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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inal
한편, 피가 흐르는 팔뚝을 움켜쥐고 엎어질 듯 계단을 내려온 서연은 쏟아지는 눈물에 시야가 뭉그러졌다. 당장이라도 효진이가 자신의 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골목 끝으로 부옇게 번지는 빛이 너무나 아득하다. 늘 다녔던 이 골목이 이렇게도 길었던가. 조금이라도 꾸물대다가는 골목을 덮은 어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사람이 보인다. 이제 곧··· ' 골목을 들어선 실루엣이 느닷없이 그녀의 팔을 콱 붙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야 진정해!"
그늘과 빛이 나뉘는 골목 어귀에서 그녀를 잡아 세운 것은 명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명기에게 서연은 무슨 말이든 하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불과 몇 분 전, 집으로 돌아가던 명기는 골목에서 미친 듯이 뛰쳐나오던 은채를 맞닥뜨렸다.
별안간 튀어나온 그녀를 보고 놀란 것도 잠깐, 이곳저곳에 피칠을 한 그녀의 모습에 명기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채에게 아는 체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은채는 눈앞의 명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대로 쪽으로 빠르게 달아났다.
'쟤가 왜 저러지?'
어쩌면 은채도 효진이의 일을 알지 모른다. 항상 주빈과 함께였으니까. 그녀는 은채를 붙잡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불과 몇 걸음 더 걸었을까 은채가 빠져나온 골목에서 비명이 들렸다. 명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새로 오픈한 휴대폰 매장에서 흘러나오던 요란한 음악 소리를 착각한 것일까? 명기는 불쾌하게 가빠지는 심박을 느끼며 천천히 골목 안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야! 정신 차려. 왜 그래?"
명기가 서연의 양팔을 꽉 움켜쥐고 그녀를 흔들었다.
"효진이가...효진이가!"
"뭐 효진이? 효진이를 봤어?"
"저기 옥상에서 효진이가 병을 크흐흐흐흑"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봐. 어디?"
서연은 그녀의 팔을 세차게 뿌리치고 골목 밖으로 달아났다. 명기는 침을 꼴깍 삼키고 컴컴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흘러든 불쾌한 기운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낯설지 않은 이 느낌.
'알아. 할머니가 굿을 벌이기 전 그 느낌이다···'
명기는 낮게 신음하며 자신을 당기는 그 기운을 따라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컥커거걱 컥컥"
쓰러진 주빈을 타고 앉은 효진이 있는 힘을 다해 주빈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의식과 절명을 오가며 효진에게 짓눌린 주빈의 몸뚱이가 뻣뻣하게 뒤틀렸다. 처음에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변하는 것 같더니 안공으로 먹물을 콸콸 들이붓듯 시야는 삽시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온통 새까맣게 뒤바뀐 세상 속에 선혈처럼 붉은 효진의 두 눈만 허공에서 떠 있었다. 숨통이 틀어막혀 자신의 목에서 나는 꺽-꺽-소리 사이로 짐승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끈적한 무언가가 부릅뜬 눈과 콧잔등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숨을 쉴 수가 없는데도 훅 끼치는 피비린내에 식도로 토사물이 솟구쳐 올랐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나는 죽는다!!!'
주빈은 머리가 터지도록 외치고 또 외쳤다.
"효진아!"
명기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명기를 힐끗 보는가 싶더니 다시 주빈의 목을 가차 없이 눌렀다. 터져 나온 토사물이 효진의 얼굴에 튀었다가 끈적이는 피와 함께 다시 주빈의 얼굴로 떨어졌다.
달려들어 효진의 팔을 붙잡는 순간 명기는 꿈찔했다. 살아있는 사람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 효진의 몸은 말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게다가 주빈의 목을 짓누르는 팔은 콘크리트에 박힌 쇠파이프처럼 꿈쩍 하지 않았다.
주빈은 검은 눈동자를 상실한 채 깔딱깔딱 마지막 숨을 붙들고 있었다. 명기는 팔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냅다 몸을 날려 효진을 밀쳐냈다. 마침내 효진이 주빈 옆으로 쓰러졌고 명기도 효진을 덮고 넘어졌다. 몸을 일으킨 명기가 주빈에게 달려와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야! 임주빈. 정신 차려! 야! 정신 차려봐!"
"컥! 커컥! 콜록콜록"
급하게 들이켠 공기에 주빈이 격한 기침을 토하며 몸을 오그렸다.
'살았다!' 숨을 돌리기도 전 명기는 복부에 맹렬한 통증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거칠게 뒹굴었다. 어느새 일어난 효진은 명기를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한편이구나. 죽일 거야··· "
눈빛과 목소리는 효진의 아니,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위협 그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 명기는 말을 잃었다. 효진이 깨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극도의 두려움은 사슬이 되어 온몸을 옭아 좼다. 눈조차 마음대로 깜빡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했다.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장악한 공포가 기묘한 나른함으로 변하고 있다. 무릎이 휘청했다. 눈이 멋대로 끔벅거린다. 왜 이러지? 위태로운 상황을 앞에 두고 지독한 졸음에 취하듯 의식이 희미해진다. '정신을··· '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효진도,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빈도, 옥상의 을씨년스러운 풍경도 차츰 하얗게 바래간다. '툭' 무언가 끊기듯 명기는 의식을 놓았다.
다가오던 효진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명기를 죽일 듯 쏘아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눈으로 다른 감정이 스며든다. 적개심뿐이던 동공으로 번지는 공포감. 작은 얼룩처럼 시작된 공포에 적개심을 빠르게 삼투된다. 명기의 온몸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마치 강력한 전자기를 띈 물체라도 된 것처럼 주빈은 전신의 솜털이 명기를 향해 쏠리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명기의 발끝이 근소하게 지면 위로 떠올랐다. 효진이 명기를 향해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던졌다. 뾰족한 칼끝 같던 유리 조각은 명기의 몸에 닿기도 전에 '파삭' 고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효진의 눈이 공포로 바래가던 그때 명기가 눈을 번쩍 떴다. 푸르스름 빛을 발하는 홍채가 사라진 눈. 그것을 바라보던 효진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세상을 찢을듯한 비명이 효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무릎을 바닥에 세차게 찧고 미친 듯이 자신의 몸을 쥐어뜯었다.
"웅.왕. 명. 강. 괴. 동."
주빈도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명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뜻을 알 수 없는 음절은 공기를 둔중하게 흔들어 고막과 심장을 때렸다. 효진의 목으로 핏대가 꿈틀 솟더니 코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부글거리는 피거품을 토해내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몇 초가 지났을까. 죽은 듯 기척 없던 효진의 입이 왈칵 벌어지며 검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쓰러진 효진의 머리 위를 맴돌면서 낯선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형태를 이루었다.
"왜! 왜! 나만! 싫어!"
여자아이는 울부짖으며 달아나려 했지만, 뻗어 올린 명기의 손에 붙잡힌 듯 제자리에서 격하게 요동칠 뿐 날아오르지 못했다.
명기가 손바닥을 활짝 펴자 악령의 머리가 등을 향해 90도 팩 꺾이더니 그녀의 손바닥으로 조금씩 끌려갔다. 악령의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귀신의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검푸르고 선명하던 그녀의 형상은 명기에게 가까워질수록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처절하던 절규가 소리를 잃었다.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던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도 꽈배기처럼 비틀리며 형태를 잃었다. 처음처럼 뭉뚱여진 연기가 된 그녀가 명기의 손끝에 닿자 '퍽' 불꽃이 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기의 푸른 눈이 주빈을 향했다. 주빈은 명기의 아우라에 완벽하게 압도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명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그녀는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바닥으로 폭삭 고꾸라졌다.
모든 일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옥상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이따금 먼 곳으로 지나가는 트럭 소리와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자신이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던 당사자이자 목격자였지만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게 환각이었을까? 주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옷과 얼굴에 묻은 피와 토사물도, 죽은 듯 널브러진 효진과 명기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벗어나자.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이 지옥 같은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서둘렀지만 휘청거리는 다리는 그녀를 겨우 두세 걸음을 옮겨 명기 옆에 주저앉혔다.
명기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가늘게 신음하고 있었다. 주빈이 명기의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며···. 명기야. 정신 차려 얘."
홍채 없는 그 무시무시한 눈을 다시 보게 될까 봐 주빈은 손을 멈췄다. 명기가 눈을 떴다.
"임주빈?"
"···어. 너 괜찮아?"
명기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왜 여기 쓰러져있지?."
똥그랗게 뜬 명기의 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뭐야 너···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명기는 마치 없던 일을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누르며 인상을 썼다.
"아. 맞아! 효진이는?"
명기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쓰러진 효진에게 달려갔다. 주빈은 무서워 효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광기 어린 그녀를 다시 볼까 봐 무서웠고, 혹 그녀가 죽은 건 아닐까 두려웠다.
"효진아! 얘 피 좀 봐. 어떻게 해."
명기는 효진의 목으로 아직도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그녀를 흔들었다. 효진은 힘겹게 신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명기가 효진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젖은 옷처럼 늘어진 그녀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야!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와서 좀 도와."
명기가 애타게 주빈을 불렀다.
"어?··· 어."
주빈은 떨리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신이 왜 명기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혈을 먼저 해야 할 거 같아. 어떻게 하지?"
명기는 울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은 온통 쓰레기뿐 상처를 덮을 마땅한 천이 없었다. 명기는 급한 대로 자신의 교복 상의를 벗으려 했다.
"잠깐만."
주빈이 옥상 난간에 걸어둔 가방을 들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생리대를 꺼냈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
명기는 생리대 몇 개를 덧대어 피가 흐르는 효진의 환부에 고정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치마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고 효진의 겨드랑이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주저하던 주빈을 힐끗 쳐다보자 그녀도 재빨리 효진의 반대편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며 힘을 보탰다.
셋은 조심조심 철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효진은 정신이 드는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절망 혹은 체념과 닮은 묘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끝마친 평온함도 그 안에 있었다.
"효진아 조금만 참아. 119 불렀으니 금방 올 거야."
효진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힘겨운 고갯짓을 대신했다. 자신의 목에 붙어 있는 생리대를 본 그녀는 내리깔린 눈을 지그시 들어 주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라붙은 입을 열어 힘겹게 말했다.
"주빈아. 그때 정말··· 미안했어."
"······ "
주빈은 효진의 시선을 피해 앞을 바라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괴는가 싶더니 이내 주르륵 줄기를 이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밝은 골목 어귀까지 나왔을 때 구급차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몰골이 흉흉한 여고생 셋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효진이 구급차 안 침대에 눕자 양손으로 눈을 짓누르고 있던 주빈이 쭈뼛쭈뼛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효진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효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구급차의 문이 닫히기 전 주빈은 효진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구급 대원의 끈질긴 설득에도 명기는 괜찮다는 말을 강조하며 자리를 피했다. 초록의 경광등은 차츰 멀어지며 주홍빛 상가 불빛들과 어울려 명멸하다가 사라졌다. 둘은 한적한 길까지 말없이 함께 걸었다.
"이상했지?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명기가 멈춰 서서 주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빈이 끄덕이고 자신이 본 것을 말하려고 하자 명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한숨을 쉬었다.
명기는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주빈은 새삼 명기가 다르게 보였다. 한낱 촌뜨기에 불과하던 그녀가 이제 무섭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며, 무엇보다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부탁할게. 앞으로는 효진이 괴롭히지 말아줘."
"······"
주빈은 대답 없이 한동안 땅바닥을 내려보다가 다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년. 그때 그러지만 않았더라도 우린···."
주빈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효진 그리고 주빈 (Epilogue)
주빈은 효진의 얼굴이, 그녀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정수리가 뜨겁도록 화가 치밀던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의 눈은 슬퍼 보였다.
'병신 같은 년···'
거듭된 화풀이는 화를 풀어주기는커녕 증오심만 키웠을 뿐이다. 이제 자신은 친구가 스스로를 목숨을 던질 만큼 잔혹한 짓을 스스럼없이 생각하고, 그것을 낄낄거리며 조롱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역시 효진의 탓인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거울 속의 주빈은 고개를 저었다.
효진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를 2학년 때였다.
명기처럼 시골에서 전학을 왔던 효진은 같은 반 급우들에 비해 어눌하고 소심했다. 엄마 없이 자란 티를 내듯 옷차림도 늘 꾀죄죄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아이에게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주빈이가 독점하고 싶었던 특별한 순수함이 있었다.
어른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던, 온통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했던 세상을 아름답게 보여주던 아이 효진이. 그녀가 나고 자랐던 시골은 어떤 곳이었을까. 어떤 곳이기에 그녀는 그토록 순수하고 선량하게 세상의 때를 피할 수 있었을까. 효진은 풋풋하고 따뜻한 동심의 세계 그 경계에 차가운 현실로 끌려가는 자신을 늘 붙들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인력에 끌려갔지만, 적어도 그녀와 함께하는 현실 세계는 다른 또래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둘 다 어린 나이였고, 우정의 의미조차 모르던 때였지만, 주빈과 효진은 영혼의 친구가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 다짐은 4학년 2학기에 이르러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4학년이 되어 주빈은 생애 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주빈은 항상 관심을 받았지, 관심을 줘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주빈의 가슴이 콩닥거릴 만큼 승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탁월하게 빛이 나는 아이였다.
주빈이 승하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승하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승하의 태도가 주빈에게 그런 갈증을 유발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주빈을 볼 때마다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고 한결같이 상냥했다.
하지만 그의 친절은 오직 그녀만을 향하지 않았다. 승하는 주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상냥했다. 모든 면에서 뒤처진다고 믿었던 효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하의 그런 태도가 주빈의 자존심을 건드렸던가. 비밀을 없었던 효진이였지만, 승하를 향한 자신의 마음만큼은 효진에게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자신과 효진이가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고백을 먼저 한 것은 효 진이었다. 효진은 주빈에게 얼굴을 붉히며 승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주빈은 불쾌했다.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미소짓던 효진의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주빈은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했고 초경이 빨랐다. 생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로 기억한다. 그날 주빈은 불편한 안색으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양이 많은지 생리혈이 밖으로 샐까 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때 효진이가 주빈을 보고 활짝 웃는 얼굴로 반갑게 다가왔다. 하지만 주빈은 신경이 온통 아래에 쏠려 효진을 반갑게 맞을 여유가 없었다. 주빈은 웃는 둥 마는 둥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팬티에 피가 묻진 않았지만 아슬아슬했다. 주빈은 한숨을 쉬며 흥건해진 생리대를 꼭꼭 말았다. 변기에 물을 내리고 꽁꽁 뭉친 생리대를 버리려고 휴지통을 찾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화장실 안에 휴지통이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걸 어째···.'
주빈이 뒤처리를 놓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빈아. 나 효진이. 너 괜찮아?"
"어? 어···. 괜찮아."
"너 아픈 것 같아 보여서 그래. 정말 괜찮은 거야?"
"...... "
아직 꼬맹이인 효진은 생리가 뭔지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도 아직은 생소한 경험을 효진이 아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반에서 자신만 겪고 있을 이 일이 그녀에겐 이유 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문 좀 열어봐. 너 정말 괜찮아?"
효진이 문을 두드리는 강도가 커지고, 아이들이 문 앞으로 몰려드는 소리도 들렸다.
'아. 씨···. 저 바보가..'
주빈은 뭉친 생리대를 변기 뒤쪽 구석에 안 보이도록 밀어 넣고 문을 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던 효진의, 그리고 무슨 일인가 화장실 안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거북했다.
"괜찮다는데 왜 그래!"
주빈은 효진에게 발칵 화를 내고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을 나왔다.
다음은 음악 시간이라 아이들이 음악실로 이동하기 위해 복도로 몰려나왔다. 승하와 남자합창부 멤버들이 주빈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주빈아. 이번 학예 발표회 때 합창을 할 건데 너 우리랑 같이 안 할래?"
"승하랑 듀엣 부분을 할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하잖아."
"주빈아. 같이 하자."
승하가 눈부시게 웃으며 주빈에게 말했다.
"아.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얼굴이 붉어졌던가. 주빈은 새침하게 표정을 바꾸면서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했다. 승하와 듀엣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네가 해주면 우리야 완전 땡큐지"
아이들은 주빈이 승낙하자 마치 학예회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들떠 기뻐했다.
그때 남자애들을 제치고 불쑥 효진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들은 효진이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으아악! 저게 뭐야?"
"주빈아! 너 왜 그래? 어디 다친 거야?"
효진은 흥분한 얼굴로 풀어헤친 생리대를 흔들며 소리쳤다.
"너···.너···.너. 어떻게···. 너"
주빈은 그때 처음으로 일그러진 승하의 얼굴을 보았다. 두세 발짝 물러서서 저희끼리 킥킥거리고 수군대던 남자애들의 면면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무슨 말을 들었을까 승하의 잔인하게 비틀린 웃음.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알았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던 효진의 얼굴. 웃음이었을까? 빈정거림이었을까? 적어도 그녀에겐 승하 앞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으로 보였다.
거기까지다. 그 이후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그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칼로 싹 도려낸 것처럼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며칠을 결석하고 학교에 다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면, 그날 이후 자신의 별명이 '고추장'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효진의 얼굴을 보면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는 것뿐이다.
1부 귀신들린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