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디자인 지원사업
종이배 모양의 욕조, 돛을 닮은 하이패스 단말기, 헬멧 같은 모발 치료기…. 지난 12월 9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대덕테크비즈센터(TBC)에서는 감각적인 디자인을 입은 신제품들이 전시됐다. 이날 행사의 공식 명칭은 '2010 대덕특구 기술사업화 성과보고회'. 중소벤처기업들의 경쟁력 있는 제품에 디자인을 지원해주는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대덕특구본부) 토탈디자인지원사업의 결실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 ▲ 디자인은 제품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을 넘어 개발과 생산, 마케팅의 영역까지 범주를 넓히고 있다. 사진은 화이트스파의 쿠션 욕조 ‘바르코’.
㈜원테크놀로지의 탈모 치료기 '오아제'는 심플한 헬멧 모양으로, 거실의 디자인 소품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화이트스파의 쿠션 욕조 브랜드 '소프트스톤'은 종이배와 꽃잎 모양의 욕조를 각각 선보였다. 무선통신 전문기업인 ㈜에어포인트는 돛단배 또는 사각 접시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의 하이패스 단말기를 출시했고, ㈜퍼티스트가 내놓은 퍼팅 연습기 '플레이 퍼티스트'는 우드의 라인을 응용한 디자인으로 시선을 끌었다. ㈜씨에이치씨랩(CHC LAB)은 세련된 모양의 실험실용 시스템 가구를, 종합 보안 서비스업체 ㈜달스코리아는 거부감을 줄인 디자인의 보안용 감시카메라를 공개했다.
- ▲ 1 온라인 음원을 입체 음향으로 구현하는 스피커. 아직 상품화 되지는 않았다. 2 달스코리아의 CCTV 카메라 ‘달스 프라임 돔 카메라’. 3 소라 모양의 MP3 플레이어. 출시 전이다. 4 원테크놀로지의 탈모 치료기 ‘오아제’. 5 실제 종이 사전의 모양과 비슷하게 디자인한 전자사전. 출시되지는 않았다. 6 퍼티스트의 골프 퍼팅 연습기 ‘플레이 퍼티스트’.
대덕특구본부의 토탈디자인지원사업은 국내 중소기업들의 당면 과제 중 하나가 디자인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실제 국내 중소기업 제품들은 상당한 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저급한 디자인으로 인해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는 "삼성, LG,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대기업은 세계적인 수준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수준은 한참 뒤처진다"면서 "대기업 중심의 디자인 파워가 시급히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할 때 디자인은 매우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일례로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트렌드모니터(trendmonitor.co.kr)가 전국의 만 25세~49세 여성 103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2010년 6월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69%의 응답자가 '가전제품 구입 시 집 안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제품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디자인 분야 투자는 저조하다. 2010년 5월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발간한 보고서 '우리 기업의 디자인 활용과 기업성과'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매출액 대비 디자인 투자 비중은 1%에 불과하다. 그나마 투자 금액 상위 15개사의 투자 총액 중 94%가 대기업에 편중되어 있어 중소기업의 디자인 분야 투자는 상당히 뒤처진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2년마다 발표하는 '2009 산업디자인 통계 조사'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2008년 대기업의 디자인 분야 평균 투자금액은 57억1000만원이지만 중소기업은 1억3000만원에 불과한 것.
디자인이 제품의 모양 다듬기나 색깔 입히기에 그치지 않고 제품 콘셉트 개발, 생산, 마케팅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 전략의 부재는 중소기업들에 2중 3중의 어려움을 준다. 2006년 4월 대덕특구본부가 특구 내 기업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애로 사항으로 마케팅 40.6%, 홍보 및 광고 부문이 14.7%로 중요 항목을 차지했다. 부품 기업이 대다수여서 자체 브랜드가 없고, 마케팅의 출발점인 브랜드가 없으니 제품 양산이나 마케팅 노하우를 축적할 기회조차 없는 셈. 통합 디자인 컨설팅이 절박한 이유다.
지식경제부와 대덕특구본부가 추진 중인 토탈디자인지원사업은 우수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상품화 개발이 미흡한 벤처기업을 발굴해 기술활용과 디자인 개발 및 마케팅에 이르는 종합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우수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중소기업들에게 제품의 기획, 디자인, 생산, 마케팅 전과정을 통합 지원한다. 토탈디자인지원사업의 심의 기준은 크게 독자성(Originality)과 상업화(Business)의 두 가지.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1년 6개월 이내에 제품 출시가 가능한 업체들이 지원 대상으로 선발, 컨설팅 지원이 이뤄졌고, 2010년 6개의 제품이 완성된 데 이어 순차적으로 나머지 결과물도 선보일 예정이다.
출시된 제품들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어떨까? '오아제'를 출시한 원테크놀로지의 장윤성 마케팅본부장은 "제품 출시 2개월 동안 11억원의 매출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기대에 비해 다소 미흡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소비자나 바이어들의 반응이 좋아 조만간 주문이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화이트스파의 한윤수 영업부장은 "최근 제품의 판매 요인 추세가 디자인, 품질, 가격의 순이어서 이번 지원 사업의 결과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 "새로 선보인 '소프트스톤'의 상담 문의가 동류의 기존 제품에 비해 열배 정도 많아 조만간 큰 결실을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며 기대감을 표명했다.
이번 디자인지원사업으로 출시된 제품들은 12월 초 현재 24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내년 시장 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3년 이내에 1,000억 원 이상의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대덕특구본부 측의 설명이다.
'고구마 세탁기'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이 세탁기는 일반 세탁기에 비해 배수관이 넓고 필터 구멍이 크다. 고구마를 씻고 난 후 진흙이나 찌꺼기가 잘 빠지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매년 10만 대씩 팔리는 제품이다. 제품의 탄생 스토리는 이렇다.
1996년 중국 쓰촨(四川)성의 한 농민이 "세탁기 배수관이 자주 막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집을 방문한 직원은 원인을 발견했다. 이 지역 농민은 대부분 고구마를 재배하는데, 수확한 고구마를 세탁기로 씻어내고 있었다. 진흙과 찌꺼기가 문제였다. 직원의 보고를 들은 CEO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학력 수준이 낮은 농민들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교육시켜라? 아니다. "고구마 세탁기를 만들라"였다. 크게 어렵지 않았다. 디자인만 조금 바꾸면 되니까. 4명의 연구원이 1년 연구 끝에 1998년 고구마 세탁기가 탄생했다. 고구마뿐 아니라 감자, 채소, 조개까지 씻을 수 있는 세탁기.
회사 이름은 중국의 1등 가전업체 하이얼 그룹, CEO는 장루이민(張瑞敏)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연구 대상까지 됐다는 바로 그 회사다. 올해 '뉴스위크'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혁신 기업에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 ▲ 지난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플 본사에서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CEO)가 노트북 '맥북에어'의 최신 모델을 공개하고 있다.
■디자인이 제품 혁신을 주도한다
과거 디자인이 제품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이 제품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누드 디자인의 컴퓨터(아이맥), 패션 아이템 같은 MP3(아이팟) 등 애플 제품은 '혁명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애플은 디자인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맞춰 기술을 개발한다. 나이키나 인텔 등은 최근 MBA보다 디자인스쿨 졸업생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에 맞춰 하버드나 런던비즈니스스쿨 등 유명 MBA도 디자인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일본의 생활용품업체 '무인양품(MUJI)'의 히트 상품 중에는 환풍기 모양의 CD플레이어가 있다. 마치 선풍기 같다. 벽에 걸 수 있고 줄을 당기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심플한 디자인으로 벽에 걸어놓아도 손색없다. 줄을 보면 누구나 잡아당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관찰해 만든 제품이다. 'CD플레이어는 바닥에 놓아두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도 벗어 던졌다. 이 제품의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는 삼성전자의 패션넷북 'N310'을 디자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가 노트북으로 미국 내 PC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델 컴퓨터. 혁신 제품도 없고, 신사업 개척도 못한 채 성장률은 점점 떨어져만 가던 2007년, 창업주 마이클 델은 사장으로 복귀한다. 불황 타개책은 '디자인'이었다. 그는 나이키의 유명 디자이너 에드 보이드를 영입한다. 이들의 야심작은 바로 '디자인 스튜디오'. 노트북 커버를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는 시스템이다.
유명 화가, 장난감 디자이너, 그래픽 아티스트가 직접 디자인한 작품만 249종류다. 델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갖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 여럿 있다. 델은 "당신만의 컴퓨터를 만들어준다"며 홍보한다. 이 노트북을 사려면 85달러를 추가로 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높은 인기 덕에 애초 58종류이던 커버를 249종류까지 늘렸다.
- ▲ 다양한 컬러를 채용한 델의 신형 노트북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스포츠용품업체 푸마는 1998년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와 협업을 통해 패션 브랜드로 변신, 두 자릿수 고성장을 유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간 기술 격차가 작고, 가격 경쟁이 심한 산업의 경우 디자인이 가장 강력한 차별화 수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엔 눈에 보이는 제품만이 아니라 '서비스'까지 디자인한다. 미국의 유명 디자인 컨설팅업체인 아이데오(IDEO). 애플의 최초 마우스를 비롯 3000개 이상 제품을 디자인한 곳이다. 마이크로소프트, 펩시, 피앤지(P&G) 등이 주요 고객이다. 1991년 설립 초기에는 제품을 디자인했지만 최근에는 조직과 서비스, 전략 컨설팅을 한다.
아이데오의 히트작 중 하나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잔돈을 넣어두세요(Keep the Change)' 서비스, 무려 1200만 명의 신규 고객을 유치한 프로그램이다. 고객들이 물건 값을 낼 때, 전체금액 중 달러 이하 단위를 자동 반올림하고 차액을 고객 계좌로 이체하는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3.5달러짜리 카페라테를 사고 4달러를 내면 50센트가 자신의 예금 계좌에 저축된다. 버려지는 잔돈을 저축으로 연결하는 시스템, 이 '서비스 디자인'으로 뱅크오브아메리카는 70만 개의 당좌예금, 100만 개의 보통예금 계좌를 새로 개설했다.
- ▲ 소니 디지털 사진액자 'S-Frame' / 애플 아이팟 나노 6세대
■디자인 최고책임자(CDO) 전성시대
디자인을 바꿔 유통 채널까지 개척하는 경우도 있다. 소니(Sony)의 디지털 사진 액자 'S-Frame' 이야기다. 소니는 소비자들이 제품 포장재를 뜯어 이미지 데이터를 저장한 후, 다시 선물을 하기 위해 재포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니는 제품 패키지를 그대로 선물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포장 상자 형태로 디자인했다. 상자 외부는 매끄러운 회색으로 하고, 로고는 엠보싱 처리를 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연말에는 푸른 봉투에 싸서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하자는 캠페인까지 전개했다. 그 결과 S-Frame은 2007년 3만 대에서 2008년 23만 대를 차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액자는 미국에서 '선물용' 이미지를 내세워 디지털 전문점이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점에서 판매된다.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애플, 나이키, 피앤지(P&G), BMW 등은 디자인 최고책임자(CDO, Chief Design Officer)를 부사장급으로 임명한다. CDO는 제품개발과 기획, 생산과 판매에도 함께 참여한다. 버진 애틀랜틱 항공의 경우 CDO가 비행기 내 인테리어, 공항 라운지, 직원 유니폼까지 관여한다. 아우디는 '듣기 편한 엔진 소리'를 위해 차종에 맞는 소리를 디자인하는 직원까지 두는 등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후각 디자인 경쟁도 치열하다.
하지만 과도한 디자인 집착은 실패를 낳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자전거 디자이너 마이클 킬리언이 만든 '옆으로 달리는 자전거'처럼. 이 자전거는 핸들과 바퀴가 양옆에 달린 독특한 형태로 스노보드 같은 자전거를 표방했지만,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해 상업화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