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160명 ⑤ ♠
성경인물 160명 ⑤
▶▶ 모압왕 에글론
사사기 3장 12 ~ 30절
에글론은 모압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무력해졌을 때에
에글론은 이스라엘을 쳐서 18년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이는 하나님이 에글론을 징계의 도구로 삼으신 것이다.
18년간 이스라엘은 굴욕적인 세월을 보내게 됐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이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세워 선민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셨다.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갈 때
에훗은 바지속에 단칼을 숨겨서 갔다.
에훗은 에글론에게 공물을 건달하고 되돌아가던 길을 돌이켜
에글론에게 다시 갔다.
에훗은 하나님의 뜻을 은밀히 전달할 것을
요청하여 그 자리에 배석했던
신하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숨겨 갔던 칼로 에글론을 살해하였다.
그후 모압사람 1만명을 도륙하고
에글론의 신하들과 용사를 소멸하여
이스라엘의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에글론은 하나님이 그를 강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고 18년간이나
선민을 괴롭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에훗이 에글론을 쳐서
정복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80년동안 평강을 누렸다.
이 본문의 내용과 같이 선민과 이방인
사이에 승전과 패망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범죄와 회개의 결과임을 깨달을 수 있다.
▶▶ 요 담
요담은 ?여호와는 온전하시다?는 뜻으로 여룹바알이라
불리는 기드온의 70명의 아들중 막내아들이었다.
기드온이 세상을 떠나자 기드온의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큰 사랑을 입지
못했던 과격한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를 다 살해한 후 왕이 되었다.
그때에 70형제중 막내였던 요담만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요담은 불량한 자기형 아비멜렉이 왕위를 찬탈한 것을 경멸,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요담이 사사기 9장 7절이하의 아비멜렉이 왕이 된 것을 비유하여
가시나무가 왕이 된 것으로 설명한 내용은 유명한 비유이다.
요담이 아비멜렉을 정죄하여 세겜사람들을 위해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소개한 예화는 아래와 같다.
하루는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이 일을 버릴 수 없노라 하고 왕위를 사양했다.
이번에는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라 요청하매 나의 단것과
아름다움과 실과를 버리고 어찌 왕위에 요동하리요 하고 거절하였다.
다시 포도나무에게 왕위를 부탁하자 포도나무도 거절하였다.
그러자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왕위를 부탁하자 가시나무가
기쁘게 받아들였고 왕이 될 것을 수락하였다.
▶▶ 요 담
역대하 27장 1 ~ 9절
요담은 ?여호와는 온전하시다?는 뜻이다.
요담은 웃시야(아사랴)왕의 아들로서
유다의 제 12대왕이었다(왕하 15:5).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었다.
요담은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동안 예루살렘에서 남조 유다를 통치하였다.
요담은 인격적으로 생활면에서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바른 정치를 위해 노략하였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빈약하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무성의한 사람이었다.
요담이 하나님의 성전을 출입하지 않았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대하 27:2).
요담은 그 부왕 웃시야가 교만함으로
문둥병이 발하여 별궁에 거할 때부터
궁중일을 다스렸고 국민을 치리하였다.
또한 그가 왕위를 계승하자 여호와의 전 윗문을 증축하였고
(왕하 15:35)
암몬나라가 웃시야왕이 죽자 유다를 배반하였을 때 암몬과
전쟁을 일으켜 크게 승리하였다. 또한 그는 암몬을 재차 지배,
조공을 받아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평화롭게 나라의 번영을 가졌으며
요담의 통치기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요담이 하나님을 성전에서 예배하지 아니하였던 일과 산당을
허물지 아니했으므로 유다백성이 산당을 드나들고 거기서
제사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사람도 좋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크게 받았는데도
신앙으로 서지 못할 때 아람의 공격을 받은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 요아스
사사기 6장 11,15,31절
요아스는 ?여호와는 강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요아스는 사사 기드온의 아버지였고 므낫세지파 아비에셀 사람이었다.
기드온이 소명될 때 요아스는 오브라에 거주하였고 그 지역의 부자였다.
당시에 그 지역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는데 기드온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바알의 단을 헐며 아세라상을 찍어 파괴하였다.
이때 그 성읍 사람들이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상을 찍은 일로
기드온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려 하였다. 이렇게 일이 확대되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지혜롭게 변론하여 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
요아스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으로 너희가 왜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바알이 과연 신이라면 자기 단을 훼파하였은즉
그가 기드온에게 보복하지 않겠느냐?이 요아스의 제안에 그 성읍
사람들은 동의하게 되었다. 요아스가 자기 아들 기드온을 위해
제안한 변론은 성공적이었다.
그날 기드온에게 별명이 붙여졌는데 ?여룹바알?이라 하였다.
이는 기드온이 바알과 영원히 맞서 싸운다는 뜻이다.
요아스는 유족한 환경과 성공적인 처지에 있으면서도
경건한 생활을 유지했으며, 기드온을 하나님의 종으로
양육하는데 좋은 본을 보인 아버지였다.
▶▶ 요아스
열왕기상 22장 26 ~ 28절
요아스는 ?여호와는 강하시다?는 뜻이다.
요아스는 북조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의 아들이었다.
왕자 요아스에 대한 기사가 성경에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요아스는 모계를 닮아 아합왕의 우상숭배와
악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
동조하는 왕자로 소개되어 있다.
아합왕이 그 최후를 맞게 되는 길르앗 라못 전쟁에도 요아스가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사돈 아합왕의 제안으로
동맹을 맺을 때에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 하자 아합은
4백명의 거짓 선지자를 통해 1차 전쟁의 확답을 받아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또다른 선지자의 응답을 요청할 때 미가야는
패전과 아합왕의 전사를 예언하였다. 이에 아합은 정직한
미가야 선지자를 증오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옥에 가두도록 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자기 아들 요아스에게 맡겼다.
요아스는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였다.
이는 단순한 옥중생활이 아니라 선지자를 혹독하게 괴롭힌 것이다.
그러나 아합왕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요아스는 아합왕의 악한 정책이나 사건에는 동참하였지만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아합왕의 다른 아들 아하시야가 계승했다.
▶▶ 골리앗
골리앗은 ?유랑자?라는 뜻이다.
키가 6규빗(2백90cm)이나 되는 체구가 건장한 거인이었다.
그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어린갑을 입었는데 갑옷의 무게가
놋 5천세겔(약 1백96kg)이었다고 한다.
그가 가졌던 창자루가 베틀채 같다고 하였으며
놋 단창을 겸하여 메는 장사였다.
골리앗은 가드사람으로 블레셋 군대의 대장이었다.
블레셋은 골리앗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에 전쟁을 걸었다.
그런데 그 전쟁방식이 군대를 동원하는 전투가 아니라 한 사람을
뽑아 일대 일로 싸워 전쟁의 승부를 판가름하자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스라엘 중에서는 아무도 대답이나 응수하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다윗이 전쟁터에 있는 형들을 보려고
왔다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분개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할례없는 이방백성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였다고 사울에게 나아가
골리앗과 싸울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게 된다.
그는 평소와 같이 손에 막대기를 가졌고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나아가
골리앗을 쳐 이기게 되었다.
골리앗은 자신의 힘과 체구를 지나치게 믿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가소롭게 여겼으나 결과는 골리앗의 죽음으로 끝났다.
블레셋 군대의 대장이었다면 장사라는
조건 한 가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지략이나 전술이나 많은 전쟁의 경험을 가진 자였는데
보잘것없이 무너졌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 다 윗
사무엘상 16 ~ 26장
다윗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유대 지파의 이새의 막내아들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었다.
그의 소년 시절은 고향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성장하였다.
다윗의 어머니를 하나님의 여종으로 호칭한 것을 보면
다윗의 어머니는 하
나님을 충성되이 섬긴 경건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시 86:16. 시 116:16).
이와같이 어려서부터 훌륭한 신앙의 감화가 다윗의 성장과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형들보다도 신앙이 빼어났고
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다윗은 혈색도 좋았으며 눈이 빼어나고 아름다운
남성미를 갖춘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 힘과 기지가 있어
양을 지킬 때에도 사자와 곰을 쳐죽일 만큼 담대한 사람이었다.
정서적으로도 다양한 재능이 있어 음악과 수금을 다루는 데에
유력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또다른 재능이 있어 구변이 좋았으며
무용과 호기가 당당했고 그의 연령에 비해 준수한 사람이었다.
그 위에 종교심이 강함으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었다고 성경이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울왕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자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이 일을 공인하게 위해 장로들 앞에서 실시했고 이날 후로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였다(삼상 16:18)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자 악신이 그를 번뇌케하므로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아 병적인 증상을 갖게 되었다.
이때에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뽑히게 되었다.
사울왕은 괴로울 때마다 다윗을 불러들여 수금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의 왕궁을 드나들며 궁중생활을
익히면서 사울왕을 가까이 섬기게 되었다.
이때에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이스라엘을
모욕하자 사울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골리앗의 적수가 되어
그를 치겠노라고 자진해 나서게 되었다.
사울왕은 나이는 연소했지만 그의 담력과 지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 싸우도록 허락하였다. 이때에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자기 딸을 주고
그 아비의 집은 면세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죽이고 큰 승리로 이끌었으나
사울왕은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다윗에게 지키지 않았다.
이때에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자
다윗을 정적으로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결국 사울은 신하들과 공모하여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고
그 후 아홉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는 다윗의 피난 생활이 시작된다.
이때에 놉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왕명이라고
속여먹을 것과 골리앗의 칼을 얻은 것이나 블레셋 사람
가드왕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의 보호를 요청한 것을 보면
신변위협을 느낄 때 다윗도 허약한 점을 보이고 있다.
자기의 신분이 그들 앞에 노출될 때 몸을 대문에 그적거리고
침을 흘리며 미치광이짓을하여 자기를 숨기려 하였다.
신앙인이라도 믿음이 약해지면
아주 허약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윗이 다시 신앙을 회복할 때 유대로 돌아와
아둘람굴에서 숨어살았다(삼상 21:10~15).
이렇게 다윗이 큰 시련속에 있었으나 선지자 갓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을 따랐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추종하여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다윗이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부모를 모압왕에게 가서 도움을 구해 그 어려운 시절을 피신하게
한 것을 보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함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엔게디 황무지에 있는 굴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살려 둔 일이나 사울이 진에서 잠들어 있을 때 그 막사에
들어가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와 그의 생명을
해치지 아니한 것은 그가 큰 인물임을 보여준다.
<< 사무엘하 2장 12절 ~ 4장 12절 >>
사울왕이 죽은 뒤에 유다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헤브론에서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추대하여 2년동안 분쟁이 있었으나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을 살해해 다윗의 통일왕국이 이루어졌다.
그의 왕권이 정착되자 기럇여하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여 다윗을 위해
예비한 장막의 정한 자리에 안치하였다.
이때에 다윗은 화목제와 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큰 잔치를 배설하되 온 백성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누어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군에게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실수와
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특수한 선택을 받았고
아브라함과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소개될 만큼
메시아 혈통의 증인이 되었다.
▶▶ 아브넬
사무엘하 2장 8절 ~ 3장 39절
아브넬은 ?아버지는 등불?이라는 뜻이다.
사울왕의 사촌 형제였고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다.
사울왕가에는 공로자요 끝까지 충성한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사울왕이 다윗을 추격할 때에도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사울왕과 동행하였다.
사울이 가는 곳이면 아브넬이 있을 만큼
사울의 측근이며 신임받는 장관이었다. 다윗이 적진에 들어가
사울왕의 물병과 창을 가지고 나와 아브넬을
책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였다.
사울왕이 죽은 뒤에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위를 선포했는데도
아브넬은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 지파의 통치자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과 이스보셋 사이의 전투가 있을 때마다
다윗편의 승리로 요압과 아브넬 사이의 대결은 아브넬을 위축시켰다.
한번은 다윗편은 19명, 아브넬편은 3백60명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이 되자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해갔고 아브넬은 더 세도를 잡게 됐다.
교만해진 아브넬은 사울왕의 첩 이스바와 통간하게 되었고
이를 책망한 이스보셋왕과 아브넬 사이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이스보셋왕에게서 마음이 떠나게 되었다.
결국 아브넬은 미갈을 데리고 다윗에게 귀순하여 다윗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하였으나 요압의 미움을 사서 그에게 살해되었다.
아브넬은 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 미 갈
사무엘상 14장 49절, 6장 16 ~ 23절
미갈은 ?누가 하나님과 같을꼬?라는 뜻이다.
미갈은 사울왕의 둘째딸로 다윗의 아내가 된 사람이다.
사울은 본래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
자기 맏딸 메랍을 주기로 약속하였다가
이를 거절하고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을
맏사위로 맞아 다윗과의 계약을 어겼다.
이것은 다윗을 사랑하는 민심이 높아지자
이를 시기 한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때마침 메랍의 동생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자 사울은
자기 딸의 애정까지 이용하여 다윗을 해하려 하였다.
그는 정적으로 느껴진 다윗을 죽이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
백장을 가져와야 미갈을 주겠다고 허락하였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게 하려는 사울의 악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의 사위가 되는 것은 좋게 여겨 블레셋 사람의
양피 2백장을 바치고 미갈을 아내로 삼았다.
이와같이 다윗과 미갈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순수한 동기로 부부가 되었다. 이들 사이는 결코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부부간의 애정도 좋은 편이었다.
한번은 사울이 단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하자
그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도망하여 피신하였다.
이때에 미갈은 자기 침실에 우상을 뉘여 다윗을 대신했고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는 정겨운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을 비방함으로써
자녀를 못 둔 결함도 있었다.
▶▶ 나 발
사무엘상 25장 1 ~ 42절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발은 갈멜족속이요 마온에 살고 있는 부자였다.
농장과 목축업을 겸한 사업가이기도 하였다.
양이 3천이요 염소가 1천마리가 된 것을 보면 그의 재산을 짐작할 수 있다.
나발은 돈을 모으는 데는 수완이 있었으나 물질관리에 완고했고 인색한
사람이었으며 사람에게 무정하고 그 행사가 악한 사람이었다.
다윗이 광야에 피신하고 있을 때 갈멜에서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열명의 소년을 보내며 식생활의 도움을 구하였다.
이때에 다윗의 태도를 보면 나발과 나발의 집에 평강을 빌었고
든 산업의 평강을 빌었다. 다윗은 자신에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나
나발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아니한 일을 말하고 자신을 나발에 대해 ?
네 아들?이라 낮추어 소개하며 겸손하게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나발은 요사이 억지로 주인을 떠나는 종이 많다는 비유를 들며
단숨에 거절하고 만다.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요 평소 그의 처세방법이었다.
다윗은 자기 이름으로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한마디로
거절당하자 용서할 수 없었다. 다윗이 6백명의 일행중에 2백명은
소유물 곁에 남겨두고 4백명을 무장시켜 나발을 치러 나섰다.
이때에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이 많은 식물을 준비하여
나귀에서 내려 엎드려 용서를 빌므로 위기를 면했으나
나발은 열흘뒤에 죽었다.
▶▶ 도 엑
사무엘상 22장 7 ~ 23절
도엑은 ?염려한다?는 뜻으로 사울의 신하요 목자장이었다.
도엑이 에돔사람으로
사울의 신하가 된 것을 보면 점진적으로 신임을 받아
그의 지위를 높여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에돔사람은 하나님앞에
버림받은 민족으로 사울의 신하가 되기란 어려운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도엑의 일생은 놉에 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의
관계에서 그 운명이 결정되었다.
다윗이 놉에 피신하여 아히멜렉으로부터 떡을 받고 칼을
받아간 일을 사울에게 고발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로 인해 제사장 85명이 순직했고 놉에 살던 많은 남녀노소와
소 양까지 살해되었다. 이는 사울왕의 잔악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엑의 어리석은 밀고는 엄청난 살상을 빚게 되는 불행한 결과가 되었다.
도엑은 다윗의 행적에 대한 밀고자일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을
아무도 살해하기를 꺼려할 때 도엑이 이를 도맡아 진행한 범죄에
범죄를 가중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도엑은 에돔사람이므로
그의 무지에서 이 큰 과오가 가능했을 것이다.
도엑이 이렇게 끔찍한 일에 서슴지 않고 가담했던 것은 사울에게
더 큰 인정을 받아 자기 자리를 높이고 신임받는
신하가 되려는 욕심에서 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을 때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의 한계를 볼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자기 판단이나 생각이 예상할 수 없는
범죄와 타락도 무릅쓰게 된다.
▶▶ 아기스
사무엘상 21장 10 ~ 15절
아기스는 마옥의 아들로 가드왕이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가드왕 아기스에게 두차례 도피한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피난생활중에 가드에 이르러 불가피하게
국경을 넘어 은신하자 아기스의 신하들에게 붙들려
다윗이 유대왕이라 아기스에게 소개하게 된다.
이때에 다윗은 아히멜렉의 사건으로 크게 상처를 입은
때여서 아기스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다.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구명책으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끼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고 정신병자같이 보이게 하였다.
다윗의 계획은 적중하여 아기스가 다윗을
추방함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울왕의 추격으로 유대지역에서 자신이 부지할 수 없음을 알고
육백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두번째 가드왕 아기스에게 나아갔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수도가 아닌 한 촌락을 허락하여
그곳에 거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아기스가 좋게 여겨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또한 아기스는 다윗을 신임했고 두 사람 사이에 좋은
친교가 이루어져 다윗을 ?머리지키는 자?
시위대장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방백들의 시기로 실천되지 못했다.
다윗은 피난생활속에서도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을 쳐서
정복하였고 쫓기는 몸으로도 자기 입지를 든든하게 하였다.
이 일에는 아기스도 협조하여
다윗의 피난생활은 더 든든해졌다.
▶▶ 아히멜렉
사무엘상 21장 1 ~ 9절
아히멜렉은 ?왕의 형제?라는 뜻이다.
다윗이 에셀바위곁에서 요나단과 헤어진 뒤 놉으로 피신하여
아히멜렉 제사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다윗은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했고 음식을 먹지 못해 크게 지쳐있는 상태였다.
다윗은 우선 아히멜렉에게 떡을 요구하게 된다.
아히멜렉은 그의 겉모습을 보아서도 사울을 피해 쫓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다윗을 맞았고 다윗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히멜렉은 식용으로 사용하는 떡은 없고
성소에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거둬내린 거룩한 진설병만 있었다.
이 떡은 평민이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인데도 만일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주겠노라고 허락한 것을 보면
아히멜렉의 심기를 알 만하다. 이때에 다윗은 사흘동안
부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진설병을 받아먹었다.
또한 다윗은 다급한 왕명으로 창과 병기를 갖고 나올
겨를이 없었다고 속여 창이나 칼을 요구함으로써 아히멜렉은
보자기에 싸서 에봇 뒤에 숨겨두었던 전승기념물인
골리앗의 칼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러나 놉의 성막에 머물러 있던 사울의 목자장 도엑이
아히멜렉과 다윗의 사이의 있었던 일을 사울에게 고발함으로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이
살해되는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
▶▶ 선지자 갓
역대상 21장 9 ~ 27절
갓은 ?행운 혹은 복되다?는 뜻이다.
갓은 선견자로 다윗시대의 선지자였고 다윗왕의 선견자라고도 불렸다.
다윗의 생애가운데 결정적인 실수가 두번있었다는데 그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일이요 또 하나는 인구조사를 감행한 일이다.
이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 엄격해서
사죄의 방법을 찾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징계를 알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게 된다.
이 중재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 선지자 갓이었다.
갓에게는 이 사역이 가장 큰 의미있는 사역이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행한 불신앙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셋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제안을 하셨다.
그 첫째는 3년 기근이요 둘째는 3개월동안 적에게
쫓기는 일이요 셋째는 3일동안 온역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여지기를 고하여
3일 온역을 선택함으로 이 재앙으로 죽은 자가 칠만명이었다.
나단선지자가 다윗을 권면하여 회개하게 한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을 선지자 갓이 감당하였다.
밧세바의 사건은 죄책감에 대한 반응이 쉬운 사건이었으나
인구조사에 대한 다윗의 실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선지자 갓의 권면을 거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실수할 때마다
철저한 회개와 함께 권면을 잘 받았다.
▶▶ 이스보셋
사무엘하 2장 8 ~ 10절 ...사무엘하 4장 5 ~ 12절
이스보셋은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 이르이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뒤에 이스보셋으로 개명되었다(대상 9:39. 삼하 2:8).
이스보셋은 사울의 넷째아들로 세형이 아버지 사울왕과 함께
전사한 뒤에 군대장관 아브넬의 협력으로 11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유다지파에서는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웠기 때문에
두사람 사이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권을 놓고 분쟁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때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한 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이스보셋의 왕권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방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의 목을 베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기 위해 밤을 세워 헤브론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왕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처하였다.
이렇게 되어 이스보셋의 머리는 헤브론에 있던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되었다(삼하 4:12).
결국 사울왕가의 통치는 이스보셋이 마하나임에서
2년동안의 불안한 통치가 막을 내림으로써 끝맺게 되었다.
이스보셋은 국민과 그 시대가 요구하지 아니한
인물로 왕이 되었다가 살해된 사람이다.
▶▶ 아사헬
(사무엘하 2:12~23)
아사헬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뜻이다.
아사헬은 요압과 아비새와 같이
스루야의 아들이었으며 다윗의 생질이었다.
아사헬은 두 형과 함께 전쟁에 능하고 지도력이 있어
군장중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아사헬은 발이 빠르고
민첩하여 다윗이 특별히 선발한 30용사중의 하나였다.
일시적인 상황이었으나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스보셋은 마하나임에서 왕위를 선포함으로 백성의 마음이
갈리고 양대 진영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때였다.
마침 이스보셋 편에서 아브넬과 그 일행이 나왔고
또 다윗 편에서는 아사헬의 형제들과 그 일행이 나와
기브온 못가에서 기량을 겨루는 싸움을 걸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다윗과 이스보셋
두 사람의 왕권을 놓고 어느 편이든 통치의 기세를
잡으려는 무자비한 대결이었다.
서로 머리를 잡고 열두명씩 상대방의 옆구리를 찔러
일시에 24명이 죽는 무승부의 전투였다.
이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놀이로 앞으로 빚어질
양대 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진로를 상징하는
감정표현이요 대결이었다. 또한 서로가 통치권을 놓고
끝까지 힘과 전투로 대결하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아브넬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자 아사헬이
그 뒤를 추격하여 그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아사헬보다 한수 위인 아브넬에 의해
도리어 아사헬이 죽게 된다.
아사헬은 빛을 보지 못한 장군이다.
▶▶ 요 압
요압은 ?여호와는 부친?이라는 뜻이다.
요압은 아비새와 아사헬과 같이 다윗의 생질이었다.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은 다같이 영웅적인 기질을 가진 용사였으나
그중에 가장 화려한 전력과 전승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요압이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느끼고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을 찾아와 그를 섬길 것을
청원하고 돌아갈 때 요압과 아비새가 그를 추격하여 암살하였다.
이때에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크게 애석하게 생각했다.
또한 요압은 다윗성을 함락할 때에 여부스 사람을
대파시킴으로써 진군의 군대장관이 된다(삼하 5:8. 대상 11:6).
그가 드고아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압살롬을 용서하고
환궁시키도록 설득한 여인의 두 아들 비유는 유명한 일화이다
(삼하 14:1~24).
이 일로 다윗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으나
그는 다시 부왕 다윗에게 반역하여 다윗을 치려하자
전투중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매달리므로
요압이 압살롬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요압도 아브넬과
아마샤를 살해한 죄를 물어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에 의해 살해되었다(왕상 2:5~6. 왕상 28~34).
▶▶ 므비보셋
므비보셋은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었다.
므비보셋이 므립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바알에게 속한 이름이므로 므비보셋으로 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므비보셋은 그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의 형제들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게 될 때 그의 나이 다섯살이었다.
유모가 므비보셋을 데리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 두 발을 다 절게 되었다.
그후에 왕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두려움의 조건이 되어
요단강 동쪽 로드발의 마길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다윗이 국왕으로 안정되자
사울의 후손이 살아있는가 찾게 되었다. 다윗은 처음부터
복수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울의 후손을 해치려는 뜻이 아니라
요나단과 사울과의 약속을 생각하여
그 혈통을 도우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므비보셋이 살아있음을 발견하자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고
사울의 모든 재산을 찾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재산을 그 가문의 시종 시바에게 맡겨 관리하였다.
또한 므비보셋을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도록 우대하였다.
이같은 연유로 해서 므비보셋은 다윗을 충성스럽게 섬겼다.
다윗이 압살롬에서 쫓겨 피신할 때 시바가 므비보셋을 참소하여
한때 위기가 있었으나 수염을 깎지 않고 옷을 빨지 아니한 채
다윗을 기다림으로써 용서받게 되었다.
▶▶ 레갑,바아나
(사무엘하 4:2~12)
레갑은 ?병거 다는 자?요, 바아나는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레갑과 바아나는 림몬의 아들로서 형제간이었다.
이들은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이었는데 아브넬과 같이
사울왕의 아들이스보셋이 잠깐 왕위에 있을 동안 군장들이었다.
헤브론에서 다윗이 선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집권세력으로
그 자리를 굳혀가자 아브넬은 다윗에게 투항하였고
레갑과 바아나는 직접 모반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스보셋이 볕이 쬐는 날 대낮에 자기 침실 침상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레갑과 바아나 형제가 밀을 가지러 온 것처럼
침소에 들어가 이스보셋의 배를 찌르고 목을 베어 살해했다.
이는 무서운 반역이었다.
이 두 형제는 이스보셋의 벤 머리를 가지고 아라바길을 밤새도록
걸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찾아갔다.
레갑과 바아나는 다윗왕을 위해 충정을 바친 것같이 ?
왕의 원수인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왔나이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칭찬하고 환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고 살해하였다.
이것은 다윗이 공의로운 사람임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레갑과 바아나가 한 임금에게 충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임금의 목을 베어 세상의 영달을 계획했던 것은
기회주의적인 패륜이었다. 이 레갑과 바아나를
다윗이 용납할 리가 없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불의한 사람의 말로이다.
▶▶ 나 단
(사무엘하 7:4~17)
나단은 ?양심? 혹은 ?주는 자?라는 뜻이다.
나단은 다윗시대의 선지자였다. 다윗이 주변국가를 점령하고
국권을 강력하게 다진 뒤에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으므로 이를 심히 송구하게 생각하였다.
이때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성전건축보다
나라의 번영을 허락하셨고 성전건축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건축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다윗이 그 손으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내 집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고
나단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다.
그 예언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또한 나단 선지자의 선지사역중 유명한 사건은
다윗왕이 밧세바를 범하여 범죄 했을 때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한 일이었다.
한 부락에 많은 양떼를 가지고 있는 부자와
양 한 마리를 딸같이 기르는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부잣집에 손님이 왔을 때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다가
손님을 대접했다는 비유로써 다윗의 범죄를 통렬히 지적하며
권고한 내용으로 나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나단선지자는 자기 사명에 충성된 자였다.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도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현실의 분위기에 눌려 참말을 못하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종이 얼마나 많은가? 사명에 충실하자.
▶▶ 히 람
(열왕기상 5:1~12)
히람은 ?형제는 높이 들렸다?는 뜻이다.
히람은 베니게의 두로왕이었다.
두로는 베니게의 수도로 상업의 중심지였고
큰 건축물이 많은 도시로 기술이 뛰어난 지역이었다.
두로왕(BC968~935)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쳐
우의가 깊은 선민의 우방국왕으로 서로 협력하는 사이였다.
베니게는 농산물을 필요로 하는 나라였고
이스라엘은 베니게의 기술을 필요로 하였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히람은 자기 나라에서
생산되는 백향목과 잣나무와 석재등 많은 건축자재를 제공하였다.
그뿐 아니라 목수와 석수등 건축에
필요한 기술자도 함께 지원하였다.
솔로몬은 두로왕 히람에게 그 대가로
밀 2만섬과 기름 20섬을 해마다 보내주었다.
이와같이 솔로몬과 히람사이에는 많은 무역이 이루어졌고
배와 선원등 두 나라사이의 기술과 노동이 거리감 없이
결속될 만큼 친숙한 교류가 계속되었다.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할 때 히람은 축하사절단을 보내는
가하면 솔로몬은 갈릴리 북쪽의 20성읍을 히람의 협력과
지원에 보답하는 답례로 떼어주기도 하였다.
솔로몬이 특수한 지혜를 소유했듯이 히람도
외교와 처세에 있어 지혜로운 왕이었다.
서로 지배하려하지도 않았고 굴종하는 일도 없이
원만하게 이웃나라간에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 속에
한 시대의 번영을 누린 사람들이다.
▶▶ 하닷에셀
(사무엘하 8:3~12)
하닷에셀의 ?하닷은 도움이다?는 뜻이다.
수리아의 소바왕으로 르홉의 아들이었다.
하닷에셀은 번영하는 이스라엘나라와 다윗왕에게 위협을
느꼈으며 자기 세력이 침식당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유브라데강변에서 이스라엘과의 접전이 이루어졌는데
마병 1천7백과 보병 1만이 사로잡혔고 병거는 1백승만 남기고
모든 말의 발 힘줄이 끊김으로써 비참한 피해를 보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와 연합한 아람군대도 1만2천이 전사하여
하닷에셀은 참패하고 말았다(삼하 8:3~12)
이때에 다윗왕은 하닷에셀의 중신들에게서
금방패를 빼앗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에 암몬왕 나하스가 죽자 다윗이 조문을 보낼 때
죽은 나하스의 아들 하눈왕은 다윗의 신하들을 첩자로 오해하고
수염을 자르고 옷의 중동볼기까지 잘라 돌려보냄으로써
다윗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하눈은 자기 방어의 방법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게 된다. 여기에 하닷에셀이 합세하였고
하닷에셀의 군대장관 소박이 연합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병거 7백승과 마병 4만이
진멸되어 암몬의 연합군과 하닷에셀이 크게 패하고
다윗에게 항복하여 그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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