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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00페이지를 넘어서네요. 앞으로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못 갈까요. 2024년도 무사강녕하여 진도를 쭉쭉 빼자구요
Now, I think, it is time to speak of the main error of that time which
naturally gave rise to many others —. the miscalculation in deciding the probable
date on which the German forces would attack.
내 생각에 이제는 그 시절에 한 중대한 잘못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이다. 그 중대한 잘못은 자연적으로 수많은 다른 잘못을 파생하였다. 독일 군대가 공격할 가능한 날짜를 결정하는데 있어 잘못 계산 점과 같은.
The 1940 operational plan which, after finalization, was in force in 1941
provided that in the event of a threat of war:
all armed forces are to be alerted;
troop mobilization is to be carried out immediately on a nationwide scale;
troops are to be built up to wartime strength under the mobilization plan;
all mobilized troops are to be concentrated and deployed along the western
frontier in accordance with the plans of the frontier military districts and the
Military High Command.
최종 확정 이후 1941년에 발효된 1940년 작전계획은 전쟁의 위협이 있는 경우 다음과 같은 것을 제공했다; 모든 부대에 경보가 전달된다. 부대 동원이 전국 규모로 즉각적으로 수행된다. 부대는 동원계획에 따라 전시 전력을 강화한다. 동원된 모든 부대는 군사 고위사령부와 전선 군관구의 계획에 의해 서부전선을 따라 집중시키고 배치한다.
Measures specified by the operational and mobilization plans could be
implemented only by a special government decision. This was granted, and
partially at that, only in the early morning of June 22, 1941. In the last few
prewar months the leadership did not call for any steps that should have been
taken when the threat of war was particularly great.
작전 및 동원 계획에 규정한 수단은 특별 행정 결정에 의해서만 시행할 수 있다. 이는 1941년 6월 22일 이른 아침, 오직 그 때에만 특별히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 직전 몇 달 동안 지도부는 전쟁의 위협이 유난하게 커졌을 때 취해야만 하는 조치도 요구하지 못했다.
One cannot help asking why the leadership headed by Stalin did not put
through the operational plan they themselves had endorsed?
More often than not, people blame Stalin for these errors and
miscalculations. He had certainly made mistakes, but one cannot consider the
causes of these mistakes in isolation from the objective historical processes and
phenomena, from the entire complex of economic and political factors. Now that
the consequences are known, nothing is easier than to return to the beginning
and expound all sorts of opinions. And nothing is more difficult than to probe to
the substance of the problem in its entirety —. the battle of various forces, the
multitude of opinions, and facts —. at the given moment in history.
그들이 스스로 승인한 작전계획을 통해 스탈린이 이끄는 지도부가 왜 그들이 스스로 승인한 작전계획을 통해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종종 사람들은 이러한 실수와 오판 때문에 스탈린은 비난하곤 한다. 그는 분명히 실수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의 원인을 객관적 역사의 과정과 현상, 경제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합적인 인자들을 떼어내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 그 결과를 알 수 있지만 모든 종류의 의견을 개진하고 시작하는 데로 되돌아간다면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지금 그 결과를 알고 의견을 개진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보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역사에서 주어진 순간에 그 전모-다양한 부대의 전투, 수많은 의견, 사실들-안에서 구체적 문제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Comparing and analyzing Stalin’s conversations with people close to him in
my presence I have come to the firm conclusion that all his thoughts and deeds
were prompted by the desire to avoid war, and that he was confident in
succeeding.
내 자리에서 스탈린이 그와 가까운 사람들과 한 대화를 분석하고 비교하면서 그의 사고와 행동 모두가 전쟁을 피하려는 열망에서 촉발되었으며, 성공할 자신감이 있었다는 확고한 결론에 이르렀다.
Stalin was well aware what misfortunes would befall the Soviet people in a
war with such a strong and wily enemy as Nazi Germany. That was why he
strove, as our entire Party did, to win time.
스탈린은 강렬하고 사악한 나치 독일과 같은 적과의 전쟁에서 소련 인민들에게 닥칠 불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우리 당 전체가 했던 것처럼 시간을 벌기 위해 분투한 이유다.
It is now common knowledge that there had been warnings of the attack on
the USSR that the Nazis were about to unleash, of the troops that were being
massed on our borders, and so on. But at that time, as we see from enemy
archives captured after the defeat of Nazi Germany, reports of quite a different
nature landed on Stalin’s desk as well, and in large numbers. Here is an example.
On February 15, 1941, acting on instructions from Hitler given at a
conference on February 3, 1941, Field Marshal Keitel, Chief of Staff of the High
Command, issued a special Directive for Misinforming the Enemy. To conceal
the preparations for Operation Barbarossa, the intelligence and counterintelligence
division of the General Staff evolved and carried out numerous
operations, spreading false rumours and false information. It was leaked that the
movement of troops to the East was part of the “greatest misinformation
manoeuvre in history designed to distract attention from final preparations for
the invasion of England”.
우리 국경에 부대의 집결 등등 나치가 곧 발사할 소련에 대한 공격의 경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는 상식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패전 후에 획득한 적의 자료실에서 볼 수 있듯, 완전히 다른 내용의 보고서가 스탈린의 책상 위에 대량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표본이 있다. 1941년 2월 3일 회의에 제출된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1941년 2월 15일 야전 장군 카이텔 최고사령부 총참모장은 ‘적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라는 특별 명령’을 공포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준비를 은폐하기 위하여 총참모부의 방첩 및 첩보 부서가 수많은 작전을 발굴하여 수행하고, 유언비어와 허위정보를 퍼트렸다. 동부로의 부대 이동은 “영국 침략을 위한 최종적 준비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고안된 역사상 최대의 허위정보 책략의 일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leaked)
Maps of England were printed in vast quantities, English interpreters were
attached to units, preparations were made for “sealing off” some coastal areas
along the English Channel, the Strait of Dover and Norway. Rumours were
spread about an imaginary airborne corps. Mockups of rocket batteries were
installed along the shore, and rumours circulated among the troops that they
were being sent East for a rest before the invasion of England, and others that
they would be allowed to pass through Soviet territory to attack India. To add
credibility to the tale of a landing in England special operations were worked out
under code names “Shark” and “Harpoon”. The flood of propaganda was
directed against England and the usual diatribes against the Soviet Union ceased.
Diplomats did their bit, and so forth.
엄청난 양의 영국 지도가 인쇄되었다. 영어 통역사가 부대에 배치되었고, 영국 해협과 도버와 노르웨이해협을 따라 일부 연안 지역을 ‘봉쇄’하려는 준비가 있었다. 상상의 공수부대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가짜 로켓 발사대가 해안을 따라 설치되었고, 영국 침공 직전에 휴식을 위해 동부로 보낸다는 소문이 부대 사이에서 떠돌았다. 인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소련 영토를 통과하는 게 허용되었다는 다른 소문도 돌았다. 영국 상륙에 관한 이야기에 신뢰를 더하기위해 “상어”와 “작살”이라는 암호명 아래 특별 작전이 수행되었다. 선전의 홍수는 영국을 향했으며, 소련에 대한 일상적인 통렬한 비난이 중지되었다. 외교관들은 제몫을 하였다. 그리고 기타 등등
Superimposed on the deficiencies in the general combat readiness of the
Soviet Armed Forces, such information explains the extreme caution Stalin
displayed when it came to carrying out the basic preparations provided for in the
operational and mobilization plans for repulsing possible aggression.
Stalin was also aware of the fact that, as I have already mentioned, owing to
the shift from the territorial to the cadre system of command, units and
formations were headed by young commanders and political officers who had
not yet acquired the operational and tactical skill required for the posts they held.
Acting on the decisions of the 18th Party Congress and subsequent
instructions of the Party’s Central Committee on the selection, education and
training of leading cadres, the Command and the Party and political bodies in the
army had by the summer of 1941 carried out a vast amount of training and
educational work, which raised the general theoretical level and practical skills
of cadres in all arms of the service.
소련 군대의 일반적인 전투 준비의 결함에 덧붙여, 이러한 정보는 가능한 침략을 격퇴하기 위한 작전과 동원 계획안에서 제공하는 기본적인 준비를 수행하게 되었을 때 스탈린이 보여준 극단적인 경계(caution 주의, 신중함)를 설명해준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스탈린은 영토에서 간부 지휘체계로 이동함에 따라 부대와 편제는 자기 지위에서 요구되는 작전 및 전술 훈련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젊은 지휘관과 정치 장교가 이끌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스탈린은 알고 있었다. 18차 당 대회 결정과 선도 간부의 훈련과 교육, 선발에 대한 연속한 당 중앙위원회 교시에 따라 행동하면서 부대 안의 사령부와 당 그리고 정치 조직은 1941년 여름까지 엄청난 양의 훈련과 교육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이는 복무하는 모든 분양에서 간부의 일반적인 이론 수준과 실천적 기술을 끌어 올렸다.
Nevertheless the question of the armed forces’ commanding personnel
remained a serious problem in 1941. The mass promotion of young commanders
to high posts lowered the army’s fighting capacity for a certain time. When
important and major organizational measures were carried out shortly before the
war, the shortage of skilled commanders, specialists, tankmen, gunners, flyers
and ground crews made itself felt quite clearly. The substantial increase in
strength of our armed forces made the shortage still more perceptible. It was
assumed that this could for the most part be overcome by the end of 1941.
그렇지만 군 지휘 요원에 대한 문제는 1941년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젊은 지휘관을 높은 지위로 올리는 대대적인 시책은 일정 기간 군 전투 틍력을 저하시켰다. 전쟁 직전 중요하고도 주요한 조직적 조치가 시행되었을 때 숙련된 지휘관과 전문가, 기갑병, 포수, 비행사, 지상 요원의 부족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우리 군의 능력이 상당히 증가하자 부족은 더 잘 알 수 있었다. 이 문제는 대부분 1941년 말까지 극복 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While wishing to preserve peace as the decisive condition for building
socialism in the USSR. Stalin saw that the governments of Britain and other
Western countries were doing everything possible to prod Hitler into a war with
the Soviet Union, that, being in a critical military situation and striving to save
themselves from catastrophe, they were strongly interested in having the
Germans attack the USSR. That was why Stalin distrusted the information he
was getting from Western governments that Germany was about to attack the
Soviet Union.
소연방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결정적 조건으로서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한편, 스탈린은 영국 정부와 다른 서구 국가들이 소련과 전쟁을 하게 히틀러를 자극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한다는 것을 보았다. 군사적 임계 상황critical situation 안에 있으면서 대재난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영국과 서방 국가들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것이 바로 스탈린이 서구 정부로부터 얻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신뢰하지 않은 이유이다.
Let me recall a set of facts which, when reported to Stalin, were likely to
heighten his distrust of the above warnings. I mean the secret negotiations with
Nazi Germany in London in 1939, precisely when Britain, France and the USSR
were holding military talks in Moscow.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을 때 위의 경고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을 고조시킬 것 같았던 일련의 사실들을 회상해보겠다. 정확하게는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군사 회담을 가졌을 때 1939년 런던에서의 나치 독일과의 비밀 협상을 의미한다.
British diplomats were offering the Nazis an agreement on dividing spheres
of influence on a world scale. The British Minister of Trade, Hudson, said during
his talks with Wohltat, a Nazi privy counselor close to Field Marshal Goering,
that three extensive regions offering unlimited opportunities for economic
activity —the British Empire, China and Russia —were open to the two
countries. They discussed political and military issues, problems of procuring
raw materials for Germany, and the like. Other persons joined the talks; the
German Ambassador in London, Dirksen, confirmed in his report to Berlin the
existence of “a tendency towards constructive policy among government
quarters here”.
영국 외교관들은 나치에게 전 지구적으로 영향력의 범위를 분할하는 협정을 제안했다. 영국 무역부 장관 허드슨은 야전 장군 괴링과 친밀한 나치의 비밀 고문(특사) 보흘타트와의 회담에서 경제 행위에서 무제한의 기회를 제공하는 세 개의 광대한 지역-영 제국, 중국, 러시아-이 두 나라에게 열려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정치 군사적 문제, 독일을 위한 천연자원 확보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회담에 참여했다. 주영 독일 대사 디르크센은 베를린에 보낸 보고서에서 “여기 정부 구성원들(quarters 익명의 소식통) 사이에 건설적인 정책을 향한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Here I think it relevant to recall that when Hitler tried to offer the Soviet
Union to discuss the idea of dividing the world into spheres of influence, he
encountered a sharp and unequivocal refusal of the Soviet side, which would not
even hear of the subject. This is borne out by documents and by the evidence of
those who accompanied V.M. Molotov on his visit to Berlin in November 1940.
히틀러가 소련에게 세계를 영향력의 범주로 분할하는 방법idea을 토론하자고 제안하려고 노력했을 때, 소련 측에서의 날카롭고 명백한 거절을 직면했고, 심지어 소련은 그 주제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기서 나는 상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1940년 11월 베를린 방문 시에 몰로토프를 수행한 사람들의 증거와 문서에 의해 입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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