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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팔뜨기 채제공 초상
채제공(1720~1799년)의 초상화도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하다. 그는 정조 치세에 10여 년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탕평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쟁을 진정시켰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정조의 문예부흥 정책을 주도했다. 조선 전기의 명재상으로 황희가 언급된다면 후기에는 그 영예가 채제공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24세이던 1743년(영조 19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1771년(영조 47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788년(정조 12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고 3년 동안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獨相)으로 재직했다. 이어 1793년 드디어 영의정에 등용됐다.
채제공의 초상화는 정조의 극진한 배려로 △정장관복인 흑단령본 △오사모에 서대를 두르고 담홍색 포를 입은 시복본 △의례용인 금관조복 차림의 초상화와 밑그림으로 사용됐던 유지초본 등 다수가 전해온다. 그의 초상화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당대국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뛰어난 실력의 어진 전문 화가인 이명기가 작업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에서 채제공의 양눈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시(斜視)'인 것이다. 비록 사팔뜨기였지만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독보적이었다. 채제공이 죽었을 때 정조는 "50여 년간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타고난 인격이 우뚝해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두려움이나 굽힘이 없었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다 그만"이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곰보투성이 구인후 초상(좌)과 곰보자국에 검은 낯빛의 오명항 초상(우)
조선 초상화에는 곰보 얼굴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묘사돼 있다. 천연두는 종두법이 개발되기 전 호환보다 무서웠다. 천연두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고 운좋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낙인처럼 평생 얼굴에 흉한 곰보 자국을 갖고 살아야 했다.
삼국사기에 "선덕왕 6년(785년)에 왕이 갑자기 진이 돋는 병에 걸려서 13일 만에 죽었다"는 천연두 기록이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는 50여 차례 천연두가 언급돼 있을 만큼 천연두는 흔하고 두려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무장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병자호란 때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했던 구인후(1578~1658년)는 얼굴에 마마 자국이 가득했지만 좌의정에 올랐으며 검은 낯빛에 역시 심한 곰보였던 오명항(1673~1728년)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우의정에 발탁됐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남은 사람 중 유명 인사로는 김정희, 이서구, 김한철, 김육, 서유구 등을 꼽을 수 있다.
▲ 애꾸모습의 장만 초상
왜란과 이괄의 난, 호란으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대에 이르는 동안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의 국방 관련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탁월한 실무능력을 보였던 장만(1566~1629년)은 특이하게도 '안대'차림을 하고 있다. 그는 이괄의 난 때 병든 상태인데도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밖에서만 지내다가 왼쪽 눈을 잃게 됐다. 정상인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애꾸 상태로 그렸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한국초상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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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회가들이 진솔했군요 요즘은 사진도 수정을 해대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