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조선때의 단군제사를 살펴보자
[성종 3년]
황해도 관찰사 이예(李芮)가 보고하기를
“단군(檀君)께서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당은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삼성당의 제사 그릇은 옛날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기우제 지내는 제단이 삼성당(三聖堂) 아래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의 옛 유적을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하였습니다."
[성종 19년]
원접사 허종이 중국 사신에게 베푼 일을 보고하다.
" 중국 사신 대표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단군묘(檀君廟)입니다.’ 대답 하니...
중국 사신 대표가 말하기를, ‘(단군에 대하여) 나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고,
사당에 들어가 절했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이 분은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선조 30년]
예조가 아뢰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면
‘삼성사 역시 문화현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바로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사당이다.
봄·가을로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하는데,
홍수,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응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효종 7년]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글을 올리기를,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맨 먼저 출현했던 임금입니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중국의 요(堯)임금과 함께 왕위에 올라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와 철옹(鐵甕)에 도읍을 정했다가
패수(浿水) 가로 옮겨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었는데
인문(人文)을 밝게 편 기초가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현종 1년]
윤강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해서(海西) 삼성묘(三聖廟)의 단군(檀君)·환인(桓因)·환웅(桓雄)의 묘를 수리하는 일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그런데 예관이 와서 제사를 지내어 제사의 격을 높였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조의 낭관을 보내 일을 하게 하라.”
[숙종 3년]
우의정 허목(許穆)이 글을 올리기를,
"동방(東方) 역사책 22가지를 지었습니다.
대개 동방 구역(九域)은 상고(上古 - 태초.아주 오래전.) 때부터 임금을 두고 나라를 세워
중국 바깥의 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단군(檀君)은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숙종 5년]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숙종 21/06/06]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 하였다.
[숙종 23년]
이인엽이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영조 15년]
단군(檀君)·기자(箕子) 이하 여러 왕의 능묘(陵墓)를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 이후 기성(箕聖)이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폈으므로,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영조 22년]
임금이 말하기를,
“단군(檀君)에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능을 매년 가을에 보수하게 하라.
향(香)을 내려주고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영조 41년]
예조 판서 심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에 대하여 물으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
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것이 을유년이었고, 지금 또 삼성묘의 일이 있으니,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과 축문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制)를 몸소 그려서 그것을 덮도록 하였다.
[영조 44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도 단군사(檀君祠)·기자전(箕子殿)·삼국의 시조릉(始祖陵)이 있고,
고려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정조 2년]
(서자 차별을 없애자는 집단 상소)
유생 황경헌(黃景憲) 등 3천 2백 72인이 상소하기를,
" ... 이것(서자 차별)은...단군(檀君)·기자(箕子)와 우리 나라 국초(國初 - 조선 초기)의 법도 아닙니다..."
[정조 5년]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 시조(始祖)의 왕릉(王陵)들을 보수하는 절차에 대해 지시하였다.
[정조 7년]
단군묘(檀君廟)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에게 제사하였다.
[정조 10년]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 관리인들을 두었다.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극도로 갖추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誌)》에 기록되어 있으니..."
[정조 13년]
삼성사(三聖祠)를 수리하고 제사 의식을 다시 정하였다.
삼성사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제사하였다.
[정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 지냄)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정조 19년]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이름을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현판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이름이 없다니...
숭렬전(崇烈殿) 이라는 칭호로...
현판을 거는 날에는 고울 수령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 제사때 읽는 글)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군자(君子)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니...
...유구(琉球 - 오키나와)에서 우리 조선에 조공을 바쳐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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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국경회담’ 때 한·중 대표가 직접 작성… ‘백두산정계비~송화강이 국경’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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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5년 파리지리학회지에 실린 지도의 일부.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지도라고 설명이 붙어있다. 오른 쪽 상단의 지도를 보면 압록강 이북도 조선영토로 되어있다. (박선영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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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 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가 제작한 A NEW MAP OF CHINA.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 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1740년 예수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제작한 La CHINE avec la KOREE et les Parties de la TARTARIE 지도.
1771년 본 도법으로 유명한 지리학자 본이 제작한 CARTE DE LA TARTARIE CHINOISE 지도.
1778년 잔비어(Janvier, j. & Santini, F) 등이 제작한 L、ASIE divisee en ses principaux Etats아시아 지도.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을 녹색 테로 둘러 COREE라고 표기했으며 동해는 MER DE COREE로 표기했다.
1794년 윌킨슨(R. Wilkinson)이 제작한 CHINA, Drawn from the Latest & Best AUTHORITIES 지도.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원본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한반도를 서울, 대구, 원산의 3개 교구로 나눴는데 간도 지역이 원산(Wonsan) 교구에 포함돼 있어 간도와 한반도가 동일 생활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9년 일본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 답사도. 백두산(검정색 원)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도는 토문강(土門江·갈색 원)과 두만강(豆滿江·청색 원)은 다른 강이며 두만강 이북에 토문강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220년 전인 1785년 일본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林子平)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로 빨간선 안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다.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정병준 교수(40)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영국정부의 자료를 발굴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패전국일본이 1951년 9월 8일에 조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이자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한 자료다.
1951년 9월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직전인 그해 4월 7일 제작한 연합국 일원인 영국정부의 일본 영토지도에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는 한국 영토에 포함돼 있다. 사진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이다. 그동안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에 일본영토를 확실히 하는 지도가 첨부되지 않았다는 빌미로 독도를 포함해 러시아와 북방 4개 섬, 중국과의 조어도 영유권 분쟁을 야기해 왔다. 또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1785년 일본의 대표적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를 발견했다며 27일 원본을 공개했다. 한반도 전체를 노란색으로 채색한 이 지도에는 북위 39도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고 울릉도 우측 바다가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돼 있다.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169.0 * 93.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큰 획을 그었던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조(全圖)이다. 각 도의 군현을 원으로 나타내고 바탕색을 구별함으로써 팔도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은 사각형으로, 진보(鎭堡), 역(驛)은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우측 주기(註記:지리정보)에는 서울에서 각지에 이르는 거리를 수록하였다. 다른 전도와 달리 도로망을 그리지 않아 미완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아국총도(我國摠圖, 여지도)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152.2 * 82.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정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전국지도.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산줄기를 녹색으로 하천을 청색, 그리고 팔도의 군현을 색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의 섬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와 남북의 길이, 사방(四方)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의 군현 수가 기재되어 있다.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18세기 후반, 채색필사본, 252.5 * 139.5cm, 개인소장
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 ~ 1752)의 <동국지도>이다.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는 대전도와 팔도분도가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팔도분도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한반도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이 정상기의 지도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는 대전도를 후대에 전사한 것으로 초기의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전도(朝鮮全圖, 동국대전도) 정상기, 1757년, 비단에 채색, 271 * 1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지도는 1757년(영조 33)에 영조의 명으로 정상기의 <동국대전도>를 모사하여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도록 한 모사지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강, 섬 등 자연 지명과 군현 이름, 창고, 진보(진보), 찰방, 산성 등 인문 지명 및 중국과 일본 등 모두 2,580여 개의 주기(주기)를 담고 있다. 산맥의 표현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크게 강조하고, 여기서 뻗어나간 주요 산맥들을 강조함으로써 국토를 인체(人體)로 인식하는 전통적 지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영, 수영, 읍성, 진보, 찰방, 봉수 등을 기호화하고, 산성, 고갯길, 관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한 층 더 발전했다. 한편 지도에 육로, 해로, 고갯길을 나타내어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필요를 모두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해좌전도(海左全圖) 1850년대, 목판본, 97.8 * 55.4cm, 개인소장
19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유사하며 산계(山系)와 수계(水系), 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동의 여백에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10여 개의 명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섬 정계비,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구주(新羅九州), 고려팔도(高麗八道)의 고을 수를 좌측상부의 여백에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로서, 목판 인쇄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1557년, 채색필사본, 국보 제248호, 132.0 * 61.0cm,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국보 제 248호로 지정된 조선전기의 전도. 이 지도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을 관할하던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지도로 대마도(對馬島) 종가(宗家)에 보관해 오던 것을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종가문서를 인수하면서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 전반 세종대의 과학적인 지도제작 사업은 세조 때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에서 결실을 맺었는데,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사본으로 추정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면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다. 산줄기는 풍수적 지리인식에 기초한 연맥으로 표현하였다.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 17세기 후기, 채색사본, 218.0 * 149.0cm, 고려대 도서관 소장
이 지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색감을 중시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 많은 산봉우리에 봉화가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특히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주현읍치(州縣邑治) ·도로, 산천과 대소 산맥 ·준령(峻嶺) ·성곽 ·역참(驛站) ·봉수대 등을 그려 넣어 봉수의 직간선(直間線)을 한 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서해쪽의 네모 안에는 목멱산(木覓山: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강원도래양주아차산봉수(咸鏡江原道來楊州峨嵯山烽燧) ·경상도래광주천림산봉수(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燧) ·평안도육로래모악동봉봉수(平安道陸路來母岳東峯烽燧) ·평안황해도수로래모악서봉봉수(平安黃海道水路來母岳西峯烽燧) ·충청전라도래양천개화산봉수(忠淸全羅道來陽川開花山烽燧) 등 5대 봉수로와 동서 및 남북의 길이, 서울에서 동서남북 주요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
<채색필사본, 19세기 전기, 96 x 65.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 유형의 조선 전도이다. 조선전도는 팔도를 모아 전국을 한눈에조망하고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든 것이다. 전도인 이 지도에 정상기의 발문과 축척인 백리척이포함되어 있어 지도상에서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군현의 이름을 오방색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경기는 순황색, 충청은 홍백생, 호남은 순홍색, 영남은 청홍색, 강원은 순청색, 해서는순백색, 관서는 백흑색, 관북은 순흑색으로 표현하였다. 지고에 산, 천, 지, 나루, 봉수, 창, 진, 산성, 창고, 절 등이 표시되어 있으나 도로망은 그려져 있지 않다.
첫댓글 광해군이라고한다. 단군이라고한다. 이게 이조시대때 격하된 용어인 것이다. 고려때까지 단은 최초의 칸으로써 집집마다 초상화가 있었으며 주신의 단칸이라고 모셨다. 그러나 패륜의 이조는 단군이라고 격하하여 세종에 와서야 조그맣게 사당지어놓고 제사지내는척했다. 중국사신이 안다는 단칸!..이조는 신화로 만들었다.
신화로 만들수밖에 없었던 이조역대왕들...일본에는 단칸시대 유물들이 있다. 일본사학자들은 단칸이 신화가 아니라고하지만 한국사학자들은 하나같이 신화라고한다. 거지 발싸게같은 것들이 무슨 사학자라고 교수하고 떵떵거리고 사는지 한심할뿐이다. 출처 한민족참역사 (검색) 광해왕아냐? 광해군이냐? 패륜의 이조시대
광고성 글은 금지
이씨조선이 원래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고, 이씨조선을 조선,조선왕조라고 부르는 자체가 원래조선인 고조선은 신화라는 전제하에 사용되는 왜곡용어다. 어째서 원래조선이 고조선이고, 이씨조선이 조선,조선왕조냐?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되냐? 강단이건 재야건 애건 어른이건 죄다 왜곡용어를 쓰는 한심한 현실!
지식 無 이해력 無 사고력 無 논리학적 오류를 모두 범하는 신기;;; 낫 놓고 기억자 모른다는 말을 이런때 쓰는거지.. ; 혼자서 이제 벽보고 대화중이시네요
순두부님의 글을 그동안 쭉 봐왔습니다. 바른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님과같은분이 있어 한민족은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다고 생각되는군요. 감사드립니다. 화이팅!! 힘내세요!! 화이팅 !!
왜곡이나 일쌈는 인간을 조상으로 모시느니 위대한 역사를 지키는 분을 조상으로 모시겠다
광해군이 니쁜분이 아닌것은 아는 사실이며 세종대왕아니면 지금 한글이 없었다 계다가 주원장은 함경도사람이며 당의 이세민은 선비족입니다. 중국은 우리의 민족이지
다른나라가 아닙니다. 터키,헝가리가 다른나라?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국가다. 흉노족 훈족 헝가리
조상을 부정하는 것은 부모를 부정하는 일이며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국가를 부정하는 민족을 부정하는 일인데
조선이라는 국가가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으며 다만 사림들이 무인의 수렵민족의 기마민족의 우리를 유교로 만든것이지 쯧쯧
이조,이씨조선이라고 왜놈이 왜곡하니 단재신채호가 자살할 일이며 박은식,안확선생이 우리가 무엇때문에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하며 눈물을 흘릴 일이군요
이씨왕조,이조백자,이조닭갈비라고 대한민국에서 우겨봐라 그러면 네티즌들이 뭐라고 하나
그떄 처럼 악플단 네티즌을 모두 소송하려고? 국민전체를 소송하려고? 완섭아 정신차려
친일파를 위해 변명을 하는구나
우국지사들이여님은 위글에서도 알수있드시 중국인입니다. 중국인이 한민족을 논할수있겠지만 반드시 중국위주로 논하는법입니다. 전주이씨는 그래서 이소역대 중국은 어버이의 나라라는 논리죠. 이곳에 저런것들이 노니 무슨 한류열풍입니까? 중류열풍이지....
중류열풍? 고려시대의 이제현은 그럼 무엇이며 충렬왕은 무엇이더냐,신라는 또 왜 중국을 섬겼느냐 사대부들이 갑자기 생겼느냐?
조선은 자주독립국가이며 고조선이전의 역사를 부정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궁예의 후고구려라는 명칭과 대고구려국이라는 국가를 생각해 볼때
우리민족은 한번도 뿌리를 버린적이 없거니와 중국이 조선의 족보를 왜곡했던 사실을 아는지?
임시정부세워지기 전에 독립운동가들은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고종황제 망명,의친왕과 대동단이 그것이며
데라우치가 황제를 독살했던것을 아는지? 우리역사를 왜 일본기록,중국기록을 참고해야 하며 중국의 왜곡된역사를 보면서 이게 진짜구나 하면 생각하느냐
중국,일본이 배달민족에서 갈라진 민족이며 태종이 중국에 사대를 했지만 그것은 사대교린으로 언젠가는 우리는 중원을 차지할것이라는 야심이 있음을 아느냐
놀고계시내요. 그래서 중국정벌군 되돌려 중국을 정복하려한죄라는 말도안되는 죄명으로 고려황제,장군 일반인들 다 모아 20만명 다죽이고 중국을 어버이로 섬긴다는 국가이념으로 허위의 기자조선을 계승해서 500년동안 중국변방국하다가 고려후손 일본에게 결국 사라져버렸나요? 뻔뻔,가증스런 화교님들...
점점 뇌내망상이 극에달하는군요. 고려후손 일본은 먼 소리이시며? 위화도회군 의의에 대해 그토록 설명해줘도 계속해서 하악하악 대시는 님의 경지를 도저히 범접할 수 없구료;;
가제는 게편이라고 전주이씨들의 유전자는 중국인들이기때문에 하나같이 친 중국입니다. 위화도회군은 중국인이 조상인 이성계에게 대군을 맡긴 최영대장군의 실수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요. 그 후손들이 500년동안 번식해서 이나라를 아직도 지배하고있죠. 이씨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끝나야합니다. 이명박은 안돼
최영이 무슨 실수로 이성계에게 대군을 맡기3? 실상 지휘체제가 애초부터 누구에게 있었는데 그런소리를 하십니까? 아예 그냥 소설을 쓰실려면 최소한 사실관계는 정확히 아시고 쓰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