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말씀의 초대
레위기는 모세의
가르침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을 전한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제1독서). 최후의 심판을 예언적으로 서술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련한 이를 당신의 형제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이 복음을 장례 미사에서도 봉독한다. 죽은 이가 떠나면서 듣는 마지막
말씀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전문 분야를
공부하면서 구직에 필요한 각종 자격증도 따고 면접 준비도 열심히 한 뒤 입사 시험을 보는데 면접관의 이런 질문을 받았다. “사람은 왜 화를
내지요?” 얼떨결에 “기분 나쁘니까 화를 내는 거지요.”라고 대답했다. “기분 나쁘다고 부모나 고객 앞에서 화를 내면 안 되겠지요?” 허를 찔린
것이다. 주일 미사도 기도
생활도 열심이었던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심판대에 섰다. “나는 내 몸을 네 양식으로 내어 주었는데 너는 굶주린 나에게 자장면 한 그릇도 사 주지
않더구나?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의 모습으로 네 곁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의 허를 찔린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복음서의 친절한 정보 때문에 내 신앙생활은 이웃을 향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죽음을 맞았을 때 주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성당에는 다니면서 왜 미신을 믿고 악령의 졸개로 살아왔느냐?” 황당해서 대답했다. “저는 사주팔자 한번 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너무 바빠서 내 복음을 듣고 기도하며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텔레비전과 휴대 전화에게는 매일 두 시간 이상씩 예배하며
살았지. 내가 창조한 밤과 낮, 계절을 거슬러 달도 별도 보지 않고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겨울을 여름처럼 살며 낭비하고 핵 발전소를 지어 갔다.
내가 만든 땅에는 소유권도 국경도 그어 놓지 않았는데 땅문서는 누가 만들었고 전쟁은 왜 지지했느냐? 이웃 돕기에는 인색하면서 옷과 가방은 수십
배의 웃돈을 주고 명품을 사더구나. 누가 시켰느냐? 유혹자였지? 악령의 사주 아닌 것이 있으면 어디 내놓아 보아라!”
최후 심판에서야
찬란한 소비문화가 그리스도의 적, 곧 악령의 실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난 뒤에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신부님의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제 선배 신부님을 찍은 사진인데
점프한 장면을 찍은 것인데 표정이며 주변 경관이 너무나 멋집니다.
점프하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찍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점프해서 두 발이 허공에 머무르는 순간은 1초 남짓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을 찍어서 이렇게 멋진
사진을 남긴 것이지요.
1초라는 시간,
사실 엄청나게 짧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나게 짧은 순간에도 멋진 장면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 안에는 명장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일 년, 한 달,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 그 모든 시간 안에 명장면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과연 잘 찾아내고 있었을까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면서 포기하고,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면서 게으름을 피웠던 적은 없었을까요?
시간 자체가 주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라고 감히 말하게 됩니다. 단, 이 시간 안에 숨어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찬란한
순간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나한테는 그런 순간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기도 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런 이들은 절대로 불평불만의 삶 속에 머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미리 예언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의 결과로 불붙는 지옥이 아닌 주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의 시간에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미래를 정말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과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매 순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가장 작은이들을 무시하지 않고 바로
지금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미래를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공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시간에 내가 해야 할 미래를 위한 준비를 생각하는 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람은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뻐하기 위해 태어났다(폴 클로델).
시간 참 빠르다.
저는 부모님께서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또 편찮으셔서 주일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어제도 다른 주일과 마찬가지로 부모님 집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갔지요. 그런데 젊고 예쁜 여자 한 명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제 큰 조카의
여자 친구입니다. 결혼 약속까지 한 사이이기에 어제 미사 시간에 맞춰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큰 형님의 장남인
이 조카는 저게 있어서 첫 조카이며 동시에 영세 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틋한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삼촌~~’하면서 제 품에
안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커서 결혼 하겠다고 여자 친구도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서 다시금 시간의 빠름을 느껴봅니다. 그런데 저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포함해서 가족 모두가 이렇게 인상도 좋고 예쁘고 착한 아이가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시간 참 빠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천천히 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화살처럼 ‘휙’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나갈 시간은
어떨까요? 이 시간 역시 ‘휙’ 지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시간 참
빠르다’라고 말하면서 아쉬워하기보다는, 그 빠른 시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빠른 시간에 대비해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
것이니까요.
예수님의 디지털식
식별법
-이기정신부-
감정은 우리
생활에서 대부분을 차지하여 나를 제압하고 있다시피 합니다. 디지털 개념은 사실 생활과 밀접한데도 아날로그인 감정에 밀려 있습니다. 나와 부모와의
관계, 살았다 죽었다, 믿음 불신 등이 디지털 개념이지요.
예수님은 종말에
양과 염소를 가르듯 이라고 디지털식 장면을 표현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다른 애들과 구분하듯 예수님도 선인들을 그리 보시는 겁니다. 불우이웃을
사랑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디지털식 식별법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오
25,32)”
은혜로운
회개의 삶
-양승국신부-
이제
본격적인 사순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 사순시기에 가장 역점을 두고 노력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바로 회개의 삶일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일까 한 며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회개란 것,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더군요. 물론 우리 모두 회개가 무엇인지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부족했던 삶에 대해서 가슴 치는 행위, 그릇된 길을 접고 올바른 길로 방향을 전환하는 행위, 본의
아니게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던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는 행위...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회개는 더 복합적이고 더 총체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회개는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떠나서 살아온 한 고달픈 영혼이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대륙에 닻을 내리는 위대한 행위입니다. 회개는 작고 미약한 인간 존재지만
마음의 활짝 열어 크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대단한 행위입니다.
또한
회개를 통해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한 인간 존재가 영원한 불변의 존재로 탈바꿈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회개를 통해 100% 죽을
운명인 한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은총을 부여받습니다. 회개를 통해 산산이 부서져 폐허가 된 한 인간존재가 새집처럼
리모델링됩니다.
회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역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만 특별히 베푸시는 가장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강아지가 나쁜 습관을 고쳤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에 들었다는 말은 아직도 못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하나! 회개의 주인공이 우리 죄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회개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한 죄인의 회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다.”(잠언29장 1절)는 사실입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지난날도 돌아보고, 가슴도 치고, 판공성사도 보며 나름 회개했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 꼭 기억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한
인간의 회개는 회개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결실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나무에 반드시 열매가 열려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누군가가
회개했다면 반드시 그 결과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 그로 인한 새 생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회개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동강령을 명확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4~36절)
평범한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 다시 말해서 배고픈 청소년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 마땅히 머리 눕힐 방 한 칸조차 없어 괴로워하고 있는 젊은이들,
노숙자들에게 방 한 칸 마련해 주는 일, 무의탁 중환자실을 찾아가는 일, 무연고 소년원생과 수인들을 면회 가는 일,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사는 일이며, 하느님께서 베푸실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심부름꾼
-이수철신부-
위대한
심부름꾼은 주님의 사랑의 심부름꾼입니다.
진정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심부름
잘 하는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전
읽은 '우리 마을 해결사, 신세대 이장님들'이라는 기사가 참신했습니다.
-'마을
이장' 하면 연륜 많은 어르신이 연상이 되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2~30대
이장이 속속 등장하면서 젊은이들이 떠나는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혼자서
비료포대를 져 나르고, 할아버지 할머니 안마에 민원 해결까지,
젊은
새내기 이장의 활약에 마을 어른들은 요즘 신이 났다.
"마을의
파수꾼으로 어머니 아버지들 다 모시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야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달 전, 마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이장에 추대된 경남 산청군 대장마을 37살 정원상 씨의 말이다.
토박이
농사꾼으로 마을현황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소통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절을
해주고 싶더라고. 어찌나 고맙던지.“
한
마을 주민의 반응이다.
.산
너머 전남 구례군 피아골의 처녀 이장 29살 김미선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누빈다.
대학
졸업 후 스스로 고향에 돌아와
이웃
간 크고 작은 갈등을 중재한 뒤 주민들의 요청으로 4년째 이장을 맡고 있다.
마을에선
척척박사, 똑순이로 불린다.
"지리산을
신랑 삼고 섬진강을 애인 삼아 살거든요.
그래서
도시로 떠나지 않고 여기서 제 꿈을 펼치기로 한 거고요.“
처녀
이장 김미선씨의 고백이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고향을 지키는 20~30대 이장은 어느새 250명을 웃돌고 있다.
농촌
지역의 급속한 노령화와 귀농 귀촌 현상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되며
톡톡
튀는 신세대 이장들의 등장에 침체된 농촌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수도회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상들이
40-50대 한창 심부름 하기에 좋은 연령대에 뽑힌다는 것입니다.
아주
긍정적 현상입니다.
장상은
바로 주님의, 공동체의 심부름꾼이기에
젊고
의욕있고 체력 좋고 똑똑하고 부지런해야 공동체 형제들의 심부름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랫사람 심부름시키는 장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잡다한 일들을 손수 심부름하기에는 아주 적격의 젊은 장상들입니다.
심부름은
비단 장상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곳곳에는 솔선수범의 사랑의 심부름꾼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심부름꾼들이
공동체에
활력을 넣어주며 공동체가 원활히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줄 때 비로소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그러니
심부름꾼이 되지는 못할망정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다.“
바로
광야인생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잘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보이는 사람이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들이 공동체의 살아있는 보물입니다.
모두의
얼굴이 다 다르지만 다 하느님의 모상들이기에 고유의 그 얼굴을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하여
형제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 위로와 힘을, 희망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이건
제가 수도공동체에서 체험하는 귀한 진리입니다.
자연환경이,
건물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하나 쓸모가 없습니다.
보이는
희망이자 기쁨인 사람을 통해 비로소 보이지 않는 희망이자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1독서 중 세 구절이 위대한 심부름꾼의 특징을 말해 줍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위대한
심부름꾼의 자질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경천애인의
사람이 진정 거룩한 사람이요 위대한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주님은 위대한 사랑의 심부름꾼들에 대해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주고
받는 대화가 생생한 교훈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바로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이런
의인들이 진정 주님의 위대한 심부름꾼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이런 곤궁중에 있는 보이는 이런 이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이런 곤중중에 있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께 닿아있는 희망과 기쁨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아,
바로 이런 사랑의 심부름꾼이 건강한 신비주의자입니다.
이래야
자기도취영성의 환상에, 착각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런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니
이들을
외면해선 희망도 기쁨도 구원도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묻는 의인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주님은
성체에만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곤궁한 이들 안에 현존하시니 이들 또한 주님의 살아있는 성체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심부름꾼이 되어 가장 작은 이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심부름꾼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
사랑의 심부름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자비의 섬이
되어라
-반영억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순담화를 통하여 무관심이라는 이기적인 태도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을 권고하시며 "교회가 있는 모든 곳이, 특히 본당과 공동체가
무관심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기를 간절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관심과 혼자 힘으로 충분하다는 우리의 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사순시기를 마음을 양성할 기회로 삼기를' 바라시며 "자비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강하고 굳세며, 유혹자에게는 닫혀 있으나 하느님께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녀야 "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하고 기도할 것을 청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굳세고
자비로운 마음, 세심하고 너그러운 마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무관심의 세계화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적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제가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했습니다. 은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기도 했더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듯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자비의 섬'이 될 때입니다.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
자녀의 자격, 이웃 사랑 > -전삼용신부-
1999년
2월4일,
미국 링컨센터에서
인간승리의 주인공인 스테파니 바스토스(21)의 발레 공연이
열렸을 때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95년 교통사고를 당해
발목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절망했습니다.
“나는 이제
발레리나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내 인생은 껍데기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바스토스의
곁에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의족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잃은 것은
오른쪽 발목 하나뿐이란다.
의족으로 사람들에게
멋진 춤을 보여줄 수 있겠니?”
바스토스는 어머니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힘차게 재기했습니다.
그리고 의족의
발레리나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어머니의 격려 한
마디가 ‘껍데기인생’을
‘알곡인생’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작은
창조자입니다.
부모로부터
내어났다고만 해서 참으로 자녀가 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또 자녀가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라주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라면 그저 사람의 자녀이겠지만,
그분을 참
부모님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이 만드시는 모습대로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부모인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 자녀는
부모를 꼭 닮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 주신 이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전하고 거룩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일까요?
오늘 독서에서는
이것도 구체적으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다시 말해
거룩함이나 완전함은 ‘이웃
사랑’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뿐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미사를 자주 하더라도 이웃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 때의
일입니다.
루이
16세와 왕비가
시민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흥분한 군중들은 “이제 왕자도
끌어내라,
죽여야
한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어린
왕자는 여섯 살밖에 안 된 꼬마였습니다.
군중들은
“왕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제안했습니다.
“왕자를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왕자를
천국에 보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차라리 왕자를
더러운 뒷골목 늙은 마녀에게 주어 더러운 말과 행동을 배우게 합시다.
그러면 왕자가
죽어서도 지옥에 갈 것입니다.”
뒷골목의 악녀는
왕자에게 더러운 말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어린 왕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어요.
그따위 더러운 말은
할 수 없어요.”
그는 뒷골목 마녀의
자녀 밑에서 살았지만,
참으로 왕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녀의
아들이 아닌 임금의 아들인 것입니다.
저의 이태리어
논문을 교정해 준 ‘레티치아’
자매님은 아무
보수도 원하지 않고 이태리어에 능통하지 못한 한국 학생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도와주셨습니다.
비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연세도 많이 드셨지만 그 꾸부정한 허리로,
눈도 잘 보이지
않음에도 최선을 다해 주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자녀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과 함께
일을 했지만 갈 곳이 없는 자신보다 연세가 더 든 치매가 있는 ‘체사리나’를 자신의 집에서
극진히 돌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치매
할머니를 돌보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우아함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웃
사랑’뿐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오상선신부-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겠지요. 또 내가 목마를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물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겠지요. 내가 외국 나가서
어리버리할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환대해 준
사람이겠지요. 내가 병이 들어
누워있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병문안을 와 준
사람이고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겠지요.
이렇게 당연한
것인데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면 그 사람도 천국의
위안을 받고 나도 천국의 기쁨을
누릴텐데...
여러분은 그런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순간의 귀찮음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작은
수고로 천국을
나누어주고 나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에 참으로
복되십니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봅시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멈추어 익명의 그들에게로
기경호신부-
나의
님은 어디에 계실까? 지금이 바로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고 힘 있어 보이는 것들을 좇는 발길을 멈출 때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하느님의
‘거룩함’에서 오고 그것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요구되는 ‘성덕의 율법’이 나온다. 이는 거룩한 관계나 종교의식에 관한 규정들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도덕적, 규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중심 주제는 공동체에 중요한 형제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그 밑바탕에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칙이 자리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역사의 피안(彼岸)에 존재하시는 신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보여주시며, 인간을 자아와 물질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주신다.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길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 19,18)이 거룩함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님 만남의 장(場)이다. ‘도둑질하거나 속이거나 사기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11-12절). 또한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13절), 귀먹은 이에게 악담하거나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14절). 재판할 때는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15절). 중상하러
돌아다니거나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되며,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16-17절). 형제자매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18절).
오늘
복음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임을 말해준다. “가장 작은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마태오 교회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겸손한 신자들의
딱한 사정은 분명히 문제시 되었던 것 같다. 마태오는 지식인과 비해서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존엄성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마태오는
심판의 보편성과 나라의 보편성을 연결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려면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가장
작은 이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공생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신 말씀처럼 자신 전부를 내놓으시는 사랑의 생활이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나 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동등한 인격체로써 대하셨다. 그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충만히 베풀어주시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셨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바로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만이 우리를 진정한 삶의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듯이, 우리도 먼저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전 존재를 봉헌하고 그분 뜻대로 생각하고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심장으로 더불어 연민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기에 우리 삶은 진정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과 굶주린 이들, 소외된 이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나 홀로 기뻐할 때가 아니다.
이
사순절에 보잘것없는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회상하자. 나만을 보고 나의 이익과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싶은 것만을
추구하였던 발걸음을 멈추자. 멈추어 내 밖에 '이름모르는 너', '상관없는 그'로 지나쳤던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가장 작은 이를’ 위해 자신과 재물과 시간과 마음을 내놓고, 내 자신처럼 사랑해보자! 바로 그곳이 거룩한 성전(聖殿)이요,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며,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한상우신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엄청난 선물은
언제나 우리의
현실 가장
가까이에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엄청난
선물은 가장 낮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바로 사랑과
도움이 간절한 이웃들에게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웃들의
슬픔과 고통에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잘못과 무관심을
단호하게
주님께서는 일깨워주십니다.
이웃들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을
지키고 돌보는
일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언제나 생명을 향한
사랑의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바라보지
않고서는 다가서지
않고서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가까이 계시는
주님께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실천이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랑이란
다름아닌 십자가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사순 사랑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시간
안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이며 한
자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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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