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Le Jardin de Monet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 - Lazare
지베르니의 건초더미La Meule De Foin A Giverny
A Pathway in Monets Garden
Poppies
Il Viale Del Gardino
Monet in His Garden
Nympheas
Waterlilies and Agapanthus
Madame Monet in her Garden at Giverny
점심식사Le Dejeuner
지베르니의 나룻배La Barque a Giverny
Andre Gagnon - Les Yeux Fermes
< 존재의 빛을 포착하라 >
‘사물’, 우리는 이 단어를 들을 때
얼핏 일정한 테두리를 지닌 고체를 떠올린다.
그러나 고체만이 사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의 개체야말로
‘사물’이라는 말에 가장 걸맞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분석적 이성에 의해 길들여진 사고다.
분석적 이성의 논리는 ‘고체의 논리’이다.
상식, 그리고 상식을 세련화한 분석적 이성은 고체를 모델로 한다.
왜인가? 인간에게 가장 명료하게 다가오는 분석은
공간적 분석이며(그래서 사람들은 지도를 그리고, 증권 시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리고, 건축물의 도안을 그린다), 명료한 공간적 분석을
허용하는 것은 고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체(액체, 기체)는 일정한 공간에 고정되지 않으며
때문에 공간적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액체와 기체를 다루는 것은 늘 고체의 도움을 받아서이다(그릇에 담긴 물).
상식은 사물들을 다루기를 원하며 그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들이기를 원한다.
상식의 세계에서 사물들은 곧 ‘물건들’이다.
고체의 논리에서 액체의 사유로
서구 담론사의 맥락에서 사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형상’(形相) 개념이 다듬어지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흘러가는 것, 순간적인 것은 가짜이고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인 것은 진짜이다.
본래 ‘physis’는 자라는 것, 생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지스가 인간이 만들어낸 범주들에 속박되고
분석(anslysis)이 사물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액체적인 것은 이성의 저편으로 쫓겨난다.
플라톤 이후 서구 학문의 기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체의 논리를 총체적으로 전복시키고자 했던 베르그송이
액체의 사유를 구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속이란 끊임없는 흐름이자, 그 흐름의 과정에서
차이들을 산출해내는 역동적 잠재성이다.
그리고 이 지속의 성격은 인간의 의식에서,
생명체의 기억에서, 우주의 진화에서 확인된다.
지속을 직관하는 것은 차이를 직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탁자가 ‘녹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그 탁자에 녹색이 아닌 부분도 많다.
우리는 하나의 종이가 ‘사각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종이는 사각형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둔한 지각과 그 둔한 지각에 기반한 일상 언어는
사물의 미세한 흐름, 운동, 떨림, 울림을 사상하고
평균화하고 양화(量化)한다.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세계를 새롭게 지각할 것을 말한다.
둔한 지각, 이론에 의해 이미 재단된 지각이 아니라
세계의 밝힘 아래에, 빛 아래에 설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세계가 더이상 주체의 편견이나 둔한 의식에 의해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환한 탈은폐의 빛 아래에 드러나는 경지이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이 존재의 빛을 사유하고 또 지각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거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문학, 예술에서의 혁명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프루스트의 문학에서 우리는 평균화되고 도식화된 기억의 저편에서
지극히 미세하고 지극히 섬세한 기억의 흐름이
흐르는 강물처럼 펼쳐지는 것을 본다.
드뷔시의 음악에서 우리는 일정한 화성과
음악적 도식에 사로잡혔던 소리들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그것은 단순한 주체의 ‘인상’이 아니라 세계와 주체의 새로운 만남,
존재의 새로운 얼굴의 드러남, 존재의 빛 아래에 섬이다.
무수한 인상들에 대한 성찰의 결과
모네의 그림이야말로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계의 원초적인 모습에
그 누구보다도 충실한 사람의 그림일 것이다.
모네에게는 어떤 이론도 필요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론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서구 화가들 중 모네만큼 자연을 사랑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그저 일정 순간에 인식 주체에 나타난
‘인상’을 스케치한 것은 아니다.
봄은 이미 생각을 전제한다.
사실 생각하지 않고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네의 그림은 단순한 인상의 포착이 아니라
보고 또 보는 행위 가운데에서 익어간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네는 화가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마음속에 이미 완성된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상주의 이해와는 다소 어긋나는 말이다.
결국 모네의 그림은 한순간의 인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상들에 대한 계속되는 성찰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유명한 수련 연작은 모네 그림의 특성을 한껏 드러낸다.
물의 묘사가 워낙 탁월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
그 그림에 비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물에 비친 버드나무 가지의 그림자는
실제 버드나무가 물에 비친 듯이 보인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떠가는 연꽃들은 자유분방한 터치로
그려졌음에도 사실적이다. 그러나 모네 그림의 사실성은
사물의 윤곽을 정밀하게 그리는 구래의 사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연꽃이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빛 아래에서 나타내는 형태들을
본질적인 측면들에서 포착하고 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설치한 일본식 정원에서 작업했으며,
자연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찰이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이 수련 연작이다.
모네의 그림은 빛의 운동성 속에서 빛나는 사물의 존재를 포착하고 있다.
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태양을 따라잡을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요즘 해가 어찌나 빨리 지는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네.”
빛의 운동성은 사물을 매끈한 윤곽선에서 해방시켜 떨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떨림은 시간 속에서 변해가며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지속한다.
그 떨림을 포착하는 것이 화가의 특권이다.
<에트르타 어선들의 출항>(1886)은 모네적 자연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원하게 구획된 그림은 바다, 하늘, 산, 모래사장 그리고 배들을 보여준다.
멀리 시선을 두면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이 나타난다.
그러나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 아득한 공간으로 여러 배가 떠나가고 있다.
배들 또한 자유로운 터치로 그려져 있으며, 바다 위를 떠간다기보다
차라리 아득한 저 너머 공간으로 흡수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산 역시 하늘 및 바다와 혼연일체되어 햇빛 아래에 빛나고 있다.
그림 전체가 비슷한 색들로 칠해져 있으면서도
사물들이 제 역할을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모네의 예술은 존재의 드러남 자체를,
존재의 빛 아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다.
모네의 그림에서 우리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본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 원장 elandamour@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