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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적 가치’ 실현 위한 행위 탐구…인간과 정치에 새 가교를 놓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20세기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만큼 문제적인 사상가를 만나기 쉽지 않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아렌트 사상이 인간과 세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정치이론 및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세계를 ‘인간 관계망’으로 해석한 한나 아렌트는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정치 체제와 공적 영역을 복원시키려는 이론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개념인 ‘악의 평범성’은 문제적인 사상가로서의 아렌트의 특징을 적절히 보여준다.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행동이 대량 학살을 가져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의 근원임을 주장함으로써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어떤 이들은 아렌트를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라고 부른다. 여성 유태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유사하다. 하지만 룩셈부르크가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면 아렌트는 철학자의 삶을 살았다. 오히려 아렌트는 시몬 드 보부아르, 수잔 손택과 함께 전후를 대표하는 여성 이론가로 평가하는 게 온당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의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존 롤스, 위르겐 하버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유태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의 탄압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무국적자로 살다가 시민권을 얻어 활동한 아렌트는 서구 사회 안에선 세계 시민이었다. 어떤 사상가는 이론 못지않게 시대에 맞선 삶 자체가 우리에게 성찰과 위안을 안겨주는 경우가 있다. 아렌트는 그런 사상가다. 자기 책 제목의 한 구절처럼 ‘어두운 시대’를 살아온 아렌트는 시대의 어둠에 맞서 ‘세계 사랑(Amor Mundi)’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사상가였다.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재발견
아렌트의 대표 저작들로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195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손꼽힌다. 여기서 <인간의 조건>을 주목하는 까닭은 아렌트 정치사상의 출발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이루는 세 가지 활동을 구분한다. ‘노동’ ‘작업’ ‘행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행위다. 행위란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승인하고 소통을 나누며 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활동을 말한다. 이 행위의 역사적 원형을 그리스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아렌트가 강조한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다. 공적 영역은 자유로운 시민들이 폴리스 전체의 공공선을 위해 함께 토론하는 공간이며, 이러한 토론의 행위가 다름 아닌 정치 본래의 의미라는 것이다. 아렌트가 우려한 것은 근대 서구사회에서의 ‘공·사의 이분법’ 해체다.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노동은 다른 활동들을 압도하고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근대의 과정이 지구로부터 탈출하고 세계로부터 도피하려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 소외’를 가져왔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다.
아렌트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영-브륄에 따르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의 책 제목을 ‘세계 사랑’으로 붙이고 싶어 했다. 세계 사랑이란 인간의 존엄성 및 복수성,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실존 및 영혼에 대한 배려인 ‘자아 사랑’과 이데올로기 및 주관주의의 ‘세계 멸시’에 대응해 세계 사랑을 역설함으로써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과 정치의 복원이란 규범적 정치이론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려고 했다.
■아렌트와 현대 정치사상
아렌트 사상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이후 한층 높아졌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서구 신사회운동의 부상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 있었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이론가들은 공적 영역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을 재발견했고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을 재평가했다. 이후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부를 정도로 아렌트는 전후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돼 왔다.
아렌트 사상이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낡지 않은 이유는 인간 존재와 사회 공공성에 대한 심원한 통찰에 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평가다. 주트에 따르면, 아렌트 이론에는 내적 모순이 존재하고 개념적·역사적 설명이 빈곤하며 현실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 대안이 부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중함과 중용, 공적 담론의 회복을 포함하는 공화주의적 사유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화는 현대 정치이론의 새로운 출발로 삼을 수 있다는 게 주트의 결론이다.
아렌트 사상은 경제를 등한시하는 약점을 지닌다. 그러나 아렌트는 인간의 공적인 활동과 관조적 삶에 일차적 관심을 뒀고, 이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재발견 및 재구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아렌트는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기 어려운 사상가다. 그는 자유를 존중한 동시에 공공성을 중시했다. 삶에서든 사회에서든 그는 ‘철학 없는 정치’와 ‘정치 없는 철학’을 모두 경계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새로운 가교를 놓으려고 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말을 건네고 이해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 서론에 쓴 한 구절이다.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의 소통’이야말로 아렌트가 현대 정치사상에 선사한 통찰일 것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인간의 조건>은 이진우(포항공대 석좌교수)와 태정호에 의해 1996년 한길사에서 우리말로 나왔다. 이 번역본은 이진우의 ‘근본악과 세계애의 사상: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깊이 있는 해설을 싣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불러온 논쟁으로 인해 아렌트가 겪었던 고난의 삶은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에 의해 영화 <한나 아렌트>(2012)로 만들어졌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한나 아렌트와 한국사회 - 1990년대 이후 저작 속속 번역…탄생 100년 학술대회로 열풍 정점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한국 시민운동 경향과 친화성 높아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아렌트 저작들이 속속 번역됐다.
<인간의 조건>에 이어 <칸트 정치철학 강의> <정신의 삶 1> <혁명론> <과거와 미래 사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1·2> <정치의 약속>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공화국의 위기>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라헬 파른하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잇달아 나왔다.
2006년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학술대회 ‘한나 아렌트와 세계 사랑’은 아렌트 열풍의 한 정점을 이뤘다.
한나아렌트학회가 한국정치사상학회, 사회와철학연구회와 함께 개최한 이 심포지엄에는 아렌트 사상에 대한 대표적 연구자들인 정치학자 홍원표(외국어대 교수), 김비환(성균관대 교수), 서유경(경희사이버대 교수), 철학자 김선욱(숭실대 교수) 등이 참여해 주목할 만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아렌트에 대한 주요 연구들로는 김비환의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 이론: 우리 시대 소통과 정치 윤리>와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 한나 아렌트의 공화주의>, 홍원표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행위, 전통, 인물> 등을 들 수 있다.
홍원표의 <아렌트: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다>는 아렌트 사상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다. 저자는 10개의 질문을 던지고 이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전달한다.
홍원표는 아렌트에 대한 대표적인 전기인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 사랑을 위하여>를 우리말로 옮겨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아렌트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특별한 호소력은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한국 민주화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참여의 강조와 공공성에 대한 열망이라는 한국 시민운동의 경향은 아렌트 사상과 친화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참여민주주의와 공공성 구축이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인 한 아렌트 사상에 대한 높은 관심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