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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후의 아시아와 일본 (1) 우크라이나라는 좌절 / 06/21(금) / nippon.com
일본의 아시아 인식, 아시아와의 관계성의 변천에 대해서, 역대의 아시아정경학회 이사장에게 되돌아 보는 인터뷰 기획. 제1회는 히라노 켄이치로·도쿄대 명예 교수에게, 냉전 종결 직후의 학회의 조류, 국제 교류가 있어야 할 모습 등에 대해 들었다. (질문자 : 가와시마 마코토 도쿄대학 대학원 교수)
◇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관계
- 가와시마 마코토
선생님이 아시아정경학회의 이사장으로 오신 1989년부터 91년까지의 시기는 세계사적인 전환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어떻게 세계를 보고 계셨나요?
- 히라노 겐이치로
1989년 초에 쇼와 시대가 헤이세이(平成)가 되었고, 천안문(天安門) 사건이 일어나 냉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조사해 보면, 버마가 미얀마로 개명한 것이 이 해로, 아시아의 정세도 냉전의 종결에 연동하는 형태로 상당히 움직이기 시작할 뻔했다고 생각합니다. APEC의 각료회의도 이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학회의 동년배 아시아 연구자들은 신경썼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아시아 정경학회가 직접 그것에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 가와시마
당시의 학계에서 주요 과제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히라노
당시의 학계, 예를 들면 정치연구자와 경제연구자가 모이는 아시아정경학회에서는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 특히 경제발전과 민주화와의 관계 등이 논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 민주화로, 혹은 민주화가 경제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열심히 논의가 이루어졌던 그런 희귀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와타나베 토시오(※1) 씨가 당시, 젊은 세대를 리드하는 형태로 경제발전론을 진행해, 경제와 정치의 연결, 민주화가 경제발전을 이끈다고 하는 명확한 이해가 있다고 하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안행형태(雁行形態)'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민주화가 경제발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데이터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반대론의 급선봉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시대였죠.
◇ 아시아 연구 세미나·학계 풍경 변화 : 유학생의 존재
- 가와시마
1980년대부터 90년대 시기에 일본 아시아 연구의 '풍경'에는 뭔가 큰 변화가 있었습니까?
- 히라노
90년대에 들어서자 대학 세미나에는 상당수의 유학생이 섞여 있었습니다. 제가 아시아 정경 학회에서 연구자로서의 데뷔를 한 전후 초기에는 유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미국의 점령하에 있지 않았지만 냉전 시대였고, 아시아는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접할 기회는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시아와의 접촉이 있기 전의 아시아 연구 그룹에 제가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변화를 시작해서 유학생, 특히 아시아 유학생들이 세미나 속에 섞여 있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부터 돌이켜봐도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대만 출신 분들과 한반도 출신 분들은 예외였는데요. 한편, 우리 쪽도 아무도 아직 대륙에 공부하러 가지 않은 그런 시대죠.
◇ 전쟁 전 이래의 아시아 연구의 전후와의 연속성
- 가와시마
전쟁 전의 아시아 연구와 전후 일본의 아시아 연구의 연속성, 단절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히라노
저같은 경우는 좀 색다른 점이 있어서, 전쟁전 일본의 「아시아 연구의 학지」의 영향을 가장 느낀 것은 J.K. 페어뱅크 선생님(※2)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아닌 중국 연구자가 일본의 전쟁 전 학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 지금의 분들에게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환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만주사변의 연구를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만, 지금 되돌아 보면, 그 만주 연구를 제가 목표로 한 것에, 페어뱅크 선생님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연구의 방법론 모색이라는 것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인 상황, 한마디로 냉전하의 세계적인 상황에서 아시아를 배울 필요가 크게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에 가서 아시아를 배울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중국에서 아시아를 배우는 아시아 연구의 방법론을 얻을 수 있을지, 그런 점에서 어색한 점이 계속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일본의 아시아 연구는, 현재 있을 수 있는 본연의 자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아시아에 가서 아시아를 배울 수 없다고 하는 상황하에서, 일본이 특수하고, 또 불가결한 지위를 차지해 오고 있다고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연구가 아시아 연구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일본의 특수성이라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냉전 종식 후 3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우크라이나의 충격
- 가와시마
선생님은 냉전 후의 30년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현재가 '포스트 냉전'이라는 시기의 끝이라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 히라노
그런 뚜렷한 관찰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만은, 정말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무엇이었는가. 특히 아시아 연구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온 인간으로 보면, 일본을 필두로 전쟁의 반성에 근거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해 온 내용을 전혀 무시한 것 같은 역행 현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나오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아시아의 현실을 어느 정도 감안하면서 문화의 다원성이라는 시각을 갖자고 제안해 온 입장에서 보면 역시 아시아에는 공통의 것과 각각의 지역이나 시대의 특징이 있는 다문화성이 중층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유학생들이 일본에 모여드는 하나의 유인이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국제문화교류·국제원조의 의미
- 가와시마
선생님은 국제 문화 교류 연구의 1인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국제 교류와 국제 원조가 겹치면서도 이번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 히라노
다소나마 국제 교류를 실천한 인간으로서 말씀드리면, 지금의 세계 정세의 유감스러운 점은, 일본의 국제 교류 활동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구멍을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 지식인을 일부라도 친구로 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연구를 하는 러시아인은 옛날부터 있습니다. 좀 독특한 분들입니다만, 능력이 굉장히 있고, 일본인도 하지 않는 일본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역사에 역행하는 이 움직임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시아 연구를 하면서 국제 교류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자신의 반성점입니다.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게 반성이네요.
또, 1989년에 일본은 세계 최대의 ODA 공여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학회에서 논의하고 있던 것은, 국제 원조로서의 국제 협력인 점, 국제 원조의 목적을 명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국제원조를 하는가. 목적의 명확화 노력은 있었지만, 그 노력은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저는 그 무렵부터 국제 문화론의 방향으로 확실히 전환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제 협력이나 국제 원조를 각국의 국가 정부만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시도하는 그런 상태로 진행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간의 경쟁의 장으로서가 아니라, 각각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잘 사용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와 같은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장소, 하나의 시간을 한 나라가 점유하는 것처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그런 국제 협력의 방식은 없을까 생각했을 때 문화라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겹쳐도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협력론을 기술이전론으로 전개하는 것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 국제문화론으로의 전진의 한 이유였습니다.
정치력이나 군사력이 문화력을 보좌역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문화 진흥론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소프트 파워다'라고 말하는 것도 알기 쉽겠지만, 정치력이나 군사력의 보좌역으로 끝내는 것은 아닌 문화의 위상이 문화의 독자적인 힘을 발휘시킬 수 있는 국면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990년대의 중국
- 가와시마
1990년대를 생각할 때 역시 중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 당시의 중국을 보고 계셨나요?
- 히라노
중국의 대국화 조짐을 제 나름대로 분명하게 경험한 것은 드물게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96년이었습니까, 중국과 대만 사이의 3차 위기가 발생했고(제3차 대만해협 위기) 중국이 최종적으로 그었습니다. 그 순간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현재 같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현재로 이어질 수 있는 중국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했고,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뒤늦게나마 대만을 사랑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중국은 너무 커요. 그러나 그 큰 청조가 현명한 행동을 한 적도 있었다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양문고의 장서를 보면서 그런 중국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문화의 기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본 후의 지혜입니다만, 원래 제가 연구자에 뜻을 둔 만주 연구, 만주국 연구 속에 실은 문화의 중층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괴뢰정권을 구상한다는 데 나타난 것이고, '오족협화'를 만주국의 모티프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만, 만주라는 곳이 그러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을 필두로, 아시아의 사회는, 복수의 차원상에서 여러 지역(부분)으로 동시에 나누어지는, 그러한 가소성이라고 할까,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우리는 문화의 중층성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뷰는 2022년 9월 1일 도쿄 도라노몬의 nippon.com 에서 실시했다. 또한 『아시아 연구』(69권 2호, 2023년 4월)에 인터뷰 기록 전체가 게재되어 있다.
배너 사진: 1989년 6월 2일 중국 당국의 무력 개입이 일어나기 직전인 베이징 톈안먼 광장=중국 베이징(AFP=시사)
히라노켄이치로(平野 健一郎)HIRANO Ken’ichirō
도쿄대학 명예교수. 전문은 국제관계사, 국제문화론. 1937년생.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 등을 역임. 1989~1991년 아시아정경학회 이사장.
(※1) ^ 와타나베 토시오(1939-)는, 도쿄 공업대학 명예 교수, 다쿠쇼쿠 대학 고문. 1985년에 간행된 『성장의 아시아 정체의 아시아』(동양경제신보사 1985년/고단샤 학술문고 2002년)는 「정체하는 아시아」라는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2) ^ 존 킹 페어뱅크(1907-1991)는 냉전기 미국을 대표하는 중국 연구자다. 하버드대 교수. 주로 19세기 후반 청조의 대외관계사를 전문으로 하였다.
https://www.nippon.com/ja/japan-topics/c14101/
冷戦終結後のアジアと日本(1) ウクライナという挫折 :平野健一郎・東大名誉教授
国際・海外 政治・外交 歴史 2024.06.21
日本のアジア認識、アジアとの関係性の変遷について、歴代の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に振り返ってもらうインタビュー企画。第1回は平野健一郎・東大名誉教授に、冷戦終結直後の学会の潮流、国際交流のあるべき姿などについて聞いた。(聞き手:川島真・東京大学大学院教授)
平野 健一郎 HIRANO Ken’ichirō
東京大学名誉教授。専門は国際関係史、国際文化論。1937年生まれ。東京大学教養学部教授、早稲田大学政治経済学部教授などを歴任。1989-1991年に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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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済発展と民主化の関係
川島 真 先生がアジア政経学会の理事長でいらした1989年から91年までの時期は世界史的な転換点だと言われています。当時、先生はどのように世界を見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か?
平野 健一郎 89年の初めちょうど昭和が平成になり、天安門事件があり、冷戦が終結しました。調べてみると、ビルマがミャンマーに改名したのがこの年で、アジアの情勢も冷戦の終結に連動する形で随分動き始めるところだったと思います。APECの閣僚会議もこの年に始まっています。こうした変化は、学会の同年配のアジア研究者たちは気にしていたに違いないのですが、少なくともアジア政経学会が直接それに反応するといったようなことはなかったと思いますね。
川島 当時の学界で主要な課題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でしょうか。
平野 当時の学界、例えば政治研究者と経済研究者が集うアジア政経学会では、政治と経済との関係、特に経済発展と民主化との関係などが議論されていたと思います。そして、経済発展が民主化に、あるいは民主化が経済発展に結びつくということが現実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も思いました。いま振り返るとそれは勘違い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でもあのときは多くの人がそういう考え方で、熱心な議論が行われていた、そういう稀有な時代だったと思います。
例えば、渡辺利夫(※1)さんが当時、若い世代をリードする形で経済発展論を進めて、経済と政治のつながり、民主化が経済発展を導くというクリアな理解ができるという議論を展開していました。「雁行形態」という理論です。それが、いつの間にか民主化が経済発展と関係があるというのはデータ的に証明できないという反対論の急先鋒になられました。面白い時代でしたね。
アジア研究のゼミ・学界の風景の変化:留学生の存在
川島 1980年代から90年代の時期に日本のアジア研究の「風景」には何か大きな変化がありましたか?
平野 90年代に入ると、大学のゼミにはかなりの数の留学生が混ざっていました。私がアジア政経学会で研究者としてのデビューをさせていただいた戦後初期には、留学生はほとんどいませんでした。もうアメリカの占領下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冷戦時代でしたし、アジアは激しく動いていましたが、それに直接触れる機会はまだなかったわけです。まとめていいますと、アジアとのコンタクトがある前のアジア研究のグループに私が入れていただいてい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れが70年代から変化を始めて、留学生、特にアジアからの留学生がゼミの中に混じってく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のが、今から振り返っても大きな変化だと思いますね。台湾出身の方々と朝鮮半島出身の方々は例外でしたが。他方、われわれの方も誰もまだ大陸に勉強しに行っていない、そういう時代ですね。
平野健一郎・東大名誉教授
平野健一郎・東大名誉教授
戦前以来のアジア研究の戦後との連続性
川島 戦前のアジア研究と戦後の日本のアジア研究との連続性、断絶性についてはどう見ていらっしゃいますか?
平野 私の場合はちょっと風変わりなところがあって、戦前日本の「アジア研究の学知」の影響を一番感じたのはJ. K. フェアバンク先生(※2)からだったと思います。日本人でない中国研究者が日本の戦前の学知を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をいわれていたという、今の方々に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環境に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当時、私は満洲事変の研究を一生懸命やろうと思っていて、それ以外に何もできなかったのですが、今振り返ってみると、その満洲研究を私が目指したことに、フェアバンク先生はある期待を持っておられたのだと思います。
アジア研究の方法論の模索というのは、ずっと続いていると思います。第二次世界大戦後の世界的な状況、一言でいえば、冷戦下の世界的な状況からアジアを学ぶ必要が大いに出て来たわけです。しかし、中国を中心に、アジアへ行ってアジアを学ぶ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状況がずっとありました。それだけに、中国でアジアを学ぶ、アジア研究の方法論を得られるかどうか、そういう点でおぼつかないところがずっとあ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考えると、現在の日本のアジア研究は、現在あり得るあり方をし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だと思います。
他方で、アジアへ行ってアジアを学ぶ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状況の下で、日本が特殊で、かつ不可欠な地位を占めてきているというところがあります。それは、日本研究がアジア研究の中に含まれないという日本の特殊性という問題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を何とか乗り越えないといけないと思うのです。
冷戦終結後の30年をどう見るか:ウクライナの衝撃
川島 先生は、冷戦後の30年をどのように見ていらっしゃいますか?現在が「ポスト冷戦」という時期の終わりだという見方もあるようですが。
平野 そういうはっきりした観察が自分にはできません。けれども、ウクライナだけは、本当に今までの歴史は何だったのか。とりわけアジア研究を中心にして、アジアのあり方を考えてきた人間からすると、日本を筆頭にして、戦争の反省に基づいて新しい歴史を作ろうとしてきた中身をまったく無視したような逆行現象なわけです。それで言葉も出なくなってしまうのです。たとえばアジアの現実をある程度踏まえながら、文化の多元性という見方をしようと提案してきた立場からすると、やはりアジアには共通のものと、それぞれの地域や時代の特徴がある多文化性とが重層をなしているところがあります。一言でいえば、これは素晴らしいことだと思うのです。それが、留学生が日本に集まってくる一つの誘因でも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
国際文化交流・国際援助の意味
川島 先生は国際文化交流研究の第一人者でもいらっしゃいます。これまで多くの国際交流や国際援助が重ねられながらも、今回のような事態が生じてしまいました。
平野 多少とも国際交流を実践した人間として申し上げると、今の世界情勢の残念なところは、日本の国際交流活動が問題を解決できなかった、穴を埋められなかったからではないかという反省があります。それはロシアの知識人を一部でもいいから友人に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日本研究をやるロシア人は昔からいるのです。ちょっとユニークな方々なのですが、能力がすごくあって、日本人もやらないような日本研究をやっているような人がいるわけです。そういう人と手を結んでいたら、少しは違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ウクライナについて、歴史に逆行するこの動きを予防できなかったというのが、アジア研究をやりながら、国際交流の重要性に気がついたつもりだった自分の反省点です。何も語る言葉がないというのが反省ですね。
また、1989年に日本は世界最大のODA供与国になりました。ですが、当時学会で議論していたことは、国際援助としての国際協力であること、国際援助の目的を明確化する必要があるということを反映したものものであったと思います。なぜ国際援助をするのか。目的の明確化の努力はあったが、その努力はまとま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
私は、その頃から国際文化論の方向にはっきりと転換しています。私は国際協力とか国際援助を各国の国家政府だけが自国の国益のために仕掛けるような、そういう状態のままに進めたのではまず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国家間の競争の場としてではなくて、それぞれの社会が持っている文化の普遍性と多様性を上手に使った新しい国づくりのようなきっかけにできると良い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そのためには一つの場所、一つの時間を一国が占有するというように持っていくのではなく、重なり合って、協力したり、競ったりするという、そういう国際協力のあり方はないのだろうかと考えたときに、文化だったらそれができると考えたのです。重なり合っても他を排斥しないわけです。というわけで、国際協力論を技術移転論として展開することを試みようとしたのが国際文化論への転進の一つの理由だったのです。
政治力や軍事力の方が文化力を補佐役としてしか捉えない、というのではなくて、それとは異なる文化振興論というのがありう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やっぱりソフトパワーだ」といってしまうのもわかりやすいことはわかりやすいでしょうが、政治力や軍事力の補佐役に終わらせるのではない文化の位置づけが、文化の独自の力を発揮させ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局面が見つか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聞き手の川島真・東大大学院教授(左)と平野健一郎氏
聞き手の川島真・東大大学院教授(左)と平野健一郎氏
1990年代の中国
川島 1990 年代のことを考える際にやはり中国のことが重要になると思います。先生はどのようにその頃の中国を見ておられましたか。
平野 中国の大国化の兆しを、私なりにはっきりと経験したことは珍しくよく覚えています。96 年でしたか、中国と台湾との間の3回目の危機が生じ(第三次台湾海峡危機)、中国が最終的に引きました。あの瞬間を非常に意味深く思っています。あのときは現在のようでは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が、現在につながるような中国の変化があ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も思いましたし、同じようなことが続いて起こ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も思いました。
それに、遅ればせながら、台湾が大好きになった瞬間でもあったのです。やっぱり中国は大きすぎます。しかし、その大きな清朝が賢い振る舞いをしたこともあったという歴史もありました。たとえばですが、東洋文庫の蔵書を見ながらそういう中国の歴史を察していただく、そういう文化の働きというのはありうると思います。
振り返ってみての後知恵なのですが、そもそも私が研究者を志した、満洲研究、満洲国研究の中に、実は文化の重層性というものが最初から隠れているわけです。そのことは、表面的には、日本が自国の利益のためだけに傀儡政権を構想するというところに表れたわけですし、「五族協和」を満洲国のモティーフにせざるを得なかったわけですが、満洲というところがそうした基盤を持っていた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中国を筆頭に、アジアの社会は、複数の次元上でいろいろな地域(部分)に同時に切り分けられる、そういう可塑性といいますか、可能性を持っていて、それを我々は文化の重層性と呼ぶことに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インタビューは、2022 年9月1日、東京・虎ノ門のnippon.com で実施した。また、『アジア研究』(69巻2号、2023年4月)にインタビュー記録の全体が掲載されている。
バナー写真:1989年6月2日、中国当局による武力介入が起きる直前の北京の天安門広場=中国・北京(AFP=時事)
(※1) ^ 渡辺利夫(1939-)は、東京工業大学名誉教授、拓殖大学顧問。1985年に刊行された『成長のアジア 停滞のアジア』(東洋経済新報社 1985年/講談社学術文庫 2002年)は、「停滞するアジア」というイメージに疑義を呈した。
(※2) ^ John King Fairbank(1907-1991)は、冷戦期のアメリカを代表する中国研究者。ハーバード大学教授。主に19世紀後半の清朝の対外関係史を専門と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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