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고려 개국 공신 4인방
918년 6월,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
겸 등 네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기병대장들이었다.말하자면 궁예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는 야전사령관들인 셈이
다.태봉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반기를 들었던 것은 날로 심해가는 궁예의 비정
상적인 학정 때문이었다.
궁예는 날로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져 측근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백성들에게 가혹한 공
포정치를 실시했다.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은 한결같이 역모로 몰렸고,가혹한 공포정치에 시달
린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자 급기야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이에 더 이상 궁예를 왕으로 섬길 수 없다고 판단한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은
덕망이 높고 세력이 강한 왕건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종용한다.왕건은 처음엔 역모 제
의를 거절하지만,이들 네 사람과 부인 유씨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결국 역모에 동의한다.왕건
을 끌어드리는 데에 성공한 네 사람은 왕건을 왕으롤 추대하고 왕성으로 쳐들어가 궁예를 몰
아내게 된다. 이들 개국공신 4명의 삶을 간단하게 기록하면서 개국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
들의 역할을 추적해본다.
홍유(?-936)
홍유(洪儒)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났으며,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태봉 이전에 그도 한때 신라의 장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당시 신라는 진성여왕의 퇴폐정치
와 일부 권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기강이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혼란이 계속
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산마다 도적들이 들끓었다.그러자 각 지방 호족들이 봉기하여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홍유 역시 신라에 반기를 든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홍유는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그 후 궁예
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마진 등으로 국호를 바꿔가며 태봉을 세웠다.
홍유는 17년 동안 궁예를 왕으로 섬기며 장수로서 활약하였고,많은 공을 세워 기마부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격인 마군대장에 오른다.하지만 궁예는 시간이 지날수록 왕으로서의 덕을
잃고 포악성을 드러내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결국 홍유는 다시 한 번 반기를 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복지겸,신숭겸,배현경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홍유는 배현경,복지겸,신숭겸 등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이 된다.
고려 개국 직후 왕건의 왕권 찬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홍유는
진압군 대장으로 출전한다.청주반란을 수습한 그는 이듬해 다시 경상 북부지방의 안정을 위해
예산 등지에 유민을 유치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며,그 공적을 인정받아 종1품 대상(大相)에 오
른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그의 딸을 제26
비로 맞아들인다.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
머니이다.
대상이라는 요직을 차지하고,다시 왕건의 장인이 된 홍유는 명실공히 개국 1등 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936년 왕건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후백제의 신검을 칠 때,출전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다시 한 번 공을 세우지만,결국 그 해에 천수를 다하고 말았다.그가 죽자 태
조는 그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현경(?-936)
배현경(裵玄慶)은 경주사람으로,초명은 백옥삼이다.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 휘하에 있을 때,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
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광(大匡)에 이
르렀다.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그는 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왕건 또한 그를 신뢰하
고 있던 터라 그의 직언을 곧잘 수용하였다.
태조의 측근 중에 청주 출신의 현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태조가 그를 호족자치군을 관할하
는 순군낭중(정2품)에 임명하려 하자 배현경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배현경은 현률을 야전권
을 쥐고 있는 순군낭중에 임명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려 개국
직후 청주 순군의 임춘길 등이 이미 반란을 획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청주 출신에게 순
군낭중을 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왕건은 배현경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아끼던 측근 현률을 관리직인 병부의 낭중(郞中)
으로 고쳐 임명하게 된다.
이처럼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려 개국(918년) 이후 통일작업이 지
속되면서 그는 때론 장수로서,또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재
상격인 대광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하지만 그도 홍유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그
해(936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배현경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왕건은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아,천명이로구나,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왕건이 이렇게
말한 후 그의 손을 놓고 문을 나설 때,그는 숨을 거뒀다.그가 숨을 거두자 왕건은 국비로 장
례를 치르게 했으며 ‘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숭겸(?-927)
신숭겸(申崇謙)은 광해주(춘천)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다.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
으나,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
어갔으며,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남달랐던 그는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에 올랐고,궁예의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배현경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개국에 참
여한다.
고려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된 그는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927년 9월,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 듯 회군하여 영천
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그리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경주로 향한다.하지만 그때 견
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왕건은 별수없이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공산(팔공산)에 진을 쳤고,여기서 견훤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후백제군은 고려군
을 기습공격하여 포위하자,퇴로를 차단당한 고려군이 우왕좌왕할 때,신숭겸은 왕건과 옷을 바
꿔입고 싸운 사이 왕건은 겨우 샛길로 탈출하게 된다.이 전투에서 신숭겸.김락 등 고려장수 8
명이 전사하게 된다.그래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고 해서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
었다는 설화도 있다.
공산 싸움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도성으로 돌아온 왕건은 부하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
신의 실수를 되씹는다.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다주었
다.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시호를 ‘장절’이라고 했으며,그의 동생 능길,아들 보
라,철 등을 등용하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넋을 위로했다.
복지겸(생몰년 미상)
복지겸(卜智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홍유,배현경 등
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는 것과,면천 복씨(당진 면천)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
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환선길의 반란계획도 미리 알아내 왕건에게 전달했으며,임춘길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도 이를 차단하였다.이처럼 복지겸은 주로 반란세력을 색출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역
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다만,뚜렷한 벼슬을 하지 못
한 것으로 미루어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권력다툼으로 관직에서 밀려 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
이다.
죽은 후 그에게는 ‘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성종 13년에 개국공신 네 명 모두에게 태
사(太師; 공신에게 주는 정1품 관직) 벼슬이 추증(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주는 일)될 때 함께
받았고,개국공신 자격으로 태조의 묘정(신주를 모시는 곳)에 배향(함께 누림)되었다.
9.태조의 정략결혼과 고려 통일을 뒷받침한 주요 호족들.
건국 당시의 고려는 호족연합체였다.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국호를 고려로 고친 후 왕위에
오르지만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잔존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와 경상북부지역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때문에
왕건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과 공조해야 했고,그 결과물이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의 지지기반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와 황주 중심의 황해도,그리고 나주와 충주지
역이었다.황주와 나주,충주는 정벌과정에서 형성된 주요 거점이었다.그리고 이 네 지역은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제1비 신혜왕후가 경기도 정주(지금의 개풍 승천)의 호족 유천궁의
딸이었고,제2비 장화왕후가 전라도 나주의 오다련군의 딸이었으며,제3비 신명순성왕후는 충주
의 유력가 유긍달의 딸이었다.그리고 제4비 신정왕후는 황주를 대표하는 황보씨 가문 제공의
딸이었으며,제6비 정덕왕후는 경기도 정주 호족 유덕영의 딸이었다.
이들중 첫째부인 신혜왕후와 둘째부인 장화왕후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과 왕건이 결혼한 시
기는 920년 이전이다.이는 고려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왕건이 이미 고려 건국 이전부
터 꾸준히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가 한때,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두었던 이유도 바로 왕건의 이 같은 세력 팽창 노력 때
문일 것이다.이는 궁예가 쉽사리 왕건을 제거하지 못했던 것이 왕건 지지세력의 반란을 염려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또한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자 궁예가 별다른 저항도 하
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왕건의 세력이 얼마나 커져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왕건의 세력은 경기도,황해도 나주,청주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 건국
후 궁예의 잔존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경상북부 호족들의 반란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이 때문에 왕건은 철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흔암
을 죽이고,충청도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청주 성주 공직의 처남 경종과 무력 동원 능력이
있던 환선길 형제를 죽여 반발세력의 기선을 제압한다.
왕건은 이처럼 강경책과 함께 유화책을 구사하게 되는데,그것이 이른바 결혼정책이다.가 지
방의 유력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돈독히 하여 고려의 안정을 노리겠다는 계
산이었다.
다행히도 왕건의 결혼정책은 지방 호족들을 안심시키는 촉매제다 되었다.하지만 호족들은
여전히 자기 지방 치안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정책이 중앙집권화로 발
전하지는 못했다.따라서 왕건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호족연합체 국가뿐이었다.
호족연합체는 일종의 지방자치제 성격을 띠었다.각 지역의 호족들이 자기 지방의 호장,부호
장이 되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고,중앙정부는 그들 호족들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 호족세력은 고려 개국과 그 이후에 지속된 통일 정책 과정에서 왕건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척지간이 되었고,그 결과 왕건은 전국 주요 지역에서 29명의 후비를 얻게 되었다.
후비(后妃)들의 출신 지역은 황해도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경기도 4명,충청도 3명,강원도 3
명,전라도 2명 경상도 6명,출신이 불분명한 나머지 2명 등이다.
황해도 출신 후비가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고려 건국에 황해도 호족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
을 의미하며 상대적으로 경기도 출신 후비가 적은 것은 왕건의 힘이 경기지역을 아우르고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황해도에 이어 경상도 출신 후비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신라세력
에 대한 배려이자 동시에 견제책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전라도 출신 후비가 두 명뿐이었던 것
은 왕건이 일찍이 나주 지역을 고려에 귀속시켜 전라도의 인심을 얻었고,또한 후백제를 몰락
시키는 과정에서 견훤과 그의 사위 박영규의 동조를 얻어냈기 때문에 다른 호족과의 제휴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이 같은 사실은 한편으론 전라도 지역이 완전히 견훤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내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후비를 배출한 각 지역의 주요 호족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에서 제4비 신정왕후의 아버지
황보제공을 비롯하여 제25,27,28비의 아버지 박수경과 제9비 동양원부인 유(庾)씨의 아버지
유금필이 있고,경기도에는 제1비 신혜왕후의 아버지 유천궁과 제15,16비의 아버지 왕규가 있
다.충청도에는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 유긍달,강원도에는 제8비 정목부인의 아버지 왕
경을 비롯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예와 왕유,경상도에는 제5비 신성왕후의 아버지이자 경
순왕의 백부 김억렴과 제26비 의성부원부인 홍씨의 아버지 홍유,전라도에는 제2비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군과 견훤의 사위이자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아버지 박영규가 있다.
이들 중 왕후를 배출한 호족들을 제외하면 황해도에서는 박수경과 유금필,경기도에서는 왕
규,강원도에서는 왕경,경상도에서는 홍유,전라도에서는 박영규 등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이들 호족세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를 대표하는 박수경과
유금필은 통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무장세력이다.특히 박수경은 자신의 누이와 질녀,그리고
딸을 각각 태조의 25비,27비,28비에 앉혀 한 집안에서 세 명의 후비를 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왕규는 단 한 번도 전장에 출전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박수
경이나 유금필과 달리 학식을 겸비한 문장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그는 함씨였는데, 왕건으로
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고 고려왕실의 외척이 된다. 왕규의 난으로 잘 알려진 왕규와 동일인이
다. 그는 임종을 앞둔 태조를 보필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혜종 집권기에 서경파와 정권을 다
퉜던 점으로 미뤄 경기 일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원도의 왕씨 일가는 명주(강릉)성주 김순식의 친척일 것으로 추측되는데,신라에 속했
던 김순식은 태조 5년에 고려에 내응한 공로로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고 대광에 오른 인물
이다.8비의 아버지 왕경과 14비의 아버지 왕예, 18비의 아버지 왕유(원래 성은 박씨)도 이때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경상도의 홍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고려 개국 공신 4대 공신 중 한 명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유력가로 성장했다.
전라도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호남지역의 유력가였다.박영규는 자신의 첫딸을 태조의
17비로 보내고,다시 둘째,셋째딸을 왕자 시절 정종(왕요)의 배필로 보냄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경애왕과 관련된 신라
왕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첫댓글
고려는 정략결혼으로
다져진 국가였네요
읽으면서 개인적인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듬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몰랐던 호족들의 실세와 삼국 이전에도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을 나라를
상상해 봅니다
내기억들이 자꾸만 쇠락해지는게
사라져가는 나라들만큼 안타깝습니다
세월을 보낸다는건 그만큼 약해지는
나를 만나게 된다는 것에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에조차
남겨지는 일도 없이 사라져갈 먼지같은
존재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일슬풍님
삼국이전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과
부여,고구려,동예,옥저가 있었다고 하네요.
항상 투철한 관심으로 열심히 정독해 주시는
보쳉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이 힛트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중 하나 지요
고려의 통일을 보지도 못하고 전쟁에서 전사한 신숭겸ㅡㅡ
역사에 길이 남아 있지요
가슴이 뭉클 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한 획을 긋고 갔네요.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미래가 없다"
란 말이 있듯이
지금 이순간 우리들은 역사를 알고 그에 교훈삼아
지금의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것입니다.
고려는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국가 ~
부족들의 세력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