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 토 (백)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영근 신부
복음; 마태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 의 것이다.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7 행복하여라, 자 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 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나뭇잎들 내내 달려와, 단풍이 되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 없어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단풍! 이토록 아름다운 변색! 그런데 사실 잎들은 가슴 속 이미 단풍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단풍을 본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도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는 일일 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죽음을 마주치게 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맞은 듯이 죽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반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당하기 전에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눈 감고 지낸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절대극명의 현실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 우리는 바로 이 현실 앞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죽음’은 참으로 하나의 진정한 만남일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분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하던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은 그분과 만나는 통로요, 그분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기>는 바로 이러한 만남의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내 살갗이 이처럼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5-27)
욥은 ‘죽음’에서 하느님을 뵙고 체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만남의 희망을 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수도규칙 4,47)
이 가을, 떨어지는 단풍 잎새 하나에서 희망을 봅니다. ‘만남’을 봅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있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으면서 그분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의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이익보다 손해 볼 줄을, 자신보다 타인을 존중할 줄을, 옳기보다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게 하소서!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홀로 고독할 줄을 알게 하고, 진정 당신이 주님 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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