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107]오수 그리고 오수사람 이야기
고향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고향이 없는 분들에게는 실례이지만) 왜 고향과 관련한 고랫적 이야기를 들으면 재밌어 하는 걸까? 아마도 자신들의 뿌리, 유식한 말로 ‘근원(根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 어제 고향(임실 오수)을 떠나신지 70년이 다 돼가는 선배님을 처음 만나, 고향에 대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2시간이나 신나고 유익하게 들었다. 그분은 오수 면소재지에서 한약방을 하시던 분의 둘째 아들로 1947년생. 13세에 초등학교(40회)를 졸업하고, 전주북중과 서울사대부고를 다닌, 부모님 잘 만난 덕분에 일찌감치 유학파였다. 총기(기억력)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어서 지도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준 60여년 전의 오수의 모습.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우리 동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소읍의 희로애락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더구나 국민핵교 5학년 때 전주로 유학을 하고 대학을 서울에서 다녔으니, 부모가 계시기에 자주 찾았을망정 알 턱이 없는 일투성이어서 재밌었다.
한 예로, 이제는 전설이 된 소재지의 ‘거리의 철학자’ ‘오빠꾸’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밌다. 오죽하면 오빠꾸 얼굴 사진을 찾아달라고 콜렉터(추억박물관 박재호)에게 신신당부를 했을까. 어제 들은 얘기 중 백미(白眉)는 그분의 아버지와 오빠꾸가 오수 금암리(그때는 남원 덕과면)에서 산서 봉서리까지 한밤중에 지름길로 산길을 가다 호랑이를 만났다는 것이다. 1945년, 아니면 46년까지 시골 야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데, 분명히 아버지로부터 들은 팩트라는데 믿을 수밖에. 지게에 실은 갈비짝 냄새를 맡고 쫒아온 새끼호랑이를 장정 두 명이 작대기 등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오빠꾸가 당신 집에서 밥도 자주 먹어서 화가라면 금세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얼굴이 선연하다고 한다. AI세상인 만큼 AI가 자신의 뇌를 스캔할 수 있다면 오빠꾸 얼굴이 복원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에 반신반의, 크게 웃기도 했다.
두 번째 얘기의 소재는 <신포집>이라는 개고기집이었다. 보신탕과 석쇠구이 소갈비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경상도와 서울에서도 먹으러 오는 맛집. 하필이면 ‘천 년 의견의 고장’인 오수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해마다 삼복지절엔 중앙 일간지에 가십으로 “의견의 고장에 보신탕이 웬말이냐?”며 가십기사로 씹히기도 했다. 성수천에서 내려오는 냇물 건너편(신포정이란 정자가 현재도 있다)에 있었다면 조금은 비난이 덜했을텐데, 원동산공원 의견상에서 100m도 떨어져 있으니 그런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가. 욕을 먹어도 쌌지만, 식도락가들은 맛 앞에서 그런 비난쯤이야 했다. 전주와 남원에도 아들과 딸이 분점을 차렸다던가. 지금도 전주 아중역앞에서는 영업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쉐프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시나브로 문을 닫게 된 것은 다행인 셈인가? 아무튼, 그 유명세가 철다리 아래 민물매운탕집과 함께 대단했다고 한다. 나는 그 두 집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이밖에도 할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한때 오수 상가를 석권한 <환천주조장>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다. 주인은 마산 출신으로, 주조장이 성황을 이룰 때에는 현금 보유율이 으뜸이었고, 종업원이 8명, 배달용 짐빠리가 즐비했고, 술통개를 좌우로 4개씩 싣고 페달을 굴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오수주조장과 합치면서 몰락하게 된 뒷이야기는 며느리의 불륜 때문이었을까. 명민하지 못한 아들들 탓이었을까. 오수주조장 주인인 심병국씨는 상인회 회장으로 오수개 의견설화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한 ‘일등공신’이라고 했다. “오수의 미래는 오수개를 팔아 먹고 사는 것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던가. 원동산에 공적비로 그 자취가 남아 있다.
한때 군 소재지에도 없던 상설극장이 있어 일대 주민들의 문화활동을 돕기도 했고, 이동서커스와 이동 활동사진 극장 이야기에 이르니 점점 더 흥미로워졌다. 우리는 옛날(191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50년 세월의 오수)의 영광과 번영 이야기에 이어, 탈농과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에 접어든 사연 등을 나누었다. 선배도 고향 이야기에 천착한 듯, 오늘날 5, 10, 15일로 시작되는 5일장이 맨처음 정착된 날을 정확히 알려줬다. 1932년 5월 15일이 현대식 5일장의 최초 개설일인데, 그렇게 된 배경까지 쉽게 설명해주었다. 나로선 행운의 만남, 귀인이 아닐 수 없었다. 머지 않아 <오수여지도>라는 특정지역 인문지리서를 펴낸다면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2시간 동안의 ‘지역특강’은 금세 지나갔다. 칼국수라도 한 그릇 사드리며 더 듣고 싶었으나, 솔녀(손녀)의 학원 마중을 나가야 하는 ‘주어진 미션’을 어찌 하랴. 아쉽게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 인근의 어느 학원에서 아직도 현역중인 오수중학교 졸업 친구를 만나 오후 지역특강 이야기를 해주니 귀를 바짝 기울이며 한두 마디 더 거드는 게 아닌가. 이래저래 이제껏 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살았던 고향의 이야기가 더욱 더 넘쳐났으면 좋겠다. 기록자에게 그만한 행운과 행복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