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너무 피곤해 8시를 못넘기고 쓰러지다시피 잠자리에 들었지만 겨우 3시간 정도만에 잠을 깨버렸다. 오후에 알밤주으러갔던 아내가 땅벌에 손등을 쏘인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된듯 하다.
자다가 중간에 깬 경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불을 켜거나 눈으로 뭘 보려하지 말라는 것이 수면전문 의사들의 조언이다. 그래서 가급적 지키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꿈이 너무 강렬했다던지 마음에 무거운 부담이 올때는 나도 모르게 폰을 보게된다.
동행일기를 열었다가 유기성목사의 칼럼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조기은퇴한 유목사님은 은퇴이후의 삶이 너무 바빠서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는 소감.
아마도 이곳 저곳으로 부터 초청을 많이 받다보니 너무 바빠짐에 대한 소회일 것이라 생각한다. 선한목자교회가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이다보니 섭외대상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교회가 강사를 초청하는 우선순위는 정해져 있다. 첫째는 지명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교회를 부흥시킨 실적과 설교에 대한 능력이 검증된 자라야 한다. 두번째는 부흥사로서 참여한 청중을 장악하고 교회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에 이러한 공통의 목표에 적합한 인물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보배같은 인물도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초청대상에서 밀리게 된다. 그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동행일기 같은 팀의 엄재용목사도 얼마든지 부흥회 강사로 추천할만한 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다지 인기는 없을련지도 모른다. 지명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를 불러줄 교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돌아온 이후 설교초대를 받은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 지명도가 없는 나를 불러줄 목사도 교회도 없다. 사실 어떤면에서는 재정 한푼이 아쉬운 어려운 목회자를 불러준다면 서로가 윈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욕심일 뿐이다.
대형교회에서 은퇴한 목회자는 평생의 노후를 보장받게 된다. 교회에 따라 20년을 계속 사역한 담임목사에게 노후연금을 지급해 준다. 그러다보니 어떤 교회는 2명이상의 원로목사를 모시고 있는 교회도 있다.
노후가 전혀 염려할 이유없는 원로목사는 어쩌다 한번 불러준다면 매우 고마워할 것이다. 그러나 피곤할 만큼의 초청이 쇄도한다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만 하다.
하지만 노후에 대한 보장이 전혀없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해야 하는 은퇴목사라면 쓰러질망정 이곳이든 저곳이든 불러주기만 하면 감지덕지일 걱이다.
다행히도 유기성목사는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기도하던 중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노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보수가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 묵묵히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먹고 살기가 염려돼 육체노동을 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실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군이다.
그럼에도 마치 오후 3시에 부름받는 일군의 은총이 주어진다면 더할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심조차도 나의 자아가 죽지 못한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