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1
1월2일[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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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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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S2HhtSpCqA
[서울대교구 김형균 스테파노(경찰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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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종종 교우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됩니다. 기분 좋은 내용도 참 많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주임 신부님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판박이입니다. 자상하고 편안하며, 늘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강론도 교우들 눈높이에 맞춰 정성껏 준비하시니,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졌습니다. 쥐구멍에도 해뜰 날이 있다더니,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던 우리 본당에도 이런 신부님이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듣고 있는 제가 다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어디 가면 치유나 예언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 계신다. 한번 같이 가보시겠느냐?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고 은혜를 입는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조금 알아보니, 우리 교회가 가장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은밀히 홍보를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고, 교묘히 뭔가를 요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 거짓 예언자들은 마치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잘못 빠져들어 갔다가는 독버섯 먹고 즉사하듯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니, 언제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벌인 세례 동은 당시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다른 거짓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원시원 거침없었으며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웠습니다. 때로 그 칼끝이 부패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할 때면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가 구린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아무리 뒷조사를 해봐도 티끌 한 점 구린 구석이 없었습니다. 청렴결백했고 그로 인해 당당했으며 부패한 권력자들 앞에서 꿇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세례를 통한 전 국민적인 정화 운동에 겁을 집어 먹은 유다 최고 의회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을 취조합니다. 취조 과정에서 놀랄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요?”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데, 세례자 요한은 펄쩍 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메시아가 아닐까, 의혹은 품는 것조차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도 꺼내기 전에, 비교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며 서둘러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종으로서의 충실함과 충직함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누구요?”라는 거듭된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힙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무나 겸손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의 위엄과 영광에 비하면 자신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나란 존재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벌써 모든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좀 더 각광받고 구세사의 무대 위에 완전히 자리 잡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감춥니다.
선구자로서, 예언자로서, 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거칠지만 소박하고 꾸밈없고 거짓 없는 세례자 요한의 삶 앞에 갖은 겉꾸밈으로 요란한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앞에 어떻게 해서든 한번 드러내 보이려고, 있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가식적인 삶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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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QqC3MLrx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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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기본기이고 그리스도는 목표다>
오늘 복음인 요한 1장 19-28절은 요한 세례자가 자신을 메시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겸손히 밝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길이며 기본이며, 예수님이 궁극적 목표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기본과 목표의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기본이 없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 기본은 회개이고 목표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녀 체력』의 저자인 이영미 작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건강을 돌보지 않아 삶이 무너졌던 경험을 공유합니다. 가족과 일의 부담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지면서 어느 것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깨닫고 체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마라톤과 사이클, 수영 등 철인 삼종 경기에서 보통 남성들을 이길 정도입니다. 그녀에게 체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족과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강화하니 마음도 따라오고, 목표가 달성 가능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원칙과도 일치합니다. 코헬렛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제때가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준비의 시기가 필요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기본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기본을 다져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9-22절에서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임무는 막대했지만, 그는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지시를 따라 하나하나 방주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준비 덕분에 방주는 폭풍을 견뎌내고 가족과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목자로서 기본을 다졌습니다. 사무엘기 상권 17장에서 골리앗과 맞설 때 다윗은 최신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어린 시절 길렀던 용기와 기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기본기를 통해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오 복음 7장 24-27절의 예수님 비유에서 현명한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나옵니다. 현명한 건축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육체적, 정서적 모든 영역에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다시 이영미 작가의 이야기를 돌아보면, 그녀는 기본을 간과했을 때 삶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깨달았습니다. 건강, 신앙, 관계 등에서 기본을 무시하면 불균형과 좌절을 겪게 됩니다. 세속의 지혜도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노자) 또는 “한 번의 예방은 열 번의 치료보다 낫다.”(벤저민 프랭클린)라는 말처럼, 기본적인 노력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서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성사를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기본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목표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삶은 이러한 훈련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언자로 존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말이다”(요한 1,23)라고 선언하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축구를 하면서 기본의 중요성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축구의 기본은 같은 팀과 협력하고, 공을 잃지 않고 패스하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구의 목표는 골을 넣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막상 경기에 들어서면 기본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골을 넣으려는 생각만 합니다. 그러면 경기당 한두 골은 넣을 수 있습니다. 실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기본기는 평소에 매일 다지는 것이고 실전에는 목표에 집중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막상 사람을 만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훈련된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아직은 멀었지만, 이렇게 사랑에 조금씩 프로가 되어 갑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합시다.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고 건강, 신앙, 관계의 기반을 다시 세우며 하느님의 계획을 위한 길을 준비합시다.
“기본을 알면 이미 전문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모르고 기본에만 집중하거나, 아니면 기본이 없는데 목표만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을 마스터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목표를 향해 나아갑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길도 준비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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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대림 특강 때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강사 신부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구약과 신약은 서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임을 강조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며, 원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원죄를 가져온 아담과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님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 드러납니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를 통해 악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례 성사는 물로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방주는 구원을 위한 예표이며, 세례는 그 예표가 성취된 사건임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자리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 일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영광과 찬미는 하느님께 돌리면 좋겠습니다. 수고와 노력은 나의 몫으로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2025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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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몫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이 이러하였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백성들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살아갔던 분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그분을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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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대 바실리오 성인과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우정과 신앙 안에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한 평생지기입니다.
바실리오는 당대 최고의 교육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테네에서 공부한 뒤 수사학 교사로 크게 성공합니다. 세상의 명성에 취하였던 그는, 누이 마크리나의 도움으로 깨우침을 얻고 회심하여 금욕적인 이상에 삶을 바칩니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주교로 서임되어 사목자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생전에 ‘대 바실리오’라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껏 받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수도 생활에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나지안조의 주교였던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 갑자기 몸을 숨겨 버린 그는 뒷날 자신의 저서 「연설」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힙니다.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레고리오는 사제나 주교로 봉사하기보다는 은수 생활로 돌아가기를 끊임없이 바라던 성인이었습니다.
힘겨웠던 박해 시기가 지나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신앙의 불꽃이 시들고, 수도승들은 극단적 엄격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로 치닫던 시절에 대 바실리오 성인은 이 모든 것 뒤에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 말씀이 수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과 행실의 토대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혜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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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19-28)
1) 여기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은 “당신은 무엇이오?”라는 뜻이고, 무슨 권한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느냐고 묻는 25절의 질문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7,10-13; 마르 9,11-13), 그 말씀에서 엘리야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예언자”를 뜻하고, 여기서 유대인들이 말한 엘리야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이 “당신은 엘리야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모세가 말한 예언자인데(신명 18,15-19),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나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예언자다.”라는 뜻입니다.
2)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라는 말은,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을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안내자일 뿐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에는, “메시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는 말은,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메시아는 이미 와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는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이신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은, “나는 그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인데,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서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무턱대고 낮은 자리로 가서 앉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아서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겸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이 한 말에는, “나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해도, 구원이 완전히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들이 연상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5-27)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되는 것을,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위대한 선교사도 그것을 두려워할 정도이니,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나는 구원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라고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소리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구원받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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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로고스 찬가’라고 부르는 서문(요한 1,1-18 참조)을 제외하면 요한 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너희가 모르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뒤에 오시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인지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독특하게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구약의 예언자입니다.(열왕기 하권 2,1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를 종말의 때에 앞서 백성들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라기 예언서 3,23 참조)
다시 한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예언자인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 예언자”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후손들 가운데에서 일으켜 세울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기 18,18 참조)
오늘 복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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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요한 1,27)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설교했습니다.(루카 3,3.8) 유다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누구냐는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다”(요한 1,19-22)라고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1,23)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1,27)라고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도록 이끌었습니다. 회개는 요한 자신이 아니라 구세주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오시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심부름꾼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라고 말합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뚜렷한 자아정체성을 지니고, 자기 위치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철저히 살았습니다. 그에게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결국 그를 죽여버립니다.
요한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영에 따라 행한 영적인 사람”(성 바실리오, 성령론)이었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음이 분명합니다.
숨돌릴 틈조차 없이 바삐 돌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영적 치매'를 앓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아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학벌과 부, 외모, 과거의 경력과 업적을 늘어놓는다면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로 장식하는 내가 아니라, '실제로 사는 만큼의 나'를 나라고 답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늘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숙은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보잘것없는 종임을 인식하고 그런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처신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재능과 재물, 지식 등에 종속되거나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아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나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건너가도록 돕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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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말씀(2025.1.2.목.성대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그레고리오주교학자기념일)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고백하였다. (요한.1,23)
수많은 소리의 공해 속에서 사는 요즈음입니다. 너무도 많은 소리들은 제각기 진실이라고 외치는 가운데 사람들과 세상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해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보통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죄를 짓게 합니다.
흑백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고 정당화로 방어적인 대화를 일삼는 소리들이 정치, 경제적 손익성을 외치지만 진실과 정의는 외면합니다.
진실을 은폐한 거짓의 소리가 아직도 세상에서 크게 울리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분별하지 않고 어린이처럼 순진하게 듣고 믿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순진해야 합니다. 순진하게 어린이처럼 믿는 마음으로 들을 때, 우리는 지혜로 충만하여 성장하게됩니다. 지혜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말씀과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모릅니다.
지혜로운 말씀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고집스럽고 불통하는 어른으로 됩니다. 광야의 소리는 듣지 않고 자신의 소리만 듣기에 고집불통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한계를 고백하며 지혜로운 광야의 소리가 된 요한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외치기만 하지만, 광야의 소리는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들으라고 외칩니다.
세상의 소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외치지만, 광야의 소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칩니다.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이끄는 “광야의 소리”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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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유학을 나가기 전, 아버지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 어른 신부님들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때에 신부님들께서는 공통된 말씀을 하셨는데,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항상 챙기라는 것과 힘들 때는 나중에 만나게 될 신자분들과 신학생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으며 저는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신자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이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만나게 될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학을 가고 나서 시간이 흐르는데, 공부가 너무나도 재미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한 전공과 전혀 다른 과목을 그저 교회의 명령에 따라 해야 하니 흥미가 생길 리 없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상기하게 된 것이 앞서 말씀드린 선배님들의 권고, 즉 “나중에 만나게 될 신자분들과 신학생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재미없던 공부가 점차 의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윤리”라는 과목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것이 신앙 안에서 어떻게 접목되어야 하는 지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더 신자분들과 신학생들에게 의미가 있을까 더욱 흥미를 갖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제에게 있어서 공부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지적인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목표가 된다면 공부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버리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게 되며 자칫하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만나게 될 신자분들과 신학생들을 기억하게 된다면 공부의 주체는 나 개인이 아닌 예수님이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나 자신은 예수님의 도구로써 그것을 잘 이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겸손함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범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 즈가리야의 아들이었으므로 제사장직을 이어 받을 수 있는 혈통이었습니다. 이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더없이 거룩하고 고귀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여기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활동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요한의 정체를 궁금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자 엘리야와 같이 메시아가 오기 전, 흩어진 유다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권위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찾아온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말에는 몇 가지 의중이 숨어있는데, 첫 번째는 ‘이제 곧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참된 메시아가 오실터이니 준비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는, ‘나는 그 메시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니 나에게 집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겸손함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말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나 자신이 남들 앞에서 도드라지기를 원하곤 합니다. 혹은 남들이 나 자신을 알아봐 주길 더욱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다소 나를 포장하게 되고 나보다 부족한 이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우월감에 젖기도 합니다.
이러다보니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되고 모든 말과 행동의 목표는 개인의 영달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행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의 행동의 한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말과 행동의 주체는 물론 우리 자신이지만 나 자신이 예수님의 도구임을 느낄 때 그야말로 그 주체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뽐내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사회 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는 곧 “겸손함”이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미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 겸손함의 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실재적으로 머무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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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석원 작가의 ‘나를 위한 노래’에서 세상의 행복을 어른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나고 재미있으면 행복하지만, 어른은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더 행복한가 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고통을 피하면 행복할 텐데, 고통의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기에 불행을 더 쉽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적고, 능력과 재주가 없는 것도 고통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니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기쁨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쁘게만 살라고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절제하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사랑이 있음을 말합니다.
러셀 로버츠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절제하면서도 사랑해야 우리는 가짜 행복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더불어 나의 희생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삶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자기희생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맞춰서, 메시아, 엘리야, 예언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기대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기대를 따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을 기쁘게 따릅니다.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세상의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고통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큰 고통이 동반되는 힘든 삶입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삶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 그였습니다. 자기희생을 기꺼이 선택하면서 진짜 행복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기대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짜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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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닌 이와 더불어>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닌 이와 더불어>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오직 빛만
비추는 것 아니니
빛 스민 이
비록 빛은 아니어도
담은 빛
홀로 가두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건네기 때문입니다
오직 샘만
솟구치는 것 아니니
샘 깃든 이
비록 샘은 아니어도
머금은 샘
홀로 들이키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남김없이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직 길만
이끄는 것 아니니
길 부른 이
비록 길은 아니어도
따르는 길
홀로 걷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두렴없이
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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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내세웠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오늘 기억하는 바실리오 성인은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할 수 있는 겸손함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십시오. 너무도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으로는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겸손함이 없는 지식은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이 터지는 것과 같은 사태를 빚어내고 말 것입니다. 겸손의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덕을 가진 이들이 이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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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자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요?’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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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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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사람, 참된 우정>
-진이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진리이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늘 머무를 때 참 사람, 참된 우정이요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진리 안에 머물러 참 사람, 참된 우정을 살았던 이라면 모두 익명의 크리스찬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늘 감동하는 것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4세기 소아시아 출신의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조선시대의 이이 율곡과 우계 성혼,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 그리고 엊그제 12월31일 선종 2주기 기일을 맞이했던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절친들과의 우정입니다. 세상을 떠났어도 얼마나 깊은 참된 우정의 향기를 남기는지 참 많이 깨닫고 배웁니다.
“Being a Chtistan means learning to be human again”(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절친이자 한참 후배인 스위스의 추기경 쿠르트 코흐가 교황의 2주기 기일미사후 인터뷰 한 대목을 어제 하루 종일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참된 크리스찬은 참된 사람에 참된 우정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다시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공부는 없습니다. 이 대목이 들어있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그분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말하는 것을 경청했던 아주 겸허한 분이었고,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 여러분이 그분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거기에는 많은 ‘내적 빛(inner light)’이 반짝임을 볼것이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인간됨의 기반위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그분께 언제나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둘은 그분께 언제나 함께 갔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이의 탁월한 모범이다.”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역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놈, 싹아지 없는 놈” 소리 들을 정도의 불손하고 무례한 무지무식의 사람이라면 그 인성은 볼 것도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역시 참사람, 참된 우정의 본보기가 됩니다.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두분간의 우정입니다.
두 분의 출생연도는 같으나 성 대 바실리오는 49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60세까지 약 10년 정도 오래 사셨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대大” 자가 붙을 정도로 동방교회에서는 최고로 숭앙받는 분이었으며 그분의 많은 업적들도 놀랍고, 강론들도 그 깊이와 해박함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두분은 참 좋은 보완관계의 절친이었습니다. 바실리오가 아리안 이단에 대해 싸웠던 조직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었다면 그레고리오는 많이 관상적이고 시적인 분이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의 다음 강론을 통해 그분들의 깊고 아름다운 우정을 엿볼수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나의 위대한 친구인 위대한 바실리오의 신중한 행동과 말하는데 있어서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인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했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표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경쟁은 누가 일등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성인들인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참 사람되기"와 "참된 우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 분의 삶과 영성은 평생을 공부해도 끝이 없이 풍부하고 깊으리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우계 성혼이 절친인 이이 율곡이 작고했을 때 쓴 제문도 감동적입니다. 두 분 다 우리나라 선비로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된 동국18대 명현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진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형과 나의 정은 형제 사이와 같고, 의리는 사우(師友;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 처럼 무거웠습니다. 약관부터 벗하여 이제 35년이 되었는데, 형은 몸이 건강하여 세도의 무거운 책임을 맡았고 나는 늘 병을 앓아 죽음과 이웃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형은 별세하고 나는 살아있어 나로 하여금 목놓아 울부짖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어지는 제문도 진실하고 절절하기가 단숨에 읽히는 감동적인 명문입니다. 손암 정약전 둘째 형의 별세 소식에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의 큰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우정의 깊이를 엿볼수 있습니다.
다산의 큰형은 정약현, 셋째 형은 정약종입니다. 정약현의 딸이 정난주, 사위가 순교자 황사영이고 순교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가 순교성인 정약종입니다.
“오호라, 어질면서도 곤궁함이 이와같을 수 있는가. 원통하여 무너지는 가슴을 호소하니 목석도 눈물을 흘리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외로운 처지에 손암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다.
앞으로는 비록 깨달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입을 열어보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죽느니만 못하다. 나를 알아주던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 240책을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이 저술을 불살라야 한단 말인가.”
역시 진리 안에서의 참 사람이요 참된 우정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보이지 않는 깊은 신뢰와 우정을 감지합니다. 예수님 없는 요한은 상상할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당신은 누구요?”에 대답할 수 없는 요한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요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기를 아는 지혜가 바로 겸손이요 이의 좋은 본보기가 요한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심전심 예수님을 알아보는 우정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깊이와 함께 가는 이웃들과의 참된 겸손에 참된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참 사람이, 참된 우정이 되기 위해 늘 진리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도 요한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정의 깊이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주님의 애제자 요한이기에 그의 고백을 더욱 신뢰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으로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머물러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함은 물론 참 사람이, 참된 우정의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날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도 같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고, 참사람, 참된 우정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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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머물되 안주하지 않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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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0.27)
<겸손의 덕!>
오늘 복음(요한 1,19-28)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유다인들이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대해 긍금해 합니다.
요한은 그런 그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19)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을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곧 오실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그가 간직한 '겸손의 덕'을 묵상해 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을 완성시키는 덕'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행하는 모든 덕 위에 겸손의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발 끈을 푸는 일은 종들 가운데에서도 신분이 가장 낮은 종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런 종보다 더 낮은 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원은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으로서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할 뿐입니다. 종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또 주인이 하는 일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종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종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겸손한 종이셨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도,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신자는 또한 본당 사목자의 종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종입니다.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이러한 종들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겸손하게 그리고 기쁘게, 성실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종들의 나라입니다.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의 옷을 입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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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릇된
신앙을
바로잡는
기준점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겸손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겸손하고도
힘찬 고백의
새날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믿고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풀리지 않던
우리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문제의 빠른
해결과
해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겸손은 언제나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깨달음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겉모양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짊어진
고민들을
그리스도께
내려놓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은
따듯합니다.
교만하지
않기위해
겸손하기 위해
늘 그리스도께
기도드립니다.
겸손이
은총입니다.
낮추면
듣게되고
낮추면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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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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