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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선민 회복
겔 36:16-27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16-27 /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까닭]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17) `너 사람아,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옛날 고국에 살면서 온갖 흉악한 행실로 그 땅을 더럽혀 놓았다. 그들의 행실이 얼마나 더럽고 부정한지, 내가 보기에는 마치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해 보였다. 18) 그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그 땅을 더럽히고, 온갖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섬김으로써 그 땅을 욕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무서운 분노를 쏟아 부었다. 19)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어 세계 만민 속에 헤쳐 놓고 세상의 모든 나라에 흩어져 살게 만들었다. 그들이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 나도 형벌을 내렸던 것이다. 20) 그러자 그들은 세계 만민 속에 흩어져 살며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어디에서나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지만 저들이 나라를 빼앗길 때에도 여호와는 막아주지 못하였다!' 하고 흉을 보게 만들었다. 21) 이처럼 내 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나만 더욱더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내 거룩한 이름이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내 거룩한 이름 때문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다시 고국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너희들의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다. 너희가 어디를 가나 더럽혀 놓은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23) 세계 만민이 나의 위대한 이름을 다시 존숭(尊崇)하도록 내가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일을 보고 내가 여호와인 줄을 세계 만민이 깨닫게 만들겠다. 24) 이제 나는 너희를 세계 만민 속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다시 옛 고향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런 다음에 너희 몸에 정한 물을 뿌려 그동안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더러워진 오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26) 너희 속에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넣어 주겠다. 너희 가슴속에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들어내고 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내가 이렇게 내 영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놓아 너희가 내 뜻에 따라 생활하고 내가 준 모든 계명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겠다.
이스라엘이 심판 받게 된 원인과 회복시키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16-21) 이스라엘 족속이 심판을 받게 된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고국 땅에 있을 때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다”(17) 말씀하시며, 그 죄를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17)에 비유하십니다(레 15:19-24; 17:11).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에 대해서 지적하는데 먼저는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라고 말합니다(18). 폭력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악행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우상들로 자신들을 더럽혔다”(18) 말하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로 약속의 땅을 우상의 피로 더럽혔다는 의미입니다. 십계명 중에 살인은 사람에 대한 가장 악한 죄이고,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죄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이러한 죄악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행위대로 심판하셔서 각국에 흩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19).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러 나라에 흩어진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스라엘 때문에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20). 고대근동의 문화에서 살던 땅을 떠난다는 것은 곧 그 땅의 신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버려진 자들이라 생각했고(20),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조차 못 지키는 무능한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말씀하십니다(21).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23)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22). 이스라엘이 회복될 만한 자격이 있거나,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23).
내가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라(24-27) 이스라엘의 영적회복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로운 마음’, ‘새 영’,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맑은 물’이라는 단어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개혁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스라엘의 더러운 것과 우상 숭배는 그들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구원은 자격이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있습니까?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어떤 사람이 다니엘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국 역사상 훌륭한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인 웹스터는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입니다.”
< 설 교 >
거룩으로의 회복
겔 36:22-31 / 조정헌 목사
어떤 분이 꿈속에서 천국을 갔는데 천사가 자기 앞에 큰 책을 갖다 놓아서 무슨 책이냐? 라고 물었더니 “이 책은 당신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첫 장을 펴서 보니까 작은 글씨로 가득 쓰여져 있는데 무슨 글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물어보니 “당신이 세상에 사는 동안 행동으로 지은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내가 세상에서 참 많은 죄를 지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장을 펴보니까 거기에는 첫 장보다 더 작은 글씨로 가득 쓰여져 있어서 또 천사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당신이 말로 지은 죄를 다 기록해둔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로도 죄를 많이 지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세 번째 장을 펴보니 두 번째 장보다 더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어져 있는데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당신이 마음으로 지은 죄를 다 기록해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장을 더 넘겨보니까 거기에 글자는 없고 아예 새까맣게 보여서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입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만큼 변덕스럽고 죄를 짓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17:9절에도 보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5:19절에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새까만 마음을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18세기 독일의 유명한 조각가인 요한 하인리히 다네커가 있습니다. 주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많은 조각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의 절정기에 주님과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멋진 예수님 상을 조각하기를 원했습니다. 2년 동안 작업한 후에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을 받기 위해서 한 어린 소녀에게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그 조각상이 예수님인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실망한 그는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6년에 걸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소녀에게 보여주었더니 단번에 “예수님이시군요.”라는 대답을 듣고 그 때서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후에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비너스상을 조각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그때 다네커는 “예수님을 조각한 이 손으로 이방 신상을 조각함으로 내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가 세상의 명예와 권세 앞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모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사랑, 나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명예나 부귀영화를 좇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게 됩니다.
거룩의 반대 개념은 세속입니다. 세속의 속성은 혼합입니다. 화려함이고 쾌락이고 인기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거룩의 속성은 구별입니다. 거룩은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새롭고, 또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의 가치와 방식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오직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믿음의 성도들은 언제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이 불의해질수록 더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세세토록 받으실 분이십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바로 택함 받은 주의 백성들 즉 성도들을 통해서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또한 성자(saint)라는 뜻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성자이십니다.” 좀 부담스러운가요? 하지만 조금도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값주고 사신 거룩한 자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탄이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도 우리는 변함없이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을 더 추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했습니다.
먼저는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입으라고 했습니다. 뭘 벗어버리라고 했습니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뭘 입으라고 했습니까?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교회도 역시 거룩한 곳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입니다. 교회는 거룩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이런 거룩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거룩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거룩으로 충만해야 될 교회마저도 이미 세속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을 상실하면 더 이상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으로의 회복이 바로 교회의 부흥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힘은 바로 거룩입니다. 순결이고 깨끗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거룩한 교회를 통해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순결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이 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십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그들이 우상숭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을 상실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럽혀진 자신의 이름을 다시 회복시키시겠고 말씀하십니다. 더럽혀진 땅을 다시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선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다시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탕자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 패역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통해서 더렵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어서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영원토록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패역한 시대에 거룩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해져야 합니다.
2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여기서 ‘맑은 물을 뿌린다’고 하는 말은 정결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세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맑은 물은 곧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으로 섬김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죄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자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성철 스님을 잘 압니다. 12년 동안 누워서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하신 분입니다. 고기 한번 드시지 않고, 솔잎을 뜯어먹고, 채식만 했습니다. 수많은 불자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열반송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죄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성철스님이 죄가 수미산보다 커서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면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보혈의 능력입니다.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깨끗한 음식을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말씀을 들어도 한낱 세상의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손이 짧아서 우리를 못 건져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59:1-2)
시편 24편 3-4절에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설 수 있습니까? 손이 깨끗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고 거짓맹세치 아니하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와 허물을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사람만이 은혜의 보좌 앞에 그것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큰 돌멩이를 물에 던지면 가라앉지만 작은 모래를 물에 던져도 가라앉습니다. 우리는 큰 죄, 작은 죄를 따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도토리 키 재기와 똑같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스라엘 요단강에서 물을 한 병 가지고 와서 세례를 베풀 때 그 물을 사용한 것을 자랑하셨는데 거기 물이나 여기 물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여기서 물은 그 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또 하나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26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초신자가 교회 와서 은혜를 받을 때 새롭게 태어나는데 반드시 똑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 왜 자꾸 나를 두고 설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나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았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어보니까 나에게 안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만 보고 설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건강할 때에는 피부에 알코올을 바르면 시원해집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마음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상처난 곳에 알코올을 바르면 굉장히 쓰리고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문제가 있을 때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따가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말씀을 통해서 깨끗해지고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심령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축복해주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축복을 받을 깨끗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냥 대충 시간만 보내다가 돌아가지 마시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심령이 깨끗해지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반드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라도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아직도 내 안에 해결되지 못한 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십자가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의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 심령에 또 우리 교회 안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야 됩니다.
2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새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이 죄로 인해 더러워졌습니다. 악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쌓인 악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거룩해보여도 마음이 부패해지면 악취가 납니다.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반드시 들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회개도 하고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메마른 땅에 씨를 뿌렸다고 싹이 납니까? 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그 위에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셔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온갖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하게 되었으면 다시 성령으로 채워야합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욕망을 끊임없이 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공(空)’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해탈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입니다. 뭘로 채웁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이 새로워지면 인격이 새로워지고, 인격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라고 했습니다. 행동이 달라지면 생활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면 운명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살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이 좋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는 환경보다도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님이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새 마음은 곧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1) 부드러운 마음은 새순과 같은 마음입니다. 새순이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새순처럼 부드러워야 쑥쑥 자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지도 않으면서 나는 10년 믿었다, 20년 믿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나무가 10년, 20년 동안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속이 썩어서 고목나무가 됩니다.
2)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아이들은 부드러워서 어디에서 떨어져도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조금만 잘못하면 뼈가 부러지고 다칩니다. 왜냐하면 굳어져서 그런 겁니다.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 부드러운 마음은 융통성이 있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이 사람에게도 잘 맞춰주고 저 사람에게도 잘 맞춰줍니다. 어디를 가든지 변화에 적응을 잘 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넣으면 터지지만 새부대에 넣으면 터지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마음이 늘어났다 줄었다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잘못한 것도 용서해 주고, 다른 사람의 권고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마음입니다.
4) 부드러운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데 상처 주는 것 보셨습니까? 사랑하면 상처받을 일이 없고 오히려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돌맹이처럼 단단해서 상처를 많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마음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을 다 걷어내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말씀을 붙들고 자신과 싸워서 돌멩이 같이 단단한 마음을 다 걷어내야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5) 부드러운 마음은 조화를 이루는 마음입니다. 이솝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못에 여러 곤충들이 살고 있는데 연못 주인이 여행을 갔습니다. 가기 전에 연못의 관리자로 물방귀에게 관리를 하게 했습니다.
물방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주인은 없고 자기가 잠시 주인이 되어 평소에 미운털 박혔던 곤충들을 다 소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개구리였습니다. 하도 시끄럽게 하니까 개구리를 소탕했습니다. 그 다음은 물뱀... 이렇게 다 소탕하고 나니까 연못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주인이 오면 나를 칭찬해주겠지. 하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오더니 야단이 났습니다. “이놈아! 생동감이 넘치는 연못이었는데 네가 이 연못을 죽음의 연못으로 만들었구나!”라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같이 밀고 끌어당기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주장할 때에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갈 5:16에 보면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에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게 됩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 한 번 비추어 보십시오. 나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을 좇아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의 사람으로 날마다 살아가야 합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듯이 성령의 사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안에 아직도 이런 성령의 열매들이 없다면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갈5:24)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될 때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모해야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의 출발점은 바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런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요 17:17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풍랑도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나침반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촉매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리를 좇아가면 거룩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좇아가면 죄와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고백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추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을 다시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을 회복할 때에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28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29절에서는 모든 더러운 곳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황폐한 땅을 기름지게 하셔서 땅의 소산을 풍성하게 해주십니다.(29,34절) 무너진 성벽을 재건해서 떠난 백성들이 돌아오게 해주십니다.(35-36절) 황무한 땅을 에덴동산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는 날개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 날개로 인해 하늘을 날게 됩니다. 배는 돛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 돛으로 인해 항해를 하게 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는 새의 날개와 같고 배의 돛과 같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4)
마지막 때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거룩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한 절망을 깨달을 때에 거룩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처절하게 부서진 마음을 부둥켜안고 6명의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닷가로 돌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만 하고 있는 그런 절망의 밤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랑의 식탁을 준비해놓으시고 거기로 초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가 완전히 부서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다시 응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의 자리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의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나 섬김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예배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는 것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찬양하면서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거룩이 다시 회복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주님! 이 시간 나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나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나에게 정한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함께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며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마음의 축복
에스겔 36장 22-31 / 이영훈 목사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심이었고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당 시대 세계 최대 강대국의 손에서 수백만의 백성들이 노예의 사슬을 끊고 구원을 받은 일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어서 새 나라를 이룬 일이 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그리고 새 나라를 건설한 일은 참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며 준비하지도 못한 일이 그들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롭고 위대하신 손길은 어리석고 부패하고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하시고 조상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을 자손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주어 새 언약의 세계에 정착하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상들이 정착한 땅은 좋은 땅이었고 거룩한 땅이었으며 하나님의 눈이 머물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 즉 그들의 악한 행위로 땅을 더럽히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는 그들의 땅을 더럽히고 그 땅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게 만들고 자기들에게는 불쾌한 땅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들 상호간에도 경건한 교제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더럽혀진 것은 사용이 불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의 행위가 생리기간 중의 여인의 부정함 같았습니다. 생리 중의 여인은 지성소 출입이 금지되었고, 그 여인이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사법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 15:19). 죄악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가증스런 것이며 차마 볼 수가 없는 대상입니다. 그들은 피를 쏟았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땅은 더러워 졌습니다(18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고 땅은 그 주인을 역겨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열국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흩어진 열국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나 자기들의 신앙 고백을 빛내지 못하고 도리어 거하는 땅을 더럽히므로 이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고통과 긴 한숨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맘을 전합니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약속의 땅을 더럽히므로 심판하여 열국에 흩어 놓으니 이제는 가는 곳마다 동일한 행동을 하고 이방인의 비방 거리가 되는 구나. 열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게 하였으니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제 자리에 놓으시기 위하여 그 백성을 다시 옛 언약의 땅으로 모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맑은 물을 뿌려 정결케 하되 곧 너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고 백성들과 언약을 갱신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열조에게 준 땅에 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의 실과와 땅의 소산을 풍성케 하시므로 열국에서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우리들 모두를 설레게 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롭고 자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러워진 이름까닭에 스스로 일어 나셔서 우리를 불러 모으시고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은 어떤 특징이 있겠습니까?
첫째, 불의와 죄에 대하여 민감해 질것입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도 못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아니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새 마음을 얻은 성도들은 지극히 작은 허물과 죄라도 꺼리 끼는 것이 될 것이며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상상에 잠기고 잠시라도 정욕에 사로잡힐 때면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리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마음은 “주님! 내가 미혹된다면 그 순간에 책망해 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슬프게 해드린 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간구하듯 의인의 책망을 은혜로 알고 무뎌진 마음이 아니 되기를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부드럽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지니고 온 마음은 더럽고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반항적이며 세속적이어서 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모든 일에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폭군과도 같고 무쇠 같이 냉랭했습니다. 그러나 새 마음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끌려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드럽게 순종한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개로 취급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한번도 처해보지 못한 모욕을 당한 여인의 이야기 입니다. 여인은 예수께 “옳습니다. 아멘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아멘 옳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새 마음입니다.
셋째, 모두에게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애정에 찬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사방이 다 차디찬 냉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두가 완고하고 이기적이고 냉정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새 마음은 그 자체가 따뜻합니다. 성경에 도르가 라고도 불리는 ‘다비다’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소개되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다비다’는 병이 들어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씻어서 다락방에 두었습니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도르가’의 집에 가게 되었고 많은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랑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었는가를 말하며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도르가’는 한없이 따듯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애정에 찬 부드러운 여인을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넷째, 새 마음은 성결한 마음이며 하나님은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유행을 했던 노래 가운데 하 덕규 집사의 노래 ‘가시나무’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비유하시면서 우리 마음이 자갈밭과도 같고 가시밭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다가가시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새 영을 부어 주시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된 마음의 특권입니다. 새 마음에 성령님이 거하시고 우리 주님이 쉴 곳이 될 것입니다. 모든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고 모든 축복이 거기에 부어질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입니까. 주님을 만나려고 하늘에 올라가야 합니까? 바다 끝에 찾아 가야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우리의 새 마음에 건설이 되고 사신 주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축복을 지키지 못하고 그 땅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이스라엘을 열국에 흩어 놓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일어나신 것입니다. 열방가운데서 더러워진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 백성을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의지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새 영을 부어 주시므로 새 마음을 얻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결한 마음, 새 마음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에 눈을 뜨기를 바랍니다. 새 마음의 축복이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거듭난 증거는 무엇인가?
겔 36:22-28 / 백구영 목사
■ 어느 이발조합에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용사가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을 널리 홍보하기 위한 대회였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거지를 데려다가 그 추한 모습을 사진 찍고 다음에는 목욕을 시키고 말끔히 이발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모습을 사진 찍어 "새 사람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제목이 붙은 광고지를 만들어 전시를 했습니다. 대회는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모델이 되었던 거지를 다시 거리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호텔의 벨 보이로 취직을 시켜주고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궁금하게 여기면서 수소문해 그 거지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걸인은 어느 뒷골목 쓰레기통 곁에서 술에 만취되어 자고 있었습니다. 조합원들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인사불성으로 냄새만 풍기며 코를 골면서 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일화입니다. 이렇듯, 목욕을 시키고 이발을 시켜 새 옷을 입혔다 해서 사람은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높고 인격적 수양을 쌓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새롭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불행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중생"이 주제인 말씀입니다.
에스겔 36:22-28절의 말씀은 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방 문물에 맛을 드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새 꿈을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 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하시면서 그들이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신을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면 부득이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 3:1-8절의 말씀은 주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유대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께 찾아와 호의를 보이면서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니고데모를 향하여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살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관원에게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시면서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아라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름같이 성령으로 난자는 다시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듭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위의 두 본문 가운데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생의 표적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중생의 표적은 청결함입니다.
에스겔 36:25절에 보면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하셨고 요한 3:5 하반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물은 성결케 씻는 상징으로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3:21절에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청결할 수가 없습니다. 물로 씻음을 받을 때만 청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을 때만 비로소 용서받은 의인 즉 의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옷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늘 새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원죄를 단번에 사하셔서 영원히 원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셨으나 자범죄는 새옷으로 갈아입을 은혜의 보좌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회개의 길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합리화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적은 과실도 큰 죄로 여기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물로 씻어 청결함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죠지 워싱턴의 어릴 때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죠지 워싱턴이 새총을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아버지가 아끼는 오리 한 마리가 맞아 죽었습니다.
워싱턴은 허겁지겁 땅에 묻었으나 이때 하녀가 이 모습을 보고 싱긋 웃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워싱턴은 아버지가 무섭고 하녀의 얼굴이 무서워 피해 다녔습니다.
그는 불안한 몇 일을 지내다가 용기를 내 아버지께 자백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뜻밖에 웃으시면서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란다" 하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워싱턴은 아버지도 하녀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청결은 도덕적 의가 아니라 용서받은 의요,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첫째 증거입니다. 이 증거가 있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둘째, 중생의 표적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에스겔 36:26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체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굳은 마음" 다시 말해서 "강팍한 마음"은 불신과 거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3:15절에 보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는 시편 95편 11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즐겁고 기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만이 나를 변화시키고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영치입니다.
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음치가 있듯 영을 분별 못하는 이는 영치인 것입니다.
다음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듣고 깨닫기는 하나 순종하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순종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힘있게 증거 하게 됩니다. 늘 기도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기쁘게 살게 됩니다. 나쁜 버릇이 고쳐집니다. 자기를 조정하고 절제하게 됩니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영적 가치를 우선하게 됩니다.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영적 설득력과 영향력이 생깁니다. 반대 의견도 너그럽게 수용하게 됩니다. 믿음의 동반자들이 생깁니다.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고 유익하게 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게 됩니다. 유연하면서도 강직한 끈기를 갖게 됩니다. 마음의 원한을 품지 않게 됩니다. 모든 면에 낙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순종의 기쁨과 복종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의 표적입니다.
셋째, 중생의 표적은 규례를 행하게 됩니다.
겔 36:27절에 보면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하셨습니다.
여기 "내 규례"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칙과 의식을 말합니다. 계명을 위시한 교회 안에 모든 규칙과 의식은 그 자체가 중요 하다기 보다 "내 규례" 즉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2:50절에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진부하게 느껴져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것은 그 어떤 새 지식, 새가치를 따름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상급을 얻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은 21세기를 달리는데 교회는 17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외면적 모습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프리스턴 종교 연구소가 미국내의 큰 조직체 열 종류를 채택하여 그것들에 대한 국민의 신빙도를 전국적으로 조사한 일이 있습니다.
무려 11년간 7회에 걸쳐 대상자를 달리하여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국민이 가장 믿고 있는 조직체가 64%가 교회이며 2위로 58%가 군대이며 3위가 은행, 4위가 대법원, 5위가 공립학교 6위가 신문 7위가 노동조합 8위가 의회 9위가 대기업 그리고 10위가 텔레비전이였습니다.
미국국민이 다른 조직체들보다 그래도 교회를 더 신뢰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의회나 노조나 은행이나 학교나 기업체나 메스컴도 신용을 중요시하고 있는 기관이나 그들은 역시 자신의 요구와 가치판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교회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가치와 규범에 행동기준을 두는 기관이므로 비록 부분적인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신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생의 표적은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므로 교회에 대한 이 신뢰를 높여 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헨리 포스틱 목사는 교인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심미적 그리스도인과 윤리적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미적 그리스도인은 예배와 설교와 말씀을 통해 신앙의 아름다움과 신비한 감상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고 윤리적 그리스도인은 예배와 설교와 말씀을 통해 책임을 이행하는 그리스도인이라 했습니다.
중생의 표적은 심미적 그리스도인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윤리적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
청결케 하시고 순종케 하시고 규례를 행케 하시는 주의 영을 따라 날마다 자라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새 영 새 마음
겔 26:22-31 / 유관지 목사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에스겔서는 다 읽으셨겠지만 그 앞부분은 내용이 대단히 무겁습니다.
“패역한 족속,” “반역,” 이런 말들이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 이야기, 이스라엘의 끝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분노를 쏟으신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불에 던질 땔감과 같이 될 것이다, 이런 말씀들이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뒷부분에 와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34장에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 화평의 언약을 맺는다, 우리가 평안히 거한다, 복된 소낙비를 내려주신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36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받을 복들이 집중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37장에는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이 나옵니다.
39장부터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과 절기와 예배가 회복되어 새롭게됩니다.
47장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전 세계로 흘러내리며 생명 역사를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끝 장인 48장에는 거룩한 새 땅의 경계 이야기가 나오고 그곳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라고 불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겔서는 이와 같이 뒤로 갈수록 좋아지고, 특히 끝이 아주 좋은 성경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2003년이 에스겔서와 같이 끝이 좋기를, 끝으로 가면서 더욱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남은 시간들이 특별히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은 어렵더라도 나중이 좋은 것은 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칭찬하지요. “사람마다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2:10)라고 칭찬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갈수록 좋아지고 즐거워지는 삶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앞부분에서는 환난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끝이 결정적으로 좋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분량이 많은 이사야서는 앞부분에서는 심판을 강조합니다.
날카로운 채찍을 맞는 것 같습니다.
뒷부분에 와서는 위로의 메시지가 넘칩니다. 봄바람이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습니다.
끝부분에 와서는 밝은 비전을 제시하면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0장에 이르러서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 나타날 것을 말하고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예언을 합니다.
그 다음에 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2004년 교회 표어가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많은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어떤 복들인지 살펴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복입니다.
23절 앞부분을 보세요.
여러 나라 가운데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그 다음에는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고국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약속이 있고 정결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풍성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9절과 30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너희를 모든 더운 땅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양심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악한 길과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 때문에 스스로 밉게 보게 될 것이라고 3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짧지는 않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은 본문인데 참 여러 가지 복이 약속되어 있지요. 이 복들이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특별히 이 연말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는 말을 설교 끝에 한 번 쓰는데 설교 앞 부분에서 이 말을 쓰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바란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복들이 성도 여러분에게 이 연말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나라도 이 복들을 받아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민족 가운데서 거룩해져야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하겠습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때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 TV 중계를 보는 우리 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놀라며 ‘한국이 이와 같이 발전한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이 이 놀라운 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열이 높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1991년에 러시아 로스토프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지금 로스토프교회, 비숄리 교회, 중국동포교회, 세 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왜 그곳에 러시아에 선교사를 보냈고 러시아의 많은 도시들 가운데에서도 로스토프라는 곳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로스토프의 고려인협회 회장이 88 서울 올림픽에 한국에 왔다가 한국의 부흥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은 한국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발전했나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은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지만 당시는 대학교수였습니다.
이 분은 ‘교회가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발전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로스토프의 고려인협회 회장인데 로스토프시가 복 받고 발전하려면 교회가 있어야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에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본격화되어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모스크바에 감리교회가 하나 세워졌습니다. 이 고려인협회 회장은 모스크바 연합 감리교회를 찾아가서 로스토프에도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것이 저희 교회와 연결되어 저희 교회가 로스토프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은 일입니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교회가 그토록 많은데 한국 사회가 왜 그렇게 혼란한가?’ 이렇게 물을 염려가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영광을 받아야하겠고 거룩해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져서 경제가 속히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사회는 악한 일, 좋지 못한 행위, 죄악, 가증한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악한 일, 죄악, 좋지 못한 행위, 죄악, 가증한 일들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양심을 맑게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여러 가지 복들 가운데 제일 큰 복은 무엇입니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 속에 두시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과 새 마음에 대칭되는 것은 낡은 영, 낡은 마음입니다.
에스겔서 2장 4절에 낡은 영, 낡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나오는데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라고 했습니다.
낡은 영, 낡은 마음은 나 중심의 사고를 말합니다.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말합니다.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세상 중심의 사고를 말합니다.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에스겔서 3장 7절에 낡은 영, 낡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나오는데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새 영 새 마음은 이웃 중심의 사고를 말합니다. 이타주의, 또는 박애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본주의라고 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변화되어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고 따라서 그 쪽을 바라보고 나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쪽을 가리키는 고장난 나침반을 가지고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쪽을 가리키는 바른 나침반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삶을 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26절 뒷부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굳은 마음은 돌과 같은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살과 같은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2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새롭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축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속에”라는 단어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26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27절)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것이 에스겔서 37장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뼈들에 대해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서 37장 6절입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기에도 “속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른 뼈들이 에스겔이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어날 때 소리가 나고 움직였습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살이 올랐습니다. 가죽이 덮였습니다.
이제 생명체로서 완성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겉은 완성되었는데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일어서기는 했지만 이 뼈는 아직도 “죽음을 당한 자”(겔 37:9)였습니다.
에스겔이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대언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 때 그들이 살아나서 일어섰습니다.
속이 새로워지는 것이 진정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속이 변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속이 생기로 채워지는 것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6절에서 맑은 물을 우리에게 뿌려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을 깨끗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속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좀 무리한 일들이 많았고 강압적인 면도 없지 않았지만 ‘잘 살아보세’ 하면서 새벽부터 일하던 일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우리 나라가 많이 변화되었는데 마무리가 잘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새마을 운동도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새 마음 운동이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새마을 운동 전체를 책임졌던 분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받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역사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는 않습니까?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우셨고 또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안 됩니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때도 삿갓이라도 뒤집어 놓고 있어야합니다.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을 그릇을 마련해야합니다.
아까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했는데 잔치하는 집 앞에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복된 소낙비가 내리면 그것을 받아 담아 두어야합니다.
복권에 당첨되는 것도 복된 일이기는 한데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담겨 보존되는 복은 아니고 금방 새어나가는 복입니다.
십일조는 바로 복된 소낙비가 새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신명기 11장 10절에서 12절 앞부분까지를 보면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애굽은 비가 내려도 그 비가 땅에 흡수되지 않고 바로 흘러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면 물을 다시 퍼 올려야하는 수고를 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축복의 땅인 팔레스타인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제주도 남쪽에 가면 마라도(馬羅島)라는 섬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국토의 최남단인데 많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고 관광객과 낚시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이 섬에는 지하수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서 사용합니다. 그곳 주민들은 이 물을 봉천수(奉川水)라고 부릅니다. ‘하늘을 받드는 물’ 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도에 가면 집집마다 커다란 물탱크가 있다. 이 물탱크가 없다면 야단이겠지요.
“하나님 제 속에 새 영을 두시고 새 마음을 주옵소서. 내가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기도가 새 영과 새 마음을 받는 손이 됩니다.
그리고 또 이 복을 담아 보관하는 그릇이 됩니다.
또 새 영과 새 마음을 잘 지키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동양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기쁘다’ ‘마음이 무겁다’ 합니다.
성서에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의지적인 면이 강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인데 여기에서 마음도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힘써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 속에 두실 때 우리는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는 새로운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받아야합니다.
대성전 공사를 하는데 지난 몇 주일 동안 방수 작업을 철저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벽돌을 쌓아야한답니다.
‘아, 방수 작업이 이와 같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알았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밖에서 더러운 것이 스며들어 오염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수제 역할을 합니다.
또 새 영과 새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28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 가나안에서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토의 회복, 고향의 회복을 말합니다.
더 중요한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만사가 회복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멀어진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없기를 바라지만 몸은 이 자리에 나와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분은 혹시 계시지 않습니까?
새 영과 새 마음을 달라고 간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축복의 약속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이 말씀은 귀환시대에 일차로 성취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유대교는 외형적인 면이 많은 종교였습니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굳은 마음의 종교였습니다.
기독교는 속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의 종교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종교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의 본보기로 삭개오를 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세리장을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삭개오는 아마도 세리장 생활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속여 빼았은 것을 돌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세리가 되었습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령강림절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인데 대림절은 바로 이런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 소망을 새롭게 하는 때입니다.
아까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로 끝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 영,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새 영,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 속에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새 영,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새롭게 하는 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 약속된 여러 가지 복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고 우리의 소출이 풍성해지고 양심이 회복되는 복이 바로 이 때에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기 바랍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달라고 우리 속에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받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 가운데 임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 소망을 새롭게 하며 기도하면서 대림절을 보내기를 약속을 성취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마음
겔 36:22-32 / 이중표 목사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최상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본다는 말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나 없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관계가 다 마음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 할 때도 부부의 마음이 하나면 함께 사는 것이지만 마음이 떠나 있으면 한 집에 살고 있으나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으면 산 예배고 하나님을 떠나서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죽은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저들은 그곳에서 탄식하면서 실향민의 슬픈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민이라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너희를 이렇게 그냥 두시겠느냐” 하고 조롱하면서 비웃고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림으로 이방 땅에서 시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다”(22-25절)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운 것은 외모가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는 마음, 타락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것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요”(2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받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세상적인 명예입니까 각각 다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담아주신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마음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구별됩니다. 인물이 좋다고 좋은 사람 아닙니다. 마음이 착해야 좋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는데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노예가 된 뒤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사탄의 무서운 악이 들어오면서 창조의 아름다운 마음이 상실되고 인간의 마음이 악해졌습니다. 더러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하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두지 않으면 인간은 악해져서 이와같이 온갖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을 받아야 되느냐? 예레미야 선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인간의 마음처럼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온갖 악한 것이 마음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더러운 것이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 한용운 선생은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민족이 암울할 때 철저하게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호적까지 없애고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한용운 선생에게 설법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전국의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지팡이를 들고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더러운 것은 몸에서 나가는 배설물이니라” 이 말을 한 후 조금 있다가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사람의 시체가 썩는 냄새니라” 또 조금 있다가 지팡이로 책상을 탁탁 치면서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중놈의 마음이니라”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주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새로운 영을 창조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올 때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정신, 예수 마음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속에 있는 타락한 마음을 다 버리고 주께서 주시는 마음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기 ‘새 영’은 히브리 말로 ‘j'Wr’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어넣은 생기를 말합니다. 내 속에 있는 굳은 마음, 돌같은 마음을 도려내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1. 하나님께 대하여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강팍한 마음, 돌같이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삼으시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신 것인데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주의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봄이 오면 겨울에 굳어졌던 나무들이 부드러워지면서 새 싹이 돋아나고 온 산천이 푸르러집니다. 이와같이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굳은 심령이 부드러워지면서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3-8)
‘길가’는 굳어진 마음입니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악습, 편견, 고집,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돌밭’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서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시들어버립니다.
‘옥토’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니까 말씀을 잘 받아서 인내하므로 열매를 맺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내 굳어진 마음을 녹여주시고 부드럽게 하십니다.
중국의 노자는 상창이라는 스승에게 도를 배웠습니다. 스승 상창이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자 노자가 스승을 찾아가서 “스승이시여,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창은 한참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입속에 이가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다시 상창이 노자에게 물었습니다. “내 혀는 있느냐” “혀는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혀가 남아 있는 것은 혀의 부드러움 때문이요, 이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 딱딱함 때문입니다.” “그렇지, 이는 혀를 물어뜯고, 입속을 상하게 하면서 단단하게 있었지만 다 빠져버렸지. 하지만 늘 물림을 당하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혀는 지금 이렇게 남아있지. 부드러움은 생명이고 단단한 것은 죽음이니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와 같으니라”
부드러운 마음은 새 마음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2. 사람에 대하여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강팍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외모는 굳어집니다. 뼈도 굳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은 새로워져야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오늘 자기 자신을 살펴 보십시오. 아내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남편인가? 아니면 퉁명스럽게 대하는 남편인가? 만약에 퉁명스러운 남편이라면 부드럽게 고치십시오. 자녀에게 강하게 대하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부드럽게 대하십시오. 좋은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
남녀가 처음에 만날 때는 인물을 보고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다보면 인물은 안보이고 성격만 보입니다. 아내가 성격이 사나우면 남편이 싫어합니다. 잘났어도 조금 모자란 척 하고 살아야지 남편 말끝마다 병아리가 모이 주워먹듯이 탁탁 말대꾸를 하면 정 떨어집니다. 사람이 조금 모자란 듯 해야 정이 갑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3. 자기 자신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부드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도 함께 영생해야 되니까 사납고, 독하고, 강한 사람이 들어오면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갈수록 자신을 온유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내 속에 있는 한, 억울함, 분노, 상처들을 성령의 불로 녹여야 합니다. 기도로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원수가 돌로 칠 때도 그는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러분이 직장, 가정, 사회 어느 곳에서나 환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께 새 마음을 주시되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 서로 사랑하며 어린 아이와 같은 부드러운 존재로 만들어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효자가 누구입니까? 효자나 불효자나 다 부모로부터 외모도 받고, 상속도 받고, 족보에도 오르지만 부모의 마음을 받은 자는 효자가 되고, 부모의 마음을 받지 못한 자는 불효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받으면 하나님의 효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받지 못하면 불효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받아 하늘을 보아도 하나님 생각, 땅을 보아도 하나님 생각, 그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이요, 행복입니다. 이 은혜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