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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루카 1,57-66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57-66
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와 '본성'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자 드라마인 『뿌리(Roots)』에 아주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옵니다.
백인 주인은 그에게 '토비'라는 노예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며 강요합니다.
"네 이름은 뭐야?" "쿤타 킨테!"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을 외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어 몇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름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뿌리 (아프리카 전사)와 영혼을 잃고 백인의 소유물(노예 본성)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한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습이자 혈통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단호하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즈카르야는 처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핏줄을 이어받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 '요한(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순간,
아기의 본성은 '인간 즈카르야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주는 대상이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 관계의 신비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아",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담은 이름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로 가서 '꽃',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책임지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며 사느냐'입니다.
개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개가 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개를 사람 대하듯 할 수 있지만, 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짖거나 문다면) 결국 개일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잊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셨습니까?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센'이라는 가명을 줍니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부모님과의 기억,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이었습니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릴 뻔하다가, 하쿠의 도움으로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녀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모님을 구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나의 근원인 부모님과 연결되는 생명줄임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전쟁터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다 잡혀 온 병사를 만났습니다.
대왕이 이름을 묻자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도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용기와 정복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쓴다면 그 본성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우리 본성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뜻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이 거창한 이름을 받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절뚝거리며 형 에사우에게 나아가 일곱 번 절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여 뒤에 숨는 비겁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이긴 사람답게 당당하고 겸손하게 문제와 직면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하느님을 이긴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즈카르야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줌으로써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이것입니다.
세례명을 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만으로는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 세례명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프란치스코라면 가난을 사랑하고, 요셉이라면 의롭게 행동하며, 마리아라면 순종하십시오. 이름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거룩한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1.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와 새 창조의 예표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다(59절). 구약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표징이었지만(창세 17,12),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할례는 여드레째 되는 날에 이루어졌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여드레째 되는 날, 곧 주일에 부활하시어 새 창조의 시작이 되심을 예표한다.”(Epistula ad Fidum, 64) 따라서 요한의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무가 아니라, 새로운 계약과 부활의 빛을 미리 드러내는 사건이다.
2. 이름의 신비: 요한(은총)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친족들의 전통을 거슬러 아이의 이름을 “요한”(하느님의 은총)이라 정한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의 이름은 그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은총을 뜻하며, 그가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을 예고한다.” (Homilia in Matthaeum, IV,6) 요한은 이름 자체로 이미 하느님 은총의 증언자이다.
3.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확정하는 순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한다. 믿지 못했던 사제가, 아들의 탄생으로 믿음을 회복한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묵상한다. “말씀을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는, 은총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다시 말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닫으셨던 입술을 은총이 열어 주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I,34) 즉, 요한의 이름 안에 담긴 은총이 즈카르야의 혀를 풀고, 찬미로 이끌어 준 것이다.
4. 백성의 두려움과 경외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65절). 이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경외심이다. 요한의 탄생이 이미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의 기적적 탄생은 단순히 한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시작하셨음을 느꼈기 때문이다.”(Sermo 293,3)
5. 영성적 적용: 길을 준비하는 삶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그의 사명은 언제나 단순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성탄을 준비하면서 요한처럼 살아야 한다. 할례가 새 계약을 예표하듯, 우리는 세례로써 새로운 창조 안에 산다. “요한”의 이름이 은총을 드러내듯, 우리의 존재도 은총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즈카르야가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했듯, 우리의 입술은 감사와 찬미로 열려야 한다. 이웃이 경외심을 가졌듯,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는 말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닦는 삶이었다. 오늘의 신자들도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Jesus of Nazareth, vol.1)
요한의 탄생과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례가 아니라 새 창조의 예고이며, 이름 속에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그의 탄생은 즈카르야의 찬미를 끌어내고, 백성 안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의 모범이 되고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새로운 시간이 매번 내게로 옵니다. 이 시간을 사용하기에도 벅찬데, 과거의 시간까지 안고 있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의 새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이 담아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병으로 투병 중이신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분,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암 투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제 미련도 없다.”
일주일 뒤, 신부님께서는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후회 없음은 그만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후회 없이 지금을 잘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따르려 하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장남의 이름은 가문의 정체성을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습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관습을 깨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습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행위는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사의 예고를 이제 온전히 믿고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의 순간, 닫혔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관습을 깨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너의 길을 가락.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단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2.23.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를
향합니다.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의 때가
왔다는
첫 신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탄생하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않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요한의 삶은
메시아가 아니라
길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빛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기다리고
존중하라는
구원의
초대입니다.
해산은 서두를 수도,
미룰 수도 없습니다.
때가 차야
일어납니다.
이렇듯
한 생명의 탄생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공동체의 역사를
움직입니다.
또한 우리 삶에는
조급함으로
앞당길 수 없는
하느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말로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라고 요한의
탄생은 말합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오늘 복음은
주인공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보다
아기의 이름을 둘러싸고 벌어진
어른들의 논쟁이야기를
더 집중적으로 전해줍니다.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상황,
하느님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즈카르야처럼
슬기롭게 극복하라는 당부라 싶습니다.
즈카르야처럼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을 벗어던지라는,
즈카르야처럼 변화되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으로 거듭나라는,
주님의 자상한 일깨움이라 듣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을 충만히 선물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할 것을 재촉하고 계신 것이라 느낍니다.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이토록 분명한 섭리의 손길을 뻗어주셨으니
거부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스스로의 마음과 몸과 영혼을 단속하여
진정 변화된 삶으로 도약하시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오늘 복음(루카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1,20)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기쁜소식, 곧 엘리사벳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소식을 믿지 못해 줄곧 벙어리로 지냈던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그의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주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탄생에 앞서 선택된 도구로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러 온 선구자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1.23-24)
이렇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으로, 그의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에 앞서 태어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화답송 후렴)
주님의 성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습니다. 내일 밤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말년에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