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위한 성웅 이순신
이데올로기란 자기 혹은 소수의 생각이나 가치를 전체의 생각이나 가치라고, 어떤 힘 — 정치권력, 금력, 무력, 필력, 명성 등 — 을 배경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한 이념과 달리 다소 또는, 경우에 따라, 매우 부정적 개념이다.
구조주의언어이론에 의하면, 글의 의미가 글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글자란 의미가價 영(0)인 기호일 따름이다. 글의 의미는, 우리가 평생을 경험하다시피, 글(언어기호)을 짜맞추어 나가는 맥락에 의해 생성 변환된다(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구조주의자 데리다의 택스트의미론). 그러므로 글 잘 쓰는 사람은, 물론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자신의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갑을 을로 바꿀 수도 있고 바뀐 그 을을 다시 갑으로 바꿀 수도 있다. "A pen is mightier than a sword(文이 武보다 강하다)"라는 세익스피어의 언명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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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가 상당한 대구의 한 非부고 친구가 근자에 폰으로 길 글을 써 보냈다. 폰으로 긴 글 쓰기가 얼마나 힘든가. 술로 인한 수전증이 심해, 폰으로 그렇게 긴 글 쓰는 것 상상도 못하는 학수이로서는 그의 그 이데올로기적 정열이 놀랍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발견>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다: “이순신장군은 놀랍게도 일제시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과연 그런가?] (…) 조선인들도 존재 자체를 모르고 땅 속에 묻혀있던 이순신장군을 살려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입니다.”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일화, 러일전쟁승리축하파티에서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에 관해 발언한 내용을 감동 깊도록 소상하게 썼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적 글로 마쳤다:
“도고의 그 발언은 즉시 조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 지금도 일본 지식층에서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념(念)을 숨기지 않습니다.
(…) 일본인들은 (…)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등 자국을 패퇴한 적국의 장군이라도 존경할 영웅은 존경합니다[냄세 나기 시작]. 이러한 면은 우리들과 좀 차별화됩니다[이것이 바로 맥락적 의미생성에 의한 단정. 이 단정을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받아드린다. 생각을 가다듬어 사실을 바라보면, 일본인 중에 안중근을 존경하는 일본인이 소수 몇 퍼센트 있고 또한 한국인 중에도 이등박문을 당시 조선에서의 치적을 높게 평가해서 존경하는 한국인이 소수 몇 퍼센트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는 전자 소수를 상당히 많은 수인 것처럼 말을 짜맞춘다. 또 어떤 이데올로기는 후자 소수를 상당히 많은 수인 것처럼 말을 짜맞춘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당신은, 당신이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해 숙고한다].
(…) 결론으로 우리의 영웅 이순신장군은 1차로 일본인 도고가 어둠속에서 이르켜 세웠고, 2차로 박정희 대통령의 숭모로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의심과 음해를 끝없이 자행하던 선조 같은 왕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 또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한 문재앙과 같은 재앙이 이 땅에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루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이순신 장군 같은 귀인이 등장하여 부정선거를 척결하고 동물농장 같은 국회를 청소하는 둥[지하의 장군께서 매우 어색한 웃음을 지으신다!] 때가 이른 것 같아 희망의 끈을 꼭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수욜입니다![그는 전혀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냄새를 슬적 넣은 이 신파쪼 표현은 그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그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평소 그의 글은 객관논리적이며 매우 드라이하다] 샬롬” 이렇게 끝을 맺었다.
결론은, 기를 성웅 이순신으로 해서, 기-승-전-문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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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고 제독 발언에서 당신이 느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감동은 어떠했는가?
기-승-전-문재앙이라는 결론을 읽은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감동은 어떠한가?
나는 감동에 있어 양적으로, 특히 질적으로 큰 차이를 느낀다.
나는 그가 자신의 텍스트의미론적 필력을 믿고 그 이데올로기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성웅 이순신을 이용 또는 남용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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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갇힌 사람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외침을 지식인의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면서 그 외침에 대해 묵묵한 주위 사람들을 비판한다. 기회주의, 눈치주의, 비검함이라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 허허…
많은 사람이 행동하는 양심이랍시고,
한쪽은 기-승-전-문재앙.
다른 한쪽은 기-승-전-윤썩을열.
그 친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의식적 정신구조(psychic structure) 작용에 의해 — 라깡이 말하는 인류 보편의 그 구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룸 —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점점 강하게 내세운다. 이것은 그가 우리 조국을 둘로 쪼개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더욱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쪼갠다 하고 의식적으로 쪼개는 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수이 말고는 자기 주위 친구들 모두가 기-승-전-문재앙인지라, 기회다 싶으면 기-승-전-문재앙을 앞장서 외치면서 으쓱한다. 무의식적 정신구조의 작용인지라 도무지 막무가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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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문제앙을 외치는 이쪽은, 저쪽을 손가락질하면서 대한민국을 '꼴통'적 이데올로기로써 둘로 쪼개고 있다고 개탄한다. 기-승-전-윤썩을열을 외치는 저쪽 역시 이쪽을 손가락질하면서 대한민국을 '꼴통'적 이데올로기로써 둘로 쪼개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도 양 꼴통 모두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나는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소위 중도층 비율이 30%~40%이기 때문이다.
양 꼴통 간의 승패가 결국은 그들에 의해 결정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양 꼴통 중 어느 한 편에 의해 승패가 결정 난다면... 상상만해도 암담하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학수이 니는?
일반적 의미에서 보수냐 진보냐 하면, 소생은 사안에 따라 보수이기도 하고 진보이기도 하다.
정치경제적으로 우파냐 좌파냐 하면, 소생은 신자유주의를 발전적으로 비판하는 중도좌파(Centre Left)이다.
이것을 종합해서 소생을 학수이틱 중도파라 할 수 있을 런지, 허허...
민주 대한민국의 진정한 공화(共和)적 발전을 위해[共和, 이 말에 노틀들 또 금방 팍 돌아선다. 아아—]
중도층 만세!
학수이틱 중도층도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