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송가’ 탄생 200주년
1824년, 그러니까 200년 전 세계 음악의 수도 빈(Wien)의 봄 이야기입니다. 정원에서 들판에서 아름다운 봄꽃들이 피어나던 무렵이지요. 노년의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이 새 교향곡 발표를 준비한다는 소문도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지며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7번과 8번 교향곡을 작곡한 지 10년이 넘은 때였습니다.
1820년 요제프 칼 슈틸러가 그린 베토벤 초상화
1792년 스물두 살 젊은이로 빈에 정착한 이래 베토벤은 여덟 개의 교향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빈 청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대가의 대작에 쏠리는 관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요. 극장들 사이에는 벌써 새 교향곡의 초연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뜻밖에 또 다른 소식이 빈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베토벤의 새 교향곡이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빈의 관심이 이탈리아풍의 음악에 쏠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베토벤 자신이 독일 본(Bonn) 태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오랜 세월 빈에서 활동하며 음악의 대성을 이룬 그가 빈이 아닌, 베를린을 선택하다니. 빈 청중이 고루해서 그의 음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가. 빈 음악계로서는 거의 모욕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빈의 음악가, 시인 등 30명이 베토벤을 열정적으로 설득하는 공개서한을 띄웠습니다. "귀하의 이름과 창조물은 예술에 공감하는 동시대 모든 인류와 모든 나라의 것이지만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오스트리아 3화음(triad)’를 완성하는 것이 귀하의 예술적 의무다. 빈에 참되고 아름다운 것의 새로운 권위를 확립해 달라.” 편지에 감동한 베토벤의 동의로 새 교향곡 초연은 그해, 1824년 5월 7일 빈 케른트너토르 극장(Kaerntnertor Theater)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올해는 그러니까 혁명적 양식, 놀라운 악상에 확고한 메시지를 담은, 시공을 초월하는 베토벤의 걸작 교향곡 9번 D단조가 발표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새삼스레 9번 교향곡을 떠올리는 이유는 최근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이 음악 초연의 뒷이야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공연 계획을 취소하고 공연장을 바꾸는 변덕… 베토벤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 극장 측은 귀먹은 그에게 지휘봉을 들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 지휘자로 선임된 미하엘 움라우프(Michael Umlauf)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게 베토벤의 지휘를 무시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연주가 끝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는데도 베토벤이 여전히 두 팔을 휘두르자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가 그의 소매를 끌어 청중석을 돌아보게 했다. 화산이 폭발하듯 거듭되는 격렬한 청중의 호응에 위험을 느낀 경찰이 마침내 “조용히 하라”며 제지에 나섰다 등등.
1962년 도이체 그라마폰이 발매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집 표지
베토벤이 9번 교향곡 4악장에 실은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는 자유에 대한 찬가이며, 세계 인류의 평화와 형제애를 희구하는 노래입니다. "모든 인류는 형제가 되리라!(Alle Menschen werden Brueder!)" 유럽 전역에 혁명의 기운이 흘러넘치던 시절 십대의 베토벤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이 가득 밴 프리드리히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1.10~1805.5.9)의 시에 심취했습니다. 열다섯 때 처음 접한 ‘환희의 송가’를 가슴에 새기며, 언젠가는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지요.
베토벤의 자필
잘 알려진 것처럼 베토벤의 일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버지의 욕심에 의한 가혹한 음악 교육, 어머니의 너무 이른 죽음, 조카 양육권을 둘러싼 법정 다툼,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귓병, 청력을 상실한 음악가로서의 절망... 서른한 살 되던 해 휴양 중이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두 동생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까지 헸습니다. 전제정치의 암울함, 새 시대를 갈망하는 혁명과 전쟁이 범벅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심신의 질곡과 고난 속에서 베토벤은 20여 년 전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소생시켜 마침내 자유와 평화, 인류애를 노래하는 위대한 음악을 완성했습니다. 그로부터 ‘환희의 송가’는 인류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단체, 행사의 주제가가 되었지요.
유럽공동체 시절부터 회원국들의 평화와 결속을 다짐하며 주요 행사에서 ‘환희의 송가’를 연주해온 유럽연합(EU)은 1985년 이를 공식 찬가로 채택했습니다.
독일은 동서 분단시대이던 1956년 멜버른 대회서부터 1964년 도쿄 대회까지 총 6회 하계 및 동계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하며 ‘환희의 송가’를 국가로 사용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 독일을 기원하며 장벽 양쪽에 나뉘어 살았던 음악가들을 모아 9번 교향곡을 연주했지요. 특히 4악장의 합창에서 ‘환희(Freude)’를 원래 실러가 의도했던 대로 ‘자유(Freiheit)’로 바꾸어 노래해 더욱 뜻깊은 연주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2006년 이스라엘과 아랍의 젊은 음악가들로 창단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중동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하면서.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200년이나 지난 지금 왜 우리는 아직도 ‘환희의 송가’를 갈망하는가?(Why We Still Want to Hear the ‘Ode to Joy,’ 200 Years Later?) 9번 교향곡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뉴욕타임스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지구촌에는 오늘도 여전히 총성이 울리고 포연이 피어오릅니다. 아이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습니다. 어머니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은 인간의 숙명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겠지요.
*1989년 번스타인 지휘 베를린 연주 광경
https://www.youtube.com/watch?v=VMyFBXUILAM
https://youtu.be/Jg3sEE18WsE?si=39yuJ6cn1qB1Wj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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