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르네상스는 왜 이탈리아에서 선행됐을까?
神 중심 중세 천년 저물고…인간 중심 사조 부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
르네상스 이끈 수많은 천재들
이탈리아 피렌체서 태어나
16세기 전반기 천재성 꽃피워
14세기 후반 시작된 새로운 변화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이탈리아 피렌체 전경
휴머니즘으로 돌아가다
서양 역사에서 르네상스란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프랑스말의 renaitre(재생하다)에서 유래했고, 영어로는 rebirth(재생 또는 부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되살아났다는 말인가? 중세 천 년 동안 신(神) 중심의 사조에 눌려 있던 인간 중심적인 사조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적해 보니 이러한 새로운 사조는 이미 서양의 고전 시대, 즉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꽃피운 적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로마의 문명이 1350~1550년 특히 이탈리아반도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사조는 중세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신 중심의 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당대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태도였다. 이들에 따르면, 그리스-로마시대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당대 사이에는 변화도 없고 단조로운, 무려 천 년에 걸친 어둠의 시대가 끼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였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기부터 뭔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 세기가 지난 15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제 분야 특히 예술 분야에서 그 꽃을 활짝 피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無)에서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었다. 그 뿌리를 캐보니 그리스-로마라는 고전 문명에 맞닿아 있고, 그 원천은 휴머니즘이라는 샘물이었다. 이처럼 르네상스는 그 이전 신 중심의 시대, 즉 중세와 구별되는 아주 새로운 시대라는 개념이 16세기 이래로 이어졌고, 이를 학문적으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학자가 바로 19세기 중엽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한 야콥 부르크하르트(1818~1897)였다. 그는 186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저술을 통해 근대의 시작으로서의 르네상스 개념을 확립했다. 그의 주장을 이어받은 연구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르네상스가 단지 학문과 문화의 측면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일명 ‘르네상스 정신’은 정치·경제·종교 등 당대의 전체 국면에 영향을 주어 변화시켰다는 해석까지 나아갔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중세 이래 축적된 지적 흐름에 영향받아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르네상스는 중세와는 단절적인,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맞닿아 있는 전혀 새로운 사조란 말인가? 20세기에 들어와 일부 역사가들이 이러한 기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중세 연구자들이 주류를 이룬 일명 연속론자들은 르네상스가 새로운 시대이기는 하지만, 중세 이래 축적된 지적 흐름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점을 드러냈다. 실제로 중세 전성기에 그리스-로마의 고전 학문은 죽어 있지 않았다. 예컨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로 간주했고, 단테는 로마 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심지어 르네상스의 시작은 12세기 카롤링거 궁정의 문예부흥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이러한 논쟁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연구자들은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1350~1550년 이탈리아에서 등장해 이후 16세기 전반기에 알프스 너머 중북부 유럽으로 확산한 사상·문학·예술 분야의 특정한 경향을 표현한 것이라는 선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연속론을 주장하는 중세사가들의 비판이 어찌 됐든 간에 사상·문학·예술의 측면에서 르네상스는 중세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중세의 지식인들도 고전 시대의 저술가들과 이들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이는 극히 한정된 저명한 인물들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에 비해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시대의 이삼류 지식인들과 이들의 작품에도 친숙하게 됐다. 한마디로 고전 지식에 관한 양적 측면에서 중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종교 측면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보티첼리의 그림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세에 비해 훨씬 이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무엇보다도 휴머니즘의 영향 아래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학·수사학·역사학·윤리학 등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중시됐다. 역으로 스콜라 철학의 핵심 과목으로 중세 지적 훈련의 중심을 이루어온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중세와 근대적 요소 공존하는 이행기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방으로 전파된 르네상스는 성서 원전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에라스뮈스를 선두로 북방 르네상스를 이끈 지식인들은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이교적 전통에서 영감을 얻는 대신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사회개혁의 모티브를 찾았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이후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에 불을 붙이는 데 이념적 불쏘시개를 제공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봇물 터진 듯한 르네상스의 지적 조류는 서양 근대화의 마중물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혼재성을 반영해 르네상스는 중세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이행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근대적인 요소가 점차 강화돼 급기야는 18세기에 대서양에 연한 국가들에서 혁명적인 사태로 분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왜 유럽의 중앙부가 아니라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를 고대·중세·근대 등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한다. 이러한 역사 삼분법은 15세기에 꽃을 피운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시작됐다. 르네상스를 서양의 근대를 연 분기점으로 보는 관점이 역사 삼분법에 담겨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미술가, 마키아벨리와 같은 저술가,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천문학자) 등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천재가 대부분 15세기 중반기에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도시인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실력을 쌓아서 16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들의 업적에 힘입어 인류 문명은 더욱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졌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이러한 거장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의 중북부 지역에서 배출됐을까? 이 글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