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땅거미가 지는 시골 들녘 나지막한 초가집 지붕 위로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풍경만큼 평화롭고 정겨운 정취를 보는 것은 드물 것이다. 하루의 힘든 일을 끝낸 가족이 저녁상에 둘러 모여 앉아 식사를 즐기며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문득 길가는 나그네나 여행자들은 황급히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지친 몸을 쉬게 하려 할 것이다.
이런 감정은 오래전,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 여행 중에 자주 느낀 검소한 여행자(budget traveler)의 경험이다. 해가 떨어지면 숙소를 찾아야 한다. 다행한 것은 산중이나 숲속에서도 가스트하우스(Gast Haus, Guest House)나 B&B(Bed & Breakfast)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노르웨이 같은 곳에는 휘테(Hytter, 통나무집)나 농가(Kvaale, Farm House)에서 묵을 수 있다. 이들 숙소는 호텔과 다름없이 깨끗하여 하룻밤을 보내기에 쾌적하다.
어느 부활절 휴일에 아무런 예약 없이 네덜란드에 갔다가 호텔 방을 구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할 수 없이 길옆 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는데, 호텔에서 친구들과 부활절 파티를 끝내고 나오는 나이 드신 분이, 불쌍히 여겨서인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여 뜻하지 않은 민박을 하게 되었다. 그일 이후 날이 어두워지면 선뜻 외출하기가 꺼려졌다.
저녁이면 인간은 머리 둘, 쉴 곳이 필요하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를 것이라고 하였으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만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땅의 많은 집 없는 길 위의 노숙자들이나, 난민들, 그리고 나라 없는 민족들이 겪는 고통은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않을까? 아마 여기서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자신을 따르려면 인간적인 편안함과 쾌적함을 잊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거처의 문제는 인간뿐 아니라 땅 위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물에는 생물을 번성하게, 땅 위 하늘의 궁창(穹蒼)에는 새가 날도록 하시고,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에는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씌어있다. 인간에게 의식주(衣食住)가 필요하듯이 모든 바다생물과 새와 짐승에게도 의식주가 요구되나, 창조주께서는 먼저 먹을거리(食)를 마련해주셨다. 아마 옷(衣)은 이들의 몸 자체로 조절하도록 하신 것 같고, 거처(住)는 스스로 편리한 곳을 선택할 재량권을 주신 것 같다.
어느 생태학자에 의하면 인류는 25만 종의 식물과 3만 5천 종에 달하는 포유류와 조류, 어류와 양서류, 500만 종이 넘는 균류, 3000 만 종이 넘는 곤충과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곤충의 숫자는 70억 인구 한 사람당 2억 마리가 넘게 돌아갈 것이라고 하니, 이들 모든 생물과 인간이 같은 지구에서 함께 쾌적한 생활을 하기가 무척 좁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령 창조주께서 모든 새와 짐승에게 거처할 재량권을 주시더라도, 이들 스스로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을 차지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여의천 개울에 날아드는 철새인, 청둥오리 무리를 즐겁게 보며 하게 되었다. 과연 저들은 저녁이면 아늑한 곳에서 둥지를 틀고 쉴 수 있을까. 더욱이 산란의 계절이 오고 따뜻한 봄날이 계속되자,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무리들을 거느리고 개울 물살을 가르며 먹이를 찾아 분주히 오가는 어미 오리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저리 많은 새끼 오리를 데리고 밤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보낼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늦은 저녁 여의천을 따라 산책했을 때 놀랍게도 어미 오리는 개울 안쪽의 풀숲이 있는 작은 섬으로 올라가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열 마리가 넘는 새끼 오리들이 하나둘씩 모두 어미 날개 품 안으로 들어가자, 어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 모두를 품는 것이 신비로웠다. 어미 오리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어려움을 몸으로 막아내었다. 마치 가난했던 시절 온 식구가 이불 하나로 긴긴 겨울밤을 보냈던 우리의 시골 풍경이 떠올랐다.
새들의 모성애 본능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성경 기자들은 독수리가 새끼를,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선언하였다. 품는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다. 큰 뜻을, 거품을, 의문을, 칼을, 앙심을, 음욕을 품을 수도 있고, 품속이나 가슴에 대어 안고 있는 모습, 마음속에 가지기,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추기도 있다.
여기서 품는다는 것은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음같이 너를 품으려 한 적이 몇 번이더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품을 대상을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새의 깃과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 도구와 방법을 뜻한다.
시편 기자는,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노래하였다.
어미 오리가 새끼를 품는 모습에서 어머니가 연상되었다. 오늘은 문득 어머님이 그립다. 항상 인자한 미소로 따듯하게 감싸주시던 모습이 보고 싶다. 고향 선산 양지바른 곳에 아버님과 함께 누워계시면서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실까, 아니면 아직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실까.
내일은 어머니께서 이 땅에 마지막 사신 날을 추모하는 기일(忌日)이고, 또한 어버이 주일이라서 더욱 어머니의 외로운 시간에 함께하지 못한 회한이 부끄러울 뿐이다. 70이 넘어도 어머니란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가슴 한쪽이 두근거리며 코끝이 찡하다는 친구의 말에 공감한다. 그가 보내준 〈그냥〉이라는 동시는 매우 짧고 함축적인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감정표현이다.
’그냥/문삼석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그냥...‘
그냥이란 동시는 엄마 등에 업힌 아이와 엄마가 서로 주고받는 소박한 고백의 말이다.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다. 단지 엄마이고 자식인 천륜지정(天倫之情)이기에 좋은 것이다. 그냥이란 말은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 아무 뜻이나 조건 없이, 그대로 줄곧,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 이유 없이‘를 뜻한다. 부모님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바로 그러하다. 그리하여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짐승이나 새도 하룻밤 거처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 될 것인가. 우리는 그곳에 가기를 그냥 사모하고 그렇게 살면 될 것이다. 새끼 무리를 품는 어미 오리의 날개에서 어머니와 창조주의 사랑과 은혜의 모습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