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오 9,1-8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것이 어째서 “악한 생각”일까?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힘도 성령이시고 죄를 용서하는 힘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니 병에 대한 치유가 일어난다면 또한 죄 용서의 권한도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실 때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만 싹 빼고 주셨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믿으면 엄마는 아이를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실수하며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74회에 약한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싫어하며 강한 아빠에게는 순종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당연히 아빠 편이기 때문에 금쪽이는 가족에서 왕따인 엄마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욕구보다 더 컸던 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 할머니와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금쪽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쪽이는 원망스러운 엄마를 뒤로하고 살기 위해 두려운 아빠와 할머니 편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건 아빠가 엄마에게 자기 권한을 다 주지 않으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됩니다.
순종할 수 없고 질서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순종한다고 엄마를 막 대하는 이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남편은 빠져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아빠에게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이것 자체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할 줄 알면 성장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 권한을 ‘성령’을 통해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만 싹 빼고 성령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파견자입니다.
파견할 때는 자신의 권한도 함께 줍니다.
엄마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어서 아빠에게 직접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자녀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다 내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는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라고 말씀하십니다.
‘개훌륭’에서 주인에게 입질하고 현관문까지 물어뜯는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보호자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인제 와서 보호자가 영구를 길들이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먼저 자신이 영구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주인 옆에서 영구를 제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영구도 조금씩 주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강 훈련사에게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자신의 이 권한을 주인들에게 줍니다.
주인들은 그 권한으로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영구는 순종하는 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이양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할 때 진정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이를 위한 하나의 권한입니다. 가르칠 때 한 번 정도 물렸을 때 그 개를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또 용서하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가 성장합니다.
강 훈련사의 권위를 등에 업어야 순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며 순종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에게 다 내어주지 않는 비정한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권한이 이양된 이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진정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아빠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우리 안의 나쁜 생각을 빼어버립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러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긴 터널을 지나 맞이한 인생의 봄날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축복 속에 완전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질병이란 혹독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요?
중환자실에라도 들를라치면,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환우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 모습이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하소연을 합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숨 한번 제대로 쉬어봤으면, 시원한 물 한 모금 벌컥벌컥 마셔봤으면, 밥 한 그릇 뚝뚝 해치워봤으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우의 삶 역시 기구했습니다.
중풍이 얼마나 도졌으면 자기 스스로는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가족들은 들것에 환우를 실어 예수님 계시는 곳까지 운반해왔습니다.
물론 처음 자리에 드러누울 때만 해도 친구며, 친척들이며 자주 찾아와서 말 동무도 해주고 용기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병세가 점점 깊어가면서 그는 점점 철저한 왕따, 천덕꾸러기가 되어 갔습니다.
그는 하루 온종일 드러누워 천장 바라보는 것이 다였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모든 문제를 누군가의 손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고질병이 오래가다보니 가산도 다 탕진했겠습니다.
식구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빨리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으면 하는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상처가 덧나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부끄럽다고, 창피스럽다고 상처를 꽁꽁 동여매고 감춰두면 되겠습니까?
빨리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에 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밥 먹듯이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 갖은 병고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이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치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자기 비움, 성령께 마음을 여는 작업,
우리의 상처 나고 곪은 부위를 감추지 말고 보여드리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일>
2022. 06. 30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오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람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땅의 사람에게
맡기셨으니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땅의 사람에게는
권한이요 의무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