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수분서 밑 빠진 항아리 신세 전락
대인시장은 한낮인데도 햇볕 한 줌 제대로 들지 않았다. 햇볕과 비를 막기 위해 쳐놓은 차양이 오히려 그 어떤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 역설을 초래한 것이다. 온종일 어스름한 잿빛 대기가 내려앉은 공간은 마치 거대한 뱀의 아가리 속인 냥 써늘한 한기로 가득했다.
일찌감치 인적도 호객소리도 끊긴 시장골목에는 무거운 정적만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댔다. 하루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상인들은 고단한 삶에 치어 점멸하는 백열등 아래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게다가 나날이 늘어나는 빈 점포들과 서둘러 철시한 상가들에서 영양공급이 결핍된 시장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눈 내리는 대인시장
늘 마르지 않을 ‘화수분’ 같았던 대인시장이 ‘밑 빠진 항아리’ 신세로 전락한지 오래다. 한때 양동시장과 광주의 상권을 양분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명성은 흔적마저 온데 간 데 없다. 그 자신 역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좀처럼 예외가 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한번 지나간 영화는 쉽사리 재현되지 않았다.
대인시장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과일공판장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부터다. 급기야 전남도청과 광주시청이 이전하면서 ‘도심공동화’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곧이어 대기업 유통업체들이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앞세워 재래시장과 골목상권을 먹어치우고 있는 형국이라 이제는 존립자체를 우려해야 할 상황에까지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여전히 옛사랑이 드리운 그림자의 발치에서 ‘그 시절’의 향수를 곱씹으며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내는 중이다. 그것도 현재의 처지가 구차하고 비루할수록 ‘아 옛날이여!’라는 회고조의 사설은 ‘전설’의 경지로 승화되며 그 빛을 더했다. 기실 상인들에게 ‘왕년’은 인생을 통틀어 남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자기긍정의 유일한 순간이었고 생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던 확실한 버팀목이자 가장 뚜렷한 삶의 지문(指紋)일 터였다.
하지만 상인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은 ‘화려한 봄날’도 가고 ‘옛사랑’의 그림자마저 희미해져 버린 ‘쇠락의 계절’이라는 사실을. 그런데도 누가 먼저 나서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치 봇물 터지듯 상인들 내부부터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상인들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는 말이다.
필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장에 발을 들였을 당시와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게다. 시장 상인들이 지금까지 가슴 속 깊숙이 담아둔 ‘옛 영화’가 항용 절절하고 애틋하게 보이는 이유다.
2. 대인시장, 예술 색 더해 2막 1장 새 공간 탈바꿈
지난해 9월부터 3개월 동안 230여명 남짓한 대인시장 상인들을 만났다. ‘2010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일환인 ‘대인시장 대발견 아카이브’ 작업을 위해서였다. 네 명의 작가가 참여해 대인시장 상인들을 전수조사한 뒤 그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였다.
대인시장에는 반평생 이상 장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천생 장사꾼에서부터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한 초보 장사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생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 하듯 그들이 복기해낸 기억 속에는 꼭 그 수만큼의 희로애락이 서로 교차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십 년의 세월동안 모두가 같은 듯 다르게 저마다의 세월을 살아낸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중첩될 때 상인들의 얼굴은 하나가 되
야시장 풍경
기도 했고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꿈을 꿀 때 상인들의 얼굴은 수백 개로 환원됐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곧 자식에게 투영돼 대물림되기도 했고 다른 형태로 지양되기도 했다. 상인들의 삶은 곧 시장이었고 시장은 개인들의 삶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수밀도의 가슴이었다.
광주시 동구 대인동과 계림동의 경계에 위치한 대인시장은 1965년 5월 첫발을 내딛었다. 현 동부소방서 부지에 자리했던 옛 광주역(1922~1969)과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시외버스터미널(1975~1992) 덕에 시장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랬던 대인시장도 1993년 터미널이 이전한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2004년 광주시청이 떠나간 곳에 홈플러스가 터를 잡으면서 급격하게 쇠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전수조사를 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상인들이 보여준 철저한 ‘자기부정’의 언술이었다. 적어도 대인시장은 상인들에게 ‘생명의 마지막 보루’이자 ‘패자부활전’을 가능하게 했던 ‘자아실현의 장’이었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장사꾼으로서 자기이력을 부정하고 자식들에게 장사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함으로써 ‘자기존재’에 대한 분열된 자화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대인시장이 2008년부터 ‘예술시장’으로 탈바꿈을 위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희망을 말하기엔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렇다고 절망을 단정하기에도 이르다. 희망을 담금질하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는 한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모쪼록 오늘 내놓은 이 책이 대인시장의 마지막 지문(誌文)이 아닌 새로운 희망보고서가 되기를 바란다.
야시장 풍경
첫댓글 앞만 보고 살아온 내 인생...
요즘 들어 친구들 삶을 글로 볼수있어
설레기도 하네~~자주 방문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