도 면역력이 증가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실험결과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삶은 이 세상에서부터
투자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계셔서 영원한 생명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지 않거나 공갈젖꼭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맙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투자한 만큼 이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올바로 투자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언젠가 반드시 화사한 봄날이!
참으로 혹독한 시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몰상식과 파렴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과 난감함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국격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언제나 이 큰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우리 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어서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경제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 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갖은 멍에를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받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 능력, 내 긍정적 측면, 내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나란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 업적, 내 위치, 내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게, 때로 한시적으로, 때로 평생 따라다니는 수많은 유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의 하느님이라며, 왜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실 것입니다.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다 큰 선으로, 결국 사랑으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축복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보다 큰 도약, 보다 큰 기쁨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
2023. 02. 23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살림이 되는
새 땅
새 하늘
열리기까지
누구는
누군가를
죽이고
누구는
누군가에게
죽임 당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아닌 세상에서
죽임으로써
더러운 목숨 이어가는
살아도 죽은 사람이
지우는 십자가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 내던지는
죽어도 산 사람이
지는 십자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