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명의 유래
大邱의 옛이름은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등으로 바뀌었다.
"불"과 "벌"은 우리말의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達(달)"의 뜻은 圓(원), 周(주)등 넓은 공간을 뜻하므로,
결국 達句火(달구화)와 大邱는 서로 같은 뜻이 된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年(경덕왕 16年) 주, 군, 현 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이다.
종래 여러 가지로 불리우던 벼슬 이름이나 지방 이름을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는데
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丘 자가 『邱』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英正(영정)시대부터이다.
1750年(英祖 26) 『丘』자를 다른 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자가 孔子(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영조는 이것을 신기를 좋아하는 경망한 풍조의 소산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구 사람들은 점차 達(달)자 대신 脚(각)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大邱로 나오기는 1779年(正祖 3)5月 부터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丘』와자가 『邱』가 혼용되다가
哲宗(철종)이후는 1850年(哲宗 원년) 공사간에
모두 大丘를 쓰지 않고 大邱로 쓰게 되었다.
八公山(팔공산)의 名稱(명칭)
八公山(팔공산)은신라시대에는 父岳(부악) 또는 公山(공산)이라 했다.
지명은 改定(개정)시에도전혀 다른 名稱(명칭)을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다.
계통적인 意義(의의)를가졌다. 父岳(부악)과 公山(공산)은 전혀 다른 것이다.
父字(부자)는 公字(공자)의 誤字(오자)로 보고자 한다.
公岳(공악)을 父岳(부악)이라 잘못 읽은것 같다.
母岳(모악)이 없는 바 아니나 父岳(부악)과 公山(공산)은 전혀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五岳(오악)의 中岳(중악)이었고---.
고리시대에 八公山(팔공산)의 이름은 의연히 公山(공산)이었다
조선 국초에 된 "신증등국여지승람"에
公山(공산)은 혹 八公山(팔공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는
기록이 史上(사상)에처음이다.
팔공산의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說(설)이 있다.
입시철이면 더욱 붐비는 팔공산 갓바위. 세월 따라 시주 물품도 변한다.
한때는 공양미가 대세였지만 지금은 국화화분이 정성을 대신하고 있다.
무심봉의 흰 구름, 제천단의 소낙비, 적석성의 보름달, 백리령의 하얀 눈,
금병장의 단풍, 부도암의 폭포, 약사봉의 새벽 별, 동화사의 저녁 종소리.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이 꼽은 ‘공산팔경(公山八景)'이다.
공산은 지금의 팔공산으로 대구 동구와
경산 영천 군위 칠곡에 두루 걸쳐 있는 큰 산이다.
갓바위, 수많은 기원과 간절함이 모인 곳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한 달여 앞둔 요즘은 팔공산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시기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갓바위’의 명성 때문이다.
4m 규모의 불상 머리에 갓 모양의 널돌(판석)을 얹은 모습이어서
갓바위라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다.
해발 850m 관봉 꼭대기의 자연석을 다듬은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좌대와 자연 광배 역할을 하는 바위는 모두 붙어 있는데 판석만 분리된 것으로 보아,
비바람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나중에 얹은 것으로 추정된다.
갓바위 부처는 둥글고 풍만한 체구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어
자비롭다기보다 근엄해 보인다.
더구나 산꼭대기에서 드넓은 하늘을 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상이어서 위엄이 넘친다.
<동 이름의 유래>
[효목동]
옛날, 임금님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펴보던 중 이 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곳의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버이는 자식을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 동네의 이름을 효목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산동]
비산동은 옛날에는 평야였다. 어느 봄날, 갓 시집 온 새댁이 달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은은한 소리와 함께 산이 날아오고 있었다.
놀랍고 기이하게 여긴 새댁이 "산이 날아온다!" 하고 외치자,
날아오던 산이 평지였던 이 곳에 내려앉아 산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날아오는 산' 이라 하여 동네 이름을 비산동 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성동]
옛날, 경상 감사가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꿈을 꾼 후 그곳에 가 보니,
큰 바위 일곱개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경상 감사는 이 바위에 아들 칠 형제의 이름을 새겨 복을 빌었더니,
아들들이 원하는 대로 잘 자라났다.
그래서 이 바위를 칠성바위라 불렀으며,
칠성바위의 이름을 따서 이 동네의 이름을 칠성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촌동]
만촌동은 본래의 이름은 '늦이'라 하였다고 한다.
'늦이'의 '늦'은 늦다(晩, 遲)라는 뜻이며
'이'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의 음차(音借)로 보아야 한다.
이곳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遲=訓借, 芿=音借)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와 같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와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達城)하씨(夏氏),
달성(達城)서씨(徐氏)등이 문호(門戶)를 차려놓고 강학(講學)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나머지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에는 등한시 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려온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만촌동의 본래의 마을은 지금의 청기와 주유소 뒷편 구릉지대로 마을 주변은
독무산(獨茂山)으로 둘러쌓여 인가(人家)가 만거(萬居)하기에 적지(適地)라 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곳 만촌동 183번지에 있는 독무재의 동수기에 의하면
숭정(崇禎)4년[중국 명나라 예종의 연호로 B.C 1631년에 해당]독무암누(獨茂岩樓)를
건립하고 이곳을 강학지소(講學之所)로 하여
인근 향도(鄕道)에서 래학자(來學者)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명동
이 명칭의 유래는 임진왜란 시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 의 장수 두사충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는 왜란이 끝난 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귀화했는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러나 수 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항상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였다.
이에 그는 땅을 모두 내어눟고 최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골이라 했다고 한다.
또는 대덕산 아래 제일 크고 맑은 동네라는 뜻에서 대명동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원래 대구부 상수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암동을 병합하여 대명동이라(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했다.
1918년에 일부는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대구에서 行政洞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1980년에 일부가 남산동에 편입되었고 1985년 이후 현재 1∼11동까지 있다.
이천동
옛날에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 마을을 끼고 도는 하천이 있었다.
그 하천을 중심으로 배나무가 많아 한자 "배나무 이"자와 "내천"을 합쳐
이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첫댓글 서울과 부산
대구까지의 지명
쫌이라도 배우고 갈분들을 많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