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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태조 왕건의 가족들
왕건은 신혜왕후 유(柳)씨를 비롯하여 총 2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그들에게서 25남 9녀를
얻었다. 29명의 부인들 중에서 제2비 장화왕후 오씨가 1남(혜종),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劉)가
정종과 광종을 비롯한 5남2녀,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가 1남1녀,제5비 신성왕후 김씨가 1남,제
6비 정덕왕후 유(柳)가 4남 3녀,헌목대부인 평씨가 1남,정목부인 왕씨 1녀,동양원부인 유(庾)
씨가 2남,숙목부인이 1남,천안부원부인 임씨가 2남,흥복원부인 홍씨가 1남 1녀,소광주원부인
왕씨가 1남,성무부인 박씨가 4남 1녀,의성부원부인 홍씨가 1남을 낳았다. 이외에 정비 신혜왕
후 유씨를 비롯하여 나머지 12명의 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신혜왕후 유(柳)씨(생몰년 미상)
태조의 본부인 유씨는 경기도 정주(개풍)에서 태어났으며,삼중대광 유천궁의 딸이다.유천궁은
경기 북부지역의 큰 부자였는데,주변 사람들은 그의 집안을 일컬어 ‘어른댁(長者家)’이라고 불
렀다고 한다.
태조가 그녀를 만난 시기는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군대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정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 휘하에 들어간 것이 896년이고,왕건의 나이는 스무 살
이었으므로 장수로 활약할 만큼 성장한 때였다.하지만 유천궁이 경기지역의 유력가인 점을 고
려한다면 아직 초적의 무리로 인식되고 있던 궁예 휘하의 장수에게 딸을 내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따라서 왕건이 유씨를 만난 시기는 궁예가 정식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901년 전후가 될
것이다.
이때 유씨의 나이는 당시의 결혼 적령기인 열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이렇게 계산해 볼
때.유씨는 왕건보다 다섯에서 일곱 살 정도 아래였을 것이므로 그녀는 882년에서 884년 사이
에 태어났을 듯싶다.
<고려사>는 왕건이 그녀를 버드나무 아래서 만났다고 되어 있다.군대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다가 말을 쉬게 하느라고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시냇가에 서 있는 유씨를 발견하
고 말을 걸었다.그녀에게 말을 건넨 왕건은 그녀의 덕스러운 얼굴에 반해 유천궁의 집으로 갔
다.하지만 왕건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개천가에 서 있는 유씨를 발견했다는 말은 꾸
며냈을 가능성이 높다.당시의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따르면 물근처에서 여자를 만나는 것은
다산을 상징하고,또한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치부했다.따라서 왕건와 유씨의 이야기도 이런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끼어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유천궁은 경기지역의 대부호였다.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뛰어난 장수를 사위
로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왕건 역시 경기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천궁의 재력
이 필요했을 것이다.따라서 왕건이 유천궁의 사위가 된 것은 <고려사>의 이야기처럼 우연히
이뤄진 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왕건은 그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떠났다.왕건이 전장으로
떠난 뒤 소식이 없자 유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그러다가 오래 뒤에 왕건이 이 사
실을 알고 그녀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유씨는 당찬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궁예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발하여 홍유,배현경,신숭겸,복
지겸 등이 대사를 도모하자고 찾아왔을 때,왕건은 주저하였다.이때 유씨는 밖에서 엿듣고 있
다가 왕건을 독려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유씨의 고려 개국 공로에 대해서는 934년에 5대10국시대의 하나인 후당의 명종이 태복경,
왕경 등을 보내 그녀를 ‘하동군부인’에 봉하는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글은 ‘국사 대책을
좋은 계책으로 보좌했으며,부인으로서 총애와 우대를 받았고’고 그녀를 칭찬하며 ‘일반적 관례
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죽은 뒤 왕건의 묘 현릉에 합장되었다.그녀의 사망연대는 기록
되어 있지 않다.
장화왕후 오씨(생몰년 미상)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목포 사람으로 부친은 오다련군이며 조부는 오부돈이다.대대로 이지
역에서의 향호이다. 나주오씨의 시조는 오언(吳偃)인데,그의 선대는 신라 지증왕 원년 서기500
년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오첨(吳詹)이라고 전해진다.<고려사는 그녀를 미미한 가문 출
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오다련(多憐)이라는 이
름에서 보듯이 그는 많이 불쌍해 보였다고 한다.왜냐하면 후백제가 나주지역에서 많은 식량과
소금.그리고 물고기 해산물을 공급하도록 압박하니,힘들어 했다.그래서 항상 근심.걱정을 달고
살아서 불쌍해 보였다. 다련군(多憐君)이라는 이름은 왕건이 위로차 붙여준 이름이다.
왕건이 오씨를 만난 때는 910년 전후한 무렵이다.이는 혜종이 912년 태생이라는 점에서 유
추할 수 있다.이때 오씨의 나이를 당시 결혼 적령기인 17세 정도라고 추측해 보면,그녀의 출
생연도는 대략 893년에서 895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왕건과 오씨의 만남을 <고려사>는 다소 신비화하고 있다.해상세력인 왕건이 뱃길로 나주로
진주하여 시냇가를 바라보니,오색구름이 떠있었고,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급히 말을 달려
다가가니,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목이 말라 물을 청하니,표주박에 떠온 물위에 버드나무
잎사귀를 띄워서 준 바,왜 그러냐고 하니,물을 급히 마시다보면,체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하
며,그래서 왕건은 참 지혜로운 처자다 라고 감동하여,오씨의 집으로 가서 다련군을 만나게 되
었다고 한다.
오씨의 신분이 미미한 탓에 혜종은 왕건의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뻔했
다.그녀는 청주 호족 유긍달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세자 자리를 놓고 갈등을 벌였으나,청주출
신 신명왕후 소생 태자 태가 요절하였으므로 갈등은 해소되고 화해하게 된다.
왕건은 장남 ‘무’를 세자로 삼고 싶었지만 오씨의 신분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이를 실행
하지 못했다. 이때 대광(문무 최고위직)을 맡고 있던 박술희의 도움으로 자신의 뜻대로 장남을
세자로 세우게 된다.
오씨는 혜종 이외에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생몰년 미상)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충주사람으로 내사령(왕의 정책결정에 참여한 최고위직) 유긍달의 딸
이다.그녀는 태자 태,정종,광종,문원대왕 정,증통국사 등의 다섯 아들과 낙랑과 흥방 두 공주
를 낳았다.
유씨는 다른 어떤 왕후보다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그녀 소생 중에 두 명이 왕이 되었으나,
<고려사>는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고 있다.또 유씨 소생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
막 왕 김부(제56대 경순왕)와 혼인하여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데,많은 역할을 한다.
왕건이 유씨와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분명하지는 않지만 태자 태의 출생
연도가 정종과 광종이 두 살 터울임을 감안할 때,920년 경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유
씨는 900년을 전후하여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며,왕건이 왕이 된 이후에 처음 맞이한 왕비였
던 만큼 당시의 세력 판도와 관련된 정략결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건의 후비 중에 충주 출신은 그녀 하나뿐이었는데,이것은 곧 그녀의 아버지 유긍달이 충
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녀의 사망연도는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다만,그녀 소생 광종이 954년 봄에 숭
선사를 창건하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정왕후 황보씨(?-983)
신정왕후 황보씨는 황주 사람으로 삼중대광(정1품 문관의 품계) 황보제공의 딸이다.그녀 소
생으로는 성종의 아버지 대종 왕욱(王旭)과 광종의 비 대목왕후가 있다.
그녀가 제4비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신명왕후보다는 늦게 결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그녀 역시 신명왕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건이 호족세력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취한 정
략결혼의 대상이었을 것이다.따라서 고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 920년경에 결혼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황보씨는 태조가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으며,사망 당시의 나이는 여든 살 가량이었다.며느
리 선의왕후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성종을 비롯한 손자들에 대해 많은 애정을 쏟았다.효덕태자
와 성종,경장태자 헌애왕후 헌정왕후 모두를 그녀가 직접 양육하였다.성종조에 남긴 조문에
따르면 그녀는 덕이 많고,성격이 후덕했으며,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
다고 한다.그녀의 능은 수릉으로 기록되어 있지만,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다만 개성근
처일 것으로 추측된다.
신성왕후 김씨(생몰년 미상)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김씨가 왕건의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 935년 직후이므로 936년 초가 될 것이다.
935년 11월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
신을 보냈다.고려 사신은 경순왕에게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혼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
고,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김씨 소생으로는 안종이 있는데,그는 제5대 왕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여
제8대 왕 현종을 낳았다.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정덕왕후 유(柳)씨 (생몰년 미상)
정덕왕후 유씨는 경기도 개풍(옛이름 정주 승천부)출신이며,시중(중서문하성의 장관 종1품)
유덕영의 딸이다.그녀는 제6비였지만,결혼은 제5비 신성왕후 김씨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 소생 선의왕후가 신정왕후 소생 대종 욱(旭)과 결혼하고,문혜왕후가 제3비 신명왕후 유씨
소생 문원대왕(정종,광종 동생)과 결혼한 것으로 봐서 그녀의 결혼 시기는 신정왕후 황보씨와
비슷한 시기인 920년경일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의 출생연대는 신정왕후(황보씨)와 비
슷한 시기인 903년쯤일 것이다.
그녀 소생으로는 왕위군,인애군,원장태자,조이군 등의 네 왕자와 문혜왕후(문원대왕비),선의
왕후(대종지)등이 있었다.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대종 욱(旭)(?-969)
대종 왕욱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이며,제6대 왕 성종의 아버지이다.그의 출생연대는 전하
지 않으나,광종20년(969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욱은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행 선의왕후와 결혼했으며,슬하에 효덕태자,성종,경장
태자,헌애왕후(경종3비),헌정왕후(경종4비) 등을 두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태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대종이라고 하고,능호를 태릉이라 하여,
대묘에 합사하였다.
안종 욱(郁)(?-997)
안종 왕욱은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며,제8대왕 현종의 아버지이다.981년에 경종이 죽자,그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가 사가로 나와 거처하였는데,왕욱은 그녀와 정을 통하여 임신케 했다.
이 일이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경남 사천)으로 귀양보냈으며,그가 귀양 가던 날에 헌
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죽었다.
성종은 헌정왕후가 죽은 후 왕욱의 아이를 보모에게 맡겼는데,아이가 두 살이 되자 아버지
를 찾으므로 왕욱에게 보냈다.왕욱은 귀양지에서 아이를 기르다가 죽음이 임박해오자 아들에
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동네 어귀에 마을을 지키는 수호
신을 모신 장소)남쪽 귀룡동에 매장하되,시체는 엎어 묻어달라.”유언을 남기고 성종15년(997
년)에 세상을 떴다.그리고 그의 아들 현종이 1010년에 왕위에 오르자,효목대왕에 추존되고,묘
호(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를 안종이라 했다.
현종은 1018년에 그의 능을 건릉에 옮겼으며,1028년에 능호를 무릉으로 개칭했다.
첫댓글 대단한 왕건 입니다
또 더 대단한 추일슬풍님입니다
고려 왕족의 계보를 이렇게
세밀하게 본적이 없네요
이해하려 읽다보니 내머리에
쥐가 내릴려합니다 .ㅎ
선견지명이 무언지를 알려주기도
하네요 자신의 시체를 엎어서
묻으라니 참 대단한 역사입니다.
물론 부모의 마음이 어떤건지
짐작 되기도 합니다 .
아ㅡㅡㅡㅡ추일슬풍 님
대단하셔요
어려워요 ㅡㅡㅡㅡㅡ단어들도 하나 하나
배우는 자세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리 세세하게 역사를 꿰고 계시다니~
저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공부하고 갑니다 ^^
별 말씀들을 다 하십니다.
저는 단지 원문에서 베껴 적고,다소 부연해서
적어 넣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찌 됐던 저의 미미한 게시글에 관심 보여준 데
대하여 심심히 사의합니다.
다만,조회수 50미만이면 언제든지 그만 두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