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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일 - 오근(사띠, 집중, 노력, 믿음, 지혜)의 균형
11/16(수)
질의응답
질문: 잠들기 전에 누워서 배의 호흡을 100번 보려고 시도했으나, 100까지 가기 전에 잠들어 버렸습니다.
대답: 잠들면 사띠할 필요 없다.
질문: 특히 여기 들어오기 전의 일상생활 중에, 어떤 일을 빨리 끝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거나 심지어는 가슴이 아프고, 이것이 며칠 계속되면 입술이 터지기까지 합니다.
대답: 일을 멈추고, 그 마음을 봐서, 성급한 마음이 사라진 다음에 다시 일을 계속하라.
질문: 사띠(알아차림)와 위딱까(일으킨 생각, 심, 尋)와 마나시까라(attention, 자발적 주의, 마음기울임, 作意)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대답: 사띠는 대상에 강하게 밀착하는 것, 위딱까는 대상에 가서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마나시까라는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는 것,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 마음가짐, 대상에 주의를 둠, 대상에 마음을 약하게 두는 것이다. 사띠는 강하게 밀착하는 것이고, 마나시까라는 약하게 밀착하는 것이다.
질문: 야생 코끼리 길들이기를 좀 더 자세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야생 코끼리는 마음, 말뚝은 명상 주제(행주좌와), 끈은 사띠로서 아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아는 것이 마음이다.
질문: 무아에 들어갈 때 어떤 ‘나’로서 열반에 들어갑니까?
대답: 나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무아이다. 망상을 그만하고 싶지만 계속한다. ‘나’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인 ‘내’가 없다. 잘 보고 싶지만 노인이 되면 노안이 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것이 원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다.
질문: 그러면 알아차리는 ‘나’는 누구입니까?
대답: 그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그 성품 그대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 무아이다.
16:30 법문
수행에서 균형 잡힌 다섯 가지 기능[五根]의 중요성
수행을 할 때 균형 잡힌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을 하는 데는 다섯 가지 주요 기능이 있는데, 사띠(알아차림, sati), 집중(samādhi), 노력(viriya), 믿음(saddhā), 지혜(pañña)입니다. 이들 다섯 기능 중에서 집중과 노력, 믿음과 지혜는 수행을 하는 데 모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믿음이나 노력 또는 집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띠를 강조하면 할수록 수행은 그만큼 더 잘 됩니다.
수행에는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종류의 자세(行住坐臥)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걷고 서는 경행은 정진력(努力)을 계발하고 증진시킵니다. 물론 집중력도 증가되지만 노력이 더 많이 계발됩니다. 경행을 하기 위해 서 있는 동안 여러분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걸을 때에도 한 발이 똑바로 서 있는 동안 다른 발을 내디디려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걷고 서는 경행은 노력을 계발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좌선과 와선은 집중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좌선하고 있을 때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집중이 더 잘 됩니다. 이때도 물론 노력도 있지만 그것은 미미합니다. 와선할 때에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기 때문에 집중하는 힘이 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좌선과 와선 자세에서는 집중이 더 계발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성자들이 집중과 노력 그리고 믿음과 지혜가 균형 잡혀 있는 수행자를 칭찬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도 집중과 노력, 믿음과 지혜가 균등하게 계발되었을 때에만 위빠사나 수행이 신속하게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자전거의 예를 들면, 안락하고 빠르게 자전거가 달리기 위해서는 두 바퀴에 바람이 똑같은 압력으로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두 바퀴 중 하나가 바람이 빠지면 자전거는 잘 굴러가지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두 눈과 두 귀가 똑같이 작동할 때 정상입니다. 한 눈에 이상이 있으면 볼 수는 있지만 두 눈이 정상인 사람처럼 효율적으로 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귀에 이상이 있다면 듣기는 하지만 두 귀가 정상인 사람처럼 잘 듣지는 못합니다. 두 손과 두 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발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이상이 있다면 두 손과 두 발이 정상인 사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집중과 노력, 믿음과 지혜가 알맞게 균형을 이룰 때 통찰의 진보는 정상적이고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균형이 깨어져 지혜보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빠진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삿다(saddhā)는 믿음이며 어떤 것이나 한 가지를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좋지만 맹신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맹신자들은 잘못된 견해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삿된 사람을 성인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옷을 입지 않음으로써 탐욕과 성냄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나체 수행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나 소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숭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 또는 괴팍한 옷을 입은 사람을 숭배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숭배한 이유는, 그들이 믿음은 있었지만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식별하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절함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며, 덕망 있는 사람이나 존경받는 사람, 점잖고 지성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하여 올바른 시각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정법을 가르치고, 누가 여러 가지 불행을 초래하고, 심지어는 누가 날조된 신을 맹신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게도 하는 사기꾼이고, 누가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지 적절하게 판별하지 못합니다.
그런 종류의 불상사는 확고한 믿음은 있으나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구별하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가짜 부처, 가짜 법, 가짜 승가의 추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얀마 속담에 “지혜가 모자라는 열렬한 맹신자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리하고 지성적이지만 확고한 믿음과 정직성이 결여된 사람은 교활하고 사악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위에서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은 많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남에게 보시하는 너그러움이 없고, 계를 지킬 마음도 없고, 위빠사나 수행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시, 지계(持戒)와 수행을 별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시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윤회의 고통을 연장시킬 뿐입니다”라고 악담을 늘어놓음으로써 믿음이 깊고 보시와 계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길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보시는 쉬운 것입니다. 설거지를 할 때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면 곤충들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데, 그것도 보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보시이지만, 그런 종류의 보시는 저급한 것이어서 복덕이 적습니다.
교활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믿음이 깊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의 선행을 방해하는 그런 악담을 합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절에 가서 계를 지키는 청정한 스님의 지도로 정중하게 수계(受戒)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집에서 마음의 청정을 실천하면 되니까 수계하기 위해서 절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믿음이 깊은 사람을 비웃습니다.
청정한 스님의 입회하에 장중한 의식을 통해서 수계해도 때로는 계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집에서 혼자 계를 준수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계를 준수하는 것을 마음대로 파기하기 쉬워서 아무런 제재 없이 살생을 한다든지 낮 12시 이후에 음식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스승 앞에서 계를 받는 것이 보다 더 엄숙하고, 보다 더 준수하기 쉽고 진지하고 유익합니다.
소위 박식한 사람들도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이렇게 빈정거립니다.
“선원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 부처님께서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이 법이라고 하셨다. 수행은 자기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을 하려면 조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방법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최상의 준비와 올바른 안내가 필요한 진지한 과업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영감을 주는 장소와 서로 격려해 주는 도반이 있어야 합니다.
환경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원은 정숙한 환경이 독특한 특징이고, 좌선과 경행이 되풀이되는 시간표가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개인의 집이 선원의 환경, 분위기, 영감, 숭고한 특징을 다 갖추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세속적인 일이 없을 수 없는 것이어서 집에서는 잡다한 보통 사람이 하는 일상 업무에 쉽사리 휘말리게 됩니다.
소위 박식한 사람들은 수행을 방해하는 발언을 하면서 정작 그들 자신은 스스로 수행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잠자는 네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정신적․물질적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미얀마 속담에 “너무 아는 것이 많고 믿음이나 확신이 부족한 사람은 교활하고 사악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피하고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믿음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단 하나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어떤 교리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믿기 전에 찬성의 입장과 반대의 입장에서 모든 주장을 잘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지성적이면서도 진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중의 자산입니다. 그는 같이 사는 모든 사람과 전체 사회의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와 믿음이 균형을 이룬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입니다. 그리고 집중과 노력도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집중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를 말하며, 노력은 에너지라고 하는 활력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좌선과 와선은 집중의 계발을 촉진시킵니다. ‘걷고 서고’ 하는 경행은 정진력을 촉진시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수행 일정은 한 시간 경행과 한 시간 좌선이 되풀이되도록 짜여 있습니다. 좌선만이 수행의 진전에 도움이 된다면 스승들이 좌선만 계속하라고 지시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좌선만 강조한다면 집중만 지나치게 계발되기 때문입니다.
집중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은 게으름과 혼침(昏沈)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경전의 주석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좌선과 와선을 많이 하고 경행을 별로 하지 않는 수행자는 게으름과 혼미함으로 졸음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집중이 지나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 단계의 지혜의 끝 부분에 머리를 너무 자주 끄덕이는 등의 일종의 졸음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노력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닿는 부위를 네 군데에서 열 군데 등으로 증가시키는 것과 경행을 더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력과 집중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해태(게으름)와 혼침(정신이 혼미함)이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필요 이상으로 경행을 많이 하고 좌선을 적게 한다면 노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노력이 지나치면 좌선할 때 망상, 즉 백일몽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수행하는 여러분은 이를 즉시 관찰하지 못하고 한참 후에야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에도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발걸음을 관찰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망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치유방법은 집중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여러분은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맞춰 나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시절에 살았던 소나라는 백만장자 아들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백만장자의 아들이어서 그는 매우 섬세하고 연약했습니다. 그의 발바닥은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습니다. 수계 후 신참 승려가 된 소나 비구는 “나는 이제까지 백만장자의 아들로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육체적인 어떠한 안락함도 추구하지 말고 불굴의 인내로 열심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울퉁불퉁한 길에서 경행을 했는데, 그의 발이 너무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렇게까지 했지만 그는 집중을 계발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무릎과 손으로 기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그가 경행하는 길은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그는 아무런 위빠사나 지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낙담한 그는 “나는 법을 깨닫고 실현하지 못할 운명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모든 수행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경행 장소에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왜 이곳이 백정이 일한 것처럼 온통 피로 뒤덮여 있는가?”
다른 비구가 백만장자의 아들인 소나 존자가 경행하면서 발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참 승려인 소나 존자에게 가셔서 그가 젊었을 때 하프를 연주한 적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소나 존자는 자기가 하프를 아주 잘 연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하프의 현들이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소나 존자는 현들은 너무 느슨해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하프를 연주하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느슨하면 줄이 늘어지고 너무 팽팽하면 줄이 툭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 중도를 따르는 것이 결과를 얻는 데 최선의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나 존자에게 노력과 집중이 균형 잡히도록 하기 위해 경행과 좌선을 똑같이 하고,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약을 써야 할 상황이 생기면 약을 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참 승려 소나 존자는 부처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는 약을 사용하여 물집 생긴 발을 치료했고, 알맞게 먹었으며, 노력과 집중을 똑같이 실천했습니다.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도과(道果)의 지혜를 증득하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혜와 믿음, 집중과 노력을 똑같이 균형 있게 실천하여 고통의 소멸인 열반을 이루기 바랍니다.
출처 :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115-126쪽 참조. 일부용어 수정
첫댓글
감사합니다. 중도의 이치를 잘 설명하셨군요사두사두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