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마태오 9,9-13
기대하지 마라, 이런 개는 꼭 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에 기분 나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하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왜 바리사이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 마음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로 치자면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을 물 수 있는 개들과 같았습니다.
그런 개 무리 안에 섞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994년,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를 저질러 현재까지 사형수로 복역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존속 살해범을 논할 때 첫 손으로 꼽히고 있는 범죄자가 있습니다. 박한상입니다.
박한상은 사실 태생부터 상당히 안 좋은 인성을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싸움질과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폭력 가해자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도박과 쾌락에 빠졌으니 돈도 안 주며 늦게서야 그를 질책하는 부모를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떤 자녀가 나를 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푸틴은 어렸을 때 어땠을까요? 그냥 깡패였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덩치가 큰 형들과도 싸우고 다니는 동네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숙제는 나 몰라라 하고 칠판 지우개를 친구에게 집어던지고 수업 중에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 늘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문제아였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량한 애들이랑 어울리며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첩보원이 되고 싶었던 푸틴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삼보와 유도 등 무술을 배웁니다.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삼보나 유도 대회에서 우승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운동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미술로는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많은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우쭐하고 대장을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이렇게 히틀러를 평가했습니다.
“1. 재능은 없고, 성실하지 않으며 교칙에 순응하지 않고 고집이 세며 고자세임.
2. 또한 꾸지람하면 오만불손하며, 급우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함.”
히틀러는 어떤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군인이 되어 전쟁하는 중에는 자기 지배력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기에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수천만 명이 죽게 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개는 훌륭하다’를 보면 주인을 무는 개들이 나옵니다.
이 개들의 특징은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소유욕’이 큰 영구는 주인집이 자기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주인을 물려고 합니다.
또 ‘식탐’견도 여럿 나옵니다. 식탐이 많은 개는 주인이 밥을 주는데도 주인이 밥그릇을 만지면 성질을 부립니다.
마지막으로는 ‘지배욕’이 강한 개가 나옵니다.
라오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의 화풀이를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에게 하는 훈련은 그것들의 욕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들이 주인을 물지 않게 하려면 탐욕이 강한 개에게 누가 주인인지 알려주고, 식탐이 많은 개에게는 그 밥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알려주며, 지배욕이 강한 개는 물속에 집어넣어 주인에게 의지하게 만듭니다.
결국 세속-육신-마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개들에게서 나오고 그 개들이 남을 물지 않게 만들려면 그 탐욕-식욕-지배욕을 줄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구가 강한 개는 반드시 사람을 문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한 번 그것들에 빠지면 개처럼 길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강 훈련사처럼 통제해 줄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늦게서야 그를 길들이려 했습니다.
“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려면 호적을 파라.”
하지만 아들에게 물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십일조만 낼 줄 알면 다 해결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돈에 대한 욕심, 쾌락, 교만을 키우기 위해 십일조를 했습니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 내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것이고 또 먹을 것을 좀 절제하고 그리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무는 자녀로 성장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자녀로 성장합니다.
우리들도 결국 구원을 못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십일조를 삼구를 없애려는 마음으로 내도록 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마태오 9,9-13
나그네를 따뜻이 맞이합시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거수일투족은 그야말로 파격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율법, 특히 율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셨습니다.
어겼을 경우 현행범으로 몰리던 안식일 규정을 백주대낮에 보란듯이 ‘개무시’하였습니다.
당대 잘 나가던 유다 고관대작들, 뒷목이 뻣뻣하던 지도자들의 악행과 이중적 생활을 공개적으로 힐난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죄인들의 대명사였던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구원에로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명백히 선포하셨습니다.
인간 존재로 취급받지 못하던 이방인들과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사랑해주셨습니다.
당대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언행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름 ‘한 공부’ 했다고 어깨에 힘 좀 주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상종해서는 안될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 마태오의 송별연에 참석하셔서, 자연스럽게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던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을 향해 따졌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마태오 복음 9장 11절)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세리들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이자 지주였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존재, 율법이나 신앙생활, 더 나아가서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짐승같은 존재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의 일원으로 떡 하니 뽑으셨을뿐만 아니라, 세리들의 잔치에 참석하셔서 그들과 포도주 잔을 함께 기울이시니,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점입가경이라고 예수님의 대응은 더욱 충격적이어서, 마치 시원한 사이다 한 컵 마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또 다른 한 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80세 생신 때, 교황청 안팎의 고위성직자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은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교황님의 생신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이 올거라고.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당신 생신 만찬에 노숙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취임 후 첫 공식 외부 방문 행사 장소로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람페두사 섬을 찾아가셨습니다.
물론 이동하실 때는 최고급 방탄이 되는 벤츠나 BMW가 아니라 20년된 낡은 중고차를 이용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지중해 상 ‘난민들의 섬’으로 유명한 람페두사를 첫 방문지로 선택하신 이유는 곤경에 처한 난민들을 만나고,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람페두사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든 섬이었습니다.
지금 제주도 역시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이 들어와있습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멘 난민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의 언론 보도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이방인이셨던 예수님, 그리고 난민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보시고 통탄하실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멘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거부감,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예멘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런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우리들의 처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예멘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길>
2022. 07. 01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길>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난다네
가던 길 멈추고
사람을 부른다네
그 사람과 함께
다시 길을 걷는다네
길을 걸어야
사람을 만난다네
사람을 만나러
길을 걷는다네
길이 사람이요
사람이 길이라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