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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존재, 자아, 작용
slowdream
2022. 11. 23. 13:10
존재, 자아, 작용
불교는 무아 無我를 주장하는데 자칫 혼란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한 삶을 개체 존속유지의 단위로 하는 정신육체적 복합체 즉 현실적 주체인 ‘나’, 타자와 엄격하게 구별되는 ‘나’는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고정불변의 실체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또한 존재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더불어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흔히 말하는 ‘정체성 identity'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며 전개된다.
40세인 나는 회사에서는 부장이라는 존재로, 집에서는 남편, 아빠라는 기능, 작용의 존재로 현현한다. 동창 모임에서는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 짠돌이 친구이다. 만원 전철에서는 자칫 성추행범이 될 수도 있다. 축구공은 잔디에서 굴러다니고 발로 걷어찰 때 축구공이 되며, 휴식을 취하고자 누워 머리를 받치면 베개가 된다. 어린아이에게는 장난감으로, 만취해 귀가한 남편에게 화가 난 아내에게는 화풀이 대상이 된다. 칼은 누구 손에 쥐어져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살인도구가 되기도 요리도구가 되기도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하며, 고물장사에게는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기도 한다.
‘작용’은 관계맺음이며, 상호의존적 조건발생이자 연기인 법칙에 지배된다. 모든 존재는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관계의 산물이다. 그런 까닭에 각 존재의 무게, 가치는 절대치를 갖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본체와 현상, 진제와 속제로 나뉘는 이분법적 일원론인 대승의 불이 不二 사상은 이 지점에서 개념적 혼란을 일으킨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형이상학적이든 초인격적이든, 초월적 실체나 존재로부터 현상적인 존재가 빚어졌다 해도 그 차이와 차별이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같다고 해서 자식들이 똑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번뇌는 번뇌이고 깨달음은 깨달음이지,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초발심이 곧 정각’이라는 대승과 선 禪의 논리는 허구적이고 망상적이고 궤변이자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살활자재 殺活自在, 입파무애 立破無碍, 화광동진 和光同塵, 진공묘유 眞空妙有, 무애행 無碍行, 불이행 不二行 등의 대승과 선의 화법과 행보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그 속내가 왜곡되어 있고 일그러져 있는 까닭이다.
진아, 참나 살활자재
殺活自在, 입파무애
立破無碍, 화광동진
和光同塵, 진공묘유
眞空妙有, 무애행
無碍行, 불이행
不二行 등
의 대승과 선의 화법과 행보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그 속내가 왜곡되어 있고 일그러져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