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이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인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문학」 창간호, 1930.3)
♣어휘풀이
-은결 : 은물결
♣작품해설
이 시는 영랑의 등단작이자 순수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펼쳐 보인 작품으로, 발표 당시의 제목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이다. (여기에서는 시집에 수록된 제목을 취하였다) 이 시는 남도 사투리가 부드럽게 순화되어 예술적 미를 형성하고 있으며, 생기가 감도는 가락은 짙은 향토색과 감미로운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또한 동일한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음악적 리듬을 부여하는 한편, 단순한 형식에서 오는 단조로움을 막아 주는 시적 효과를 내고 있으며, 특히 의미상 3음보 율격의 시행을 4음보 시 형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인의 내적 충동과 외적 절제라는 이중서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제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시인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동백 잎을 보는 순간, 은빛으로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볼 때와 같은 어떤 신비로움을 느낀 게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 영랑 시는 밖을 향해 시선이 열려 있는 외부 지향의 시가 아니라 ㅇ히부 세계의 객관적인 대상을 ‘나’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내면 지향의 특징을 갖는다. 그런 탓으로 그의 시는 구체적인 체험 내용을 직접적으로 진술하기보다는 그것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인상과 감흥을 드러내는 특성을 갖게 된다. 이 시도 역시 ‘내 마음’에 포착된 동백 잎의 인상과 감흥을 ‘나’ 안에서 즐기고 만족하는 내면 지향의 시로 영랑의 정신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시인이 동백 잎에서 발견한 황홀경은 객관적 실체가 아닌 안식과 평화의 세계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와의 갈등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정을 구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안식과 평화, ‘끝없는 강물’처럼 아름다운 그것은 다만 그의 ‘가슴엔 듯 눈엔 듯 핏줄엔 듯 /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에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일제 치하라는 현실 상황에서 영랑이 ‘끝없이’ 추구했던 안식과 평화는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내 마음’에서만 가능했으리라 짐작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자폐증 환자와도 같이 외부 세계로 통하는 모든 문을 안에서 잠가 걸고 자기 내면 속에 침잠하여 안도의 긴 한 숨을 내쉬며 폭압의 어두운 시대를 가슴 졸이며 견뎌내었던 것이다.
[작가소개]
김영랑(金永郞)
본명 : 김윤식(金允植)
1903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15년 강진보통학교 졸업
1917년 휘문의숙 입학
1919년 3.1운동 직후 6개월간 옥고
1920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 입학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진학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49년 공부처 출판국장
1950년 사망
시집 :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영랑시선』(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