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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관지(一以貫之) 산보/편집
2023. 3. 14. 6:01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종체(宗體)와 제명(題名)은
원효대사가 교학을 총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신론소는 여러 경전의 사상을 수용하여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만을 함축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여러 경전의 내용을 꿰뚫어서 하나의 진리로 나타내고
있는 이 부분은 기신론 전체에 대한
총 정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대승체는
기신론 전체에 대한 바탕이 된다.
대승체를 다른 말로 나타내면
진여의 체이며, 일심(一心) 또는 법성(法性)이다.
원효대사는 여러 경전과 논전의 사상을 종합하여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맨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라고 한다.
기신론에는 여러 경전의 핵심사상이 다 들어있다.
우리 마음의 바탕은 일심(一心)이다.
일심은 우리 마음의 본체를 의미한다.
마음의 본체는 대승체를 의미한다.
대승불교 사상은 크게 두 주류가 있다.
하나는 공종(空宗)이고,
다른 하나는 유가종(瑜伽宗)이다.
<중관론>과 <십이문론>은 공종(空宗)에 속하며,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은
유가종(瑜伽宗)에 속한다.
공종(空宗)에서는 공사상을 중심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유가종에서는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현상계를 주로 설명하고 있다.
나와 더불어 있는 그대로의
현상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유식학 쪽이다.
유(有)가 모습이 있다는 쪽을 말한다면
공(空)은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쪽을 말한다.
우리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고 한 말은
불교적으로 보면 바탕에서 현상계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있다는 것(有)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無)도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또한 인연을 만나면 다시
막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있다는 것(有)과 없다는 것(空)은 항상 서로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있다는 것(有)과 없다는 것(空)을 공정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다가 없어지면
영원히 없어진 것처럼 슬퍼하고 서러워하는데
그와 같은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유(有)와 무(無)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을 망견(妄見) 또는
사견(邪見)이라고도 한다.
모습이 없어졌다는 것은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의 세계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있다는 것을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인연법을 잘못 본 결과이다.
그래서 공사상을 주장했던 용수는
있다는 것(有)과 없다는 것(無)을 공정하게 보아야
한다는 면에서 중도(中道)를 주장했다.
용수가 주장했던 공(空)은 완전히 없다는 뜻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진리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유가론>과 <섭대승론>의 유가사상도 있다는 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유식중도(唯識中道)라고 한다.
공종과 유가종은 치우치지않는 바른 견해(正見)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반야 심경>에서의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기신론은 공종과 유가종 사상을 종합하여
잘못된 견해들을 타파해서 새로이 진리를 세웠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기신론은
진리를 원만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법에
두루 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疏〕所述雖廣 可略而言 開二門於一心
總括滅百八之廣誥 示性淨於相染
普綜踰闍十五之幽致 至如鵠林一味之宗
鷲山無二之趣 金鼓同性三身之極果
華嚴瓔珞四階之深因 大品大集曠蕩之至道
日藏月藏微密之玄門 凡此等輩中衆典之肝心
一以貫之者 其唯此論乎。
서술된 것은 비록 넓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일심(一心)을 이 문(二門)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마라야산에서 설한
백팔 법문의 넓은 가르침<능가경>을 총괄하여
현상의 오염에 대해서
자성이 청정함을 보여주었고,
아유사국에서 설한 십오 장의
그윽한 이치<승만경>를 널리 종합하였고,
그리고 곡림(鵠林)에서 설한 일미의 종지<열반경>와
영취산에서 설한 둘이 아닌 진리 <법화경>와
<금광명고경>과 <대승동성경>에서 설한
부처님의 세 가지 몸(三身)의 최상의 과보와
<화엄! 경>과 <영락경>의
네 가지 수행단계인 청정한 업인과
<대품반야경>과 <대집방등경>의
넓고 큰 지극한 도리와
<대승대방등일장경>과 <대방등대집월장경>의
은밀하고도 현묘한 법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이와 같은 경전들의 진리 가운데서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맨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
▣ 일심이문(一心二門)
일심(一心)은
진여심(眞如心) 또는 불심(佛心)이라고도 한다.
불심(佛心)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을 의미한다.
부처라고 하면
석가모니불의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각자가 부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여기서는 일심이라고 한 것이다.
일심(一心)은 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기신론에서는 일심(一心)을
두 개의 문(二門)으로 나누고,
크게 세 가지의 마음 작용(三大)을 설명하고 있다.
그와 같이 기신론의 바탕이 되는 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한 것이다.
▣ 마라백팔 (滅百八)
마라 백팔은 <능가경>의 교리를 의미한다.
<능가경>은 부처님께서 마라야산의 능가성에서
법문한 내용인데 그 내용을 108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에서는 주로 마음을 많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능가경>은
유식학의 소이경전(所衣經典)으로 사용하고 있다.
<능가경>은 달마대사가 가장 좋아했던 경전이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돌아와서
제자인 혜가에게<능가경>을 전했다.
달마대사는 <능가경>을 경전 중에서
으뜸가는 경전이라고 하여
이 경에 의해서 수행하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선종(禪宗)을 흔히
능가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유사십오(踰闍十五)
유사십오는 <승만경>의 교리를 의미한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 사위국(舍衛國)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바사닉(波斯匿)왕의 딸이
아유사국(阿踰闍國)에 시집을 갔는데
이 시집간 딸의 호칭이 승만 부인(勝鬘夫人)이다.
여기 나오는 유사(踰闍)는 아유사국을 줄인 말이다.
그 당시에 부처님이 아유사국에 가서 법문을 설하셨다.
그때에 승만 부인이 부처님과 문답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승만 부인이 깨달은 내용을 부처님께서 인가하여
15장으로 엮은 것이 <승만경>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승만 부인은
역사상 가장 먼저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지도자적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승만 부인을 여성의 도인으로 높이 숭상(崇尙)한다.
재가승으로써 승만 부인과 쌍벽을 이루는 분이
유마거사이다. 유마거사도 재가에서 생활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승만 부인으로부터 <승만경>이 생겨나게 되었고,
유마거사로부터 <유마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 곡림일미(鵠林一味)
곡림일미는 <열반경>의 교리를 의미한다.
곡림은 희말라야산에 있는
사라쌍수(사(沙羅雙樹)의 숲을 말한다.
고니(鶴)들이 노니는 사라쌍수(沙羅双樹)의 숲에서
부처님은 설법을 하셨고,
또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셨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임종을 지켜야 할 가섭
이 오지 않았다.
가섭존자는 먼 곳에 가서 포교를 하다가
늦게야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이와 같은 내용이 <열반경>에 잘 들어있는데
가섭이 나타나자 이미 열반하신 부처님께서
널 밖으로 두 발을 내미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가섭에게
세 번에 걸쳐서 선법(禪法)을 전했다.
한 번은 영상회상에서 전했고,
또 한번은 다자탑전에서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사라쌍수에서 법을 전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뜻에서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한다.
원효대사는 이 <열반경>을 탐독하여
<열반경종요>라는 저술을 남겼다.
<열반경>의 특징은 일체 중생에게도 모두가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을 여기서는 일미(一味)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일미(一味)는 곧 일심(一心)을 의미하기도 하고,
불성(佛性) 또는 대승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진리는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인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일미(一味)라고 한 것이다.
하나의 진리에서 열 가지 또는 백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일미(一味)는 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말한다.
가령 강물이나 바닷물이
천 갈래 만 갈래로 파도가 친다하더라도
물을 떠나서 파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적으로 보면 물과 파도는 둘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미(一味)라는 말을 하게 된다.
▣ 취산무이(鷲山無二)
취산무이는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설하신
<법화경>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 때의 무이(無二)는 일승(一乘)을 의미한다.
삼승을 일승의 경지로 끌어 올린 것이 <법화경>이다.
<법화경>에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7 가지 비유가 있다. 그 중에
‘빈궁한 자식’이라는 궁자(窮子)에 대한 비유가 있다.
집을 잃고 걸인이 된 어느 부잣집 아들이 그 부모를
만나 재산을 물려받는다.
부잣집 아들임에도 그것을 모르고 거지로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우리 중생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
부처와 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무지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한 비유이다.
걸인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듯이 우리 중생들도
마음의 본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비유이다.
우리 마음의 본고향이 바로 진여심이다.
또 계주유(繫珠喩)라는 비유에서는
부잣집 친구가 가난한 친구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보석을 주머니에 매달아 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한 가난한 친구는 계속 거지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잣집 친구가
가난한 친구에게 사실을 말하자
그때야 주머니를 뒤져보니
주머니에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보석이 나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보리와 열반을 즐길 수 있는
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는
바로 둘이 없는 일승의 경지이다.
그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 금고동성삼신(金鼓同性三身)
금고는 ‘금광명고’라는 북에서 유래된 말로
<금광명고경>또는 <금고경>이라고 한다.
금광명고라는 북은 그 소리가 아주 오묘해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는 오묘한 북이다.
동성은 <대승동성경>을 의미하는데
대승의 경지에서는 성문, 연각, 보살,
심지어 부처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 동성(同性)이라고 했다.
<대승동성경>에서는 우리중생도
부처와 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한 경이다.
불교의 장점은 중생에서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한 관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생이나 부처가 동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행 면에서는 단계가 다르다.
대승불교에서 지전보살과 지상보살은
같은 보살이라도 수행면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전보살(地前菩薩)이 타락하여 보살행을 하지 않으면
다시 중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은 보살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중생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임시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해서
지전보살을 가명보살(假名菩薩)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상보살은 한 번 보살의 지위에 올라가면
수행을 게을리 하거나 타락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면에서 지상보살(地上菩薩)이 되어야
진짜 보살이 된 것이다.
삼신(三身)은 부처님의 몸을
세 가지 원리로 나누어서 한 말이다.
부처님의 원리적 몸을 법신(法身)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진리의 몸을 말한다.
법신(法身)이란 불성을 지닌 몸을 말하며
우리 자신도 법신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과 다른 점은 보신(報身)에 있다.
부처님은 청정한 업(無漏業)을 많이 쌓아서
부처라는 과보를 받은 몸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수행하면
보신을 과보로 받을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보신은 자기 스스로 수행해서 받은 몸이라고 해서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고 한다.
마지막 화신(化身)은 중생교화를 목적으로
여러 가지로 몸을 나투는 것을 말한다.
화신(化身)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화신불이라고 하기도 한다.
삼신(三身)은 부처님의 몸과 같은
최상의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 화엄영락사계(華嚴瓔珞四階)
화엄은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한다.
<화엄경>에서는
유심사상과 보살 수행 52위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영락은 <보살영락본업경>을 말하는데
<영락경>에서도
수행위를 철저히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과 <영락경>에서는
네 가지 보살수행계단의 심오한 업인을 밝혀놓고 있다.
여기서 심오한 업인은 청정한 업인을 말한다.
부처님과 같이 번뇌가 없는 청정한 업인을
무루인(無漏因)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최상의 과보(極果)을 받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같은 과보를 받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을
업인(業因)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보살 수행의 단계를 인위(因位)라고 한다.
무루인(無漏因)은
선악을 떠난 절대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유루인(有漏因)은 선악업을 닦는 업인을 말한다.
여기서 네 가지 단계는 십주(十住)와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과 십지(十地)를 말한다.
그러나 뒤에 십신(十信)을 덧붙여서 보살수행의
오위(五位)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 되었다.
십신(十信)은 불교를 알고 나서 내 마음에도
불성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시점을 말한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은 자기의 진여성이다.
기신론에서도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起信)은
자신의 진여성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성품(聖性)을 자기 자성으로 본다.
보살이 될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성(佛性)을 믿기 시작하면
한 단계 한 단계 수행력이 높아진다.
불교에서 수행력으로 보살을 분류하면
지전보살(地前菩薩)은 현인(賢人)에 속하고
지상보살(地上菩薩)은 성인(聖人)에 속한다.
▣ 대품대집광탕(大品大集曠蕩)
대품은 <대품반야경>을 의미하는데
<대품반야경>은 600 권으로 대단히 방대하다.
그것을 축소시킨 것이 <소품반야경>이다.
용수의 <중론>이나 <지도론>은
모두 반야경의 사상을 출처로 한 것이다.
대집은 <대방등대집경>을 의미하는데
<대집경>은
선업과 악업, 보살 사상 등을 집합해 놓은 경전이다.
<대품반야경>과 <대집경>의 넓고 큰 지극한 도리를
광탕(曠蕩)이라고 말한 것이다.
▣ 일장월장미밀(日藏月藏微密)
일장은 <대집경> 가운데 ‘일장분(日藏分)’을 말하며,
월장은 <대집경>가운데 ‘월장분’을 말한다.
일장분과 월장분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선악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장분과 월장분일장분과 월장분에는 미세하고도
비밀스러운(微密)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깊고 오묘한 법문이 들어있다.
진리는 본래 미세하고 심오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불교에서는 문(門)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부처님이 설한 법은 이 문을 통해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법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현문(玄門)은 부처님의 현묘한 법문을 말한다.
故下文言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此論之意 旣其如是
開則無量無邊之義爲宗
合則二門 一心之法爲要
二門之內 容萬義而不亂
無邊之義 同一心而混融
是以開合自在 立破無礙 開而不繁 合而不狹
立而無得 破而無失 是爲馬鳴之妙術
起信之宗體也。
그러므로 아래 문헌에서 말한다면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문과 무한한 뜻을
모두 모으고자해서 마땅히 이 논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 논의 뜻은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열어서 말하면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뜻을 근본(宗旨)으로 삼았으며,
합해서 말한다면
이문일심(二門一心)의 법을 요지로 삼고 있다.
이문(生滅門과 眞如門) 안에
모든 진리(萬義)를 수용하면서도 혼란스럽지 아니하다. 무변(無邊)의 뜻은 일심(一心)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융합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여는 것과 합하는 것(開合)을 자재하게 하고,
세우고 깨뜨림(立破)에 걸림이 없으며,
열어도 번잡하지 않고, 합해도 협소하지 아니하며,
세워도 얻음이 없는 것으며, 깨뜨려도 잃음이 없다.
이러한 것을 마명(馬鳴)의 오묘한 기술이라고 하며,
기신론의 근본바탕(宗體)이라고 한다.
~ 이 글은 정각사 경전방의 글을 인용하여
줄이거나 더하고 스마트폰으로 보기 편하게
편집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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