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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후의 아시아와 일본(2) '보편적'인 사회과학의 정치성을 생각하다 / 07/02(화) / nippon.com
일본의 아시아 인식, 아시아와의 관계성의 변천에 대해서, 역대의 아시아 정경 학회 이사장에게 되돌아 보는 인터뷰 기획. 제2회는 야마다 타츠오·케이오기주쿠 대학 명예 교수가 천황 방중시의 에피소드나, 사회과학의 배후에 숨어 있는 「정념」등에 대해 이야기했다.(질문자:가와시마 마코토·도쿄 대학 대학원 교수)
◇ 중국의 반면교사로서의 소련
- 가와시마 마코토
야마다 선생님이 아시아 정경 학회의 이사장을 하신 시기는 냉전이 종결된 직후인데, 그 시기의 세계, 중국을 어떻게 보고 계셨습니까?
- 야마다 다쓰오
냉전이 종결되고, 저는 우연히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1990년 11월에 동베를린에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벽'을 부수고 있었고, 바로 그에 입회했습니다. 냉전이 종결되고, 저는 중국 연구자이기 때문에 중국을 언급하지만, 톈안먼 사태 후의 중국은 슬슬 회복하기 시작하고, 국제 사회에도 나가려고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아시아도 점점 변하지만 유럽과는 달리 냉전이 종결된다고 해서 그 일을 계기로 아시아가 급격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국은 소련의 붕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냉전이 끝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권과 더 쉽게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은 있습니다. 저는 그 전부터 여러 번 소련에 갔었고, 또 동베를린 훔볼트 대학과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몇 번 그곳에 가서 회의에 나가거나 강연을 했습니다. 점점 냉전이 완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쪽에서도 사회주의권에 가기 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 천황 방중과 공산당 정권
- 가와시마
1989년 6월 4일 천안 사건 이후에 서방이 다양한 제재를 중국에 부과했습니다. 외교부장이었던 첸치천(銭其琛) 의 회고록(※1) 등을 보면 중국은 천황 방중을 이용해 자신을 둘러싼 제재의 고리를 돌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야마다
천황 폐하(현재의 상황 폐하)는 1992년에 방중하시는 것입니다만, 그 전에 일단 중국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문화인이나 학자를 몇 명 불렀습니다. 저는 우연히 아시아 정경 학회의 이사장이었기 때문에 학회 대표로 황궁에 가서 천황 황후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딱 한 가지 신해혁명 이야기를 하고, 중-일 협력의 관점에서 이 혁명이 새로운 중국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 후 몇 번이나 폐하를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92년의 방중에서는 중국측은 확실히 양상쿤씨가 접대에 임해, 천황 폐하는 그때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즐거웠다는 것과 동시에 역시 중국은 역시 역사의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접대를 매우 예의 바르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폐하는 상하이에서 매우 환대를 받으며 민중 속을 지나쳐 갔다. 그런 시대였어요. 확실히 냉전의 종결이라는 큰 변동이 있었습니다만, 제 인상으로는 세계나 일본의 변화가 일본 학계의 본연의 자세에 나쁜 영향을 주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 아시아 연구와 사회과학: 정치에 의한 '보편적' 가치의 이용
- 가와시마
중국 근대 정치사를 연구해 오신 야마다 선생님으로부터 현재 일본의 아시아 인식, 중국 인식 등에 대한 메시지를 주시겠습니까?
- 야마다
넓은 의미의 사회과학에 있어서의 아시아 연구의 위치설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의식을 저는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 사회과학과의 관계라는 문제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르네상스 이래 서양의 근대 사회의 발전이 있고, 그 발전 속에서 태어난 사회과학이, 일본에 있어서, 또 세계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 체계로서 세계에 퍼져 왔습니다.
그럼 현대사회에서는 어떨까요? 거기에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반대로 사회가 분단되어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한편으로는 인권이라든가 민주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라고 하는 본래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이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세계가 분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근대에 있어서는 서구 사회가 굉장히 발전하고 강해졌습니다. 거기서 태어난 사회과학은 본래 서구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든지, 그런 형태로 보편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형태로 사회과학은 아시아에도 들어온 셈입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는 아시아 자체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발전을 어떻게 사회과학 연구 속에 상대화해서 도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시아의 발전이 단순한 아시아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보편적인 원리 속에 어떻게 편입될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과학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연구라는 것은, 실은 종래의 사회과학을 보다 고도화해 가기 위한 하나의 기초적인 연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연구는 단순한 서양에서 생겨난 사회과학 이론을 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시아 현실의 발전과 기존의 사회과학 이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사회과학의 발전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연구는 사회과학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과학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는 그런 보편적 사고방식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세계가 분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별로 독재체제가 좋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회과학에서 생겨난 보편적인 이론, 보편적인 개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 사회과학 이론의 배후에 있는 '정념'
- 가와시마
구미의 아시아 연구가 그러한 과제를 깨닫는 계기는 있었던 것일까요.
- 야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중심적인 생각에 대해 모종의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과학 이론의 배후에 있는 '정념'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맥스 베버와 프린스턴 대학의 여영시(※2)의 저작에 저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은 사회 과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론의 배후에는, 정념, 혹은 에토스, 혹은 문제 의식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막스 베버의 정념은 유럽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것에 있었고, 거기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이용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베버를 다루는데 프로테스탄티즘과 동시에 그의 유교와 도교의 평가를 병행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버는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정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래도 유교와 도교는 근대화에서 하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되겠느냐는 거죠. 19세기라면 그것으로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20세기가 되면서 중국, 혹은 중국이 아니더라도 아시아가 발전해 왔습니다. 오히려 왜 아시아가 발전해 왔는지, 아시아의 자율적인 발전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영시의 『중국 근세의 종교 윤리와 상인 정신』이라는 저작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여영시는 상당히 베버를 의식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명청시대, 16세기 이래, 혹은 거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윤리, 종교, 불교, 도교, 유교가 세속화되어 오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세속화된 종교가 어떤 의미에서 대두되어 온 상인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기초가 됩니다. 거기에 여영시는, 중국의 자율적인 발전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저작을 읽고 그런 의미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역사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의 발전의 배후에는 이런 정념이 있어, 이론적인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보지 않으면 사회 과학으로서의 아시아 연구는 얕아진다고 할까, 성립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아시아 연구에 있어서의 동기 부여, 혹은 그 정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 서양 민주주의의 근원 / 중국 권위주의적 정치의 근원
- 가와시마
현재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약진했습니다. 그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현재 아시아 연구의 중심적 과제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떻습니까.
- 야마다
'중국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주제'는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학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최근의 아시아 연구는, 특히 대두하는 중국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의식이 선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현대의 아시아 연구는, 그러한 정치적인 분단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져 좋다. 학문은 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유롭게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분단된 두 사회가 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서구의 민주주의가 생겨난 근원을 찾는 동시에 어떻게 중국이나 그 밖의 지역에서 권위주의적인 정치나 체제가 생겨나는가. 공통의 가치관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지고, 왜 그런 것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사회 차원에서의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사회과학 혹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라는 것을 이제부터 우리는 찾아내서 그것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현재 아시아 연구가 너무 정치화되어 있습니다. 정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학문은 좀 더 다른 면에서 인간사회의 자율적인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는 금욕적으로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는, 2022년 9월 26일, 도쿄·도라노몬의 nippon.com 에서 실시했다. 또 아시아 연구(69권 3호, 2023년 7월)에 인터뷰 기록 전체가 실려 있다.
배너 사진: 인민대회당 앞에 정렬한 의례병 앞을 양상쿤 국가주석(왼쪽)과 함께 걸어가는 천황 폐하=1992년 10월 23일, 중국·베이징(AFP=시사)
야마다 타츠오 YAMADA Tatsuo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명예교수. 전문은 중국근대정치사. 1938년생. 동대학 법학부 교수, 방송대 교수를 역임. 1991-1993년 아시아정경학회 이사장.
(※1) ^ 첸치 琛『외교십기』(세계지식출판사, 2003년), 일본어 번역은 첸치 琛 저·하마모토 료이치 번역『첸치 琛 회고록: 중국 외교 20년의 증언』(동양서원, 2006년).
(※2) ^ 여영시(1930~2021)는 톈진 태생의 중국사, 사상사 연구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 교수 등을 역임, 세계 중국사 연구를 견인했다. 그 저서 「중국 근세 종교 윤리 여상인 정신」(연경 출판 사업 공사, 1987년)은 국역되어 있다(여영시 저·모리 노리코 옮김 「중국 근세의 종교 윤리와 상인 정신」평범사, 1991년).
https://www.nippon.com/ja/japan-topics/c14102/
冷戦終結後のアジアと日本(2) 「普遍的」な社会科学の政治性を考える:山田辰雄・慶大名誉教授
国際・海外 政治・外交 歴史 2024.07.02
日本のアジア認識、アジアとの関係性の変遷について、歴代の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に振り返ってもらうインタビュー企画。第2回は山田辰雄・慶応義塾大学名誉教授が天皇訪中時のエピソードや、社会科学の背後に潜む「情念」などについて語った。(聞き手:川島真・東京大学大学院教授)
山田 辰雄 YAMADA Tatsuo
慶應義塾大学名誉教授。専門は中国近代政治史。1938年生まれ。同大学法学部教授、放送大学教授を歴任。1991-1993年に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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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の反面教師としてのソ連
川島 真 山田先生がアジア政経学会の理事長をなされた時期は冷戦が終結した直後ですが、その時期の世界、中国をどのように見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か?
山田 辰雄 冷戦が終結して、私はたまたま個人的なことですけど、1990年の11月に東ベルリンにいました。そのとき人々は「壁」を壊していて、まさにそれに立ち会いました。冷戦が終結して、私は中国研究者ですから中国のことに言及しますけど、天安門事件後の中国はそろそろ立ち直り始めて、国際社会にも出ていこうとしていた時期でした。
アジアもだんだん変わっていきますけど、欧州とは異なって、冷戦が終結したからといって、そのことを契機にアジアが急激に変わることはなかった。むしろ中国はソ連の崩壊を反面教師として捉えていたと思います。それが鄧小平の改革開放につながっていくわけです。
ただ、冷戦が終わることでいわゆる社会主義圏とより容易に付き合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はあります。私はその前から何回もソ連に行っていましたし、また東ベルリンのフンボルト大学とも関係が深かったので、何回かそこに行って会議に出たり講演したりしていました。だんだん冷戦が緩和する過程で、われわれの方からも社会主義圏に行きやすくなったと思います。
山田辰雄・慶応義塾大学名誉教授
山田辰雄・慶応義塾大学名誉教授
天皇訪中と共産党政権
川島 1989年6月4日の天安門事件の後に西側がさまざまな制裁を中国に課していました。外交部長だった銭其琛の回顧録(※1)などを見ると、中国は天皇訪中を利用して自らを取り巻く制裁の輪を突破しようとする意図があったとも受け取れます。
山田 天皇陛下(現在の上皇陛下)は1992年に訪中されるわけですけど、その前に一応中国の話を聞きたいということで、文化人や学者を何人か呼ばれたのです。私はたまたまアジア政経学会の理事長だったものですから、学会代表で皇居へ行って天皇皇后両陛下とお話をしました。
私はそのとき一つだけ辛亥(しんがい)革命の話をして、日中の協力の観点からこの革命が新しい中国を生み出す上で非常に大きな意味をも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言及しました。その後何回か陛下にお会いする機会がありましたが、92年の訪中では、中国側は確か楊尚昆氏が接待に当たられ、天皇陛下はそのとき非常に良い印象をもたれたようです。楽しかったということと同時に、やはり中国はさすが歴史の国だということでした。接待を非常に礼儀正しくやってもらったということでした。
天皇陛下は、上海で非常に歓待されて、民衆の中を通っていかれた。そんな時代でした。確かに冷戦の終結という大きな変動がありましたけど、私の印象では世界や日本の変化が日本の学界のあり方に悪い影響を与えるというような状況ではなかったと思っています。
アジア研究と社会科学:政治による「普遍的」価値の利用
川島 中国近代政治史を研究してこられた山田先生から、現在の日本のアジア認識、中国認識などについて、メッセージをいただけますか。
山田 広い意味での社会科学におけるアジア研究の位置づけの問題があります。この問題意識を、私は以前から持っていました。それは、社会の歴史的発展と社会科学との関係という問題です。単純化して言いますと、ルネッサンス以来西洋の近代社会の発展があり、その発展の中で生まれた社会科学が、日本において、また世界において普遍的な理論体系として世界に広がってきました。
では、現代社会ではどうでしょうか。そこでは普遍的な価値を主張することによって逆に社会が分断されているという状態に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つまり一方では人権だとか民主主義、他方では権威主義というような、本来学問的な意味での概念が現代社会では政治的に利用されて、世界が分断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私は考えています。
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近代においては西欧社会が非常に発展して強くなりました。そこで生まれた社会科学は、本来西欧的なものであるべきなのに、人権や民主主義とか、そういう形で普遍化されてしまってはいないか。そういう形で社会科学はアジアへも入ってきたわけです。しかし、20世紀後半にはアジア自体が政治的にも経済的にも発展してくるわけです。そうすると、その発展をどのように社会科学研究の中に相対化して取り入れるのかという問題が起こってきます。だから、このアジアの発展が、単なるアジアだけではなくて、社会科学の普遍的な原理の中にどのように組み込まれるのかということが、新しい社会科学の発展に結びついてくると思うのです。
アジア研究というのは、実は従来の社会科学をより高度化していくためのひとつの基礎的な研究であると私は考えています。その意味でアジア研究は、単なる西洋で生まれた社会科学理論のアジアへの適用ではなく、むしろ、アジアの現実の発展と従来の社会科学の理論との相互作用を通して、新しい社会科学の発展を目指さなくてはなりません。その意味で、アジア研究は社会科学の下にあるのではなくて、むしろ社会科学を発展させていくための資源であると思います。
現在の問題は、そのような普遍的とされる考え方が政治的に利用されて世界が分断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私は別に独裁体制がいいとは言っていません。そういう社会科学で生まれた普遍的な理論、普遍的な概念が政治的に利用されてしま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私の見方なのです。
社会科学の理論の背後にある「情念」
川島 欧米のアジア研究がそうした課題に気がつく契機はあったのでしょうか。
山田 ベトナム戦争がアメリカ中心的な考えに対し、ある種の疑問を投げかけました。そして、私は社会科学理論の背後にある「情念」に関心が向かいました。具体的にはマックス・ウェーバーとプリンストン大学の余英時(※2)の著作に私は興味をひかれました。実は社会科学者と言われている人たちの理論の背後には、情念、あるいはエートス、もしくは問題意識と言ってもいいもの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マックス・ウェーバーの情念は、ヨーロッパの近代の資本主義の発展をいかに証明するか、いかにそれを正当化するのかということにあり、そこに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が用いられました。実は私は、ウェーバーを取り上げるのに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と同時に彼の儒教と道教の評価を並行して取り上げなくてはならないと考えています。ウェーバーはヨーロッパ資本主義の発展をいかに説明するかという情念に駆られ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そこではどうしても儒教と道教は、近代化において下位に位置付けられています。
それでいいのか、ということです。19世紀だったらそれでいいかもしれませんが、20世紀になって中国、あるいは中国でなくてもアジアが発展してきました。むしろ、なぜアジアが発展してきたのか、アジアの自律的な発展とは何かを考えなくてはいけないのではないか。そういう意味で私は余英時の『中国近世の宗教倫理と商人精神』という著作に興味をもちました。余英時はかなりウェーバーを意識していますが、中国においては明清時代、16世紀以来、あるいはそこに至るまでに中国の倫理、宗教、仏教、道教、儒教が世俗化してくる過程を分析しています。この世俗化した宗教が、ある意味で台頭してきた商人階級のイデオロギー的な基礎になります。そこに余英時は、中国の自律的な発展を見い出そうとしている。私は彼の著作を読んで、そういう意味で感銘を受けました。
歴史学も含めての社会科学の発展の背後にはこういう情念があって、理論的な枠組みを生み出しています。そこまで見なければ、社会科学としてのアジア研究は浅くなるというか、成り立たなくなると思います。現在のアジア研究における動機づけ、あるいはその情念は何なのかということを、われわれは問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山田辰雄氏(左)と、聞き手の川島真・東大大学院教授
山田辰雄氏(左)と、聞き手の川島真・東大大学院教授
西洋の民主主義の根源/中国の権威主義的政治の根源
川島 現在、中国は世界第2位の経済大国に躍進しました。その中国をどう見るのかということが現在のアジア研究の中心的課題の一つになっているように感じますがいかがでしょうか。
山田 「中国といかに向き合うかというようなテーマ」は、政治的には意味があります。けれども、それが学問的にどういう意味があるのでしょう。どうも最近のアジア研究は、特に台頭する中国にどう向き合うのかという問題意識が先行していると思います。やはり現代のアジア研究は、そのような政治的な分断からもう少し自由になっていい。学問は政治ではないのだから、もう少し自由にやっていいと思います。
そうすると、分断された両方の社会がどうして生まれてきたのかということを、より客観的に分析してみる必要があるだろうと思います。つまり、西欧の民主主義が生まれてきた根源を探ると同時に、どうして中国とかその他の地域で権威主義的な政治や体制が生まれてくるのか。共通の価値観ではなくてそれらからより自由になって、なぜそういうものが生まれてくるのかということを客観的に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われわれは社会レベルでの対話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そこに社会科学あるいは世界の普遍的な価値というものをこれからわれわれは見出して、それを作り出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が見るところでは、現在、アジア研究があまりにも政治化されています。政治の問題と無関係ではありえないというのは分かりますけれども、学問はもう少し違った面で人間社会の自律的な発展に貢献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と思うのです。そういう意味では、学者はストイックになった方がいいと思います。
インタビューは、2022年9月26日、東京・虎ノ門のnippon.com で実施した。また、『アジア研究』(69巻3号、2023年7月)にインタビュー記録の全体が掲載されている。
バナー写真:人民大会堂前に整列した儀礼兵の前を楊尚昆国家主席(左)とともに歩かれる天皇陛下=1992年10月23日、中国・北京(AFP=時事)
(※1) ^ 銭其琛『外交十記』(世界知識出版社、2003年)、日本語訳は銭其琛著・濱本良一訳『銭其琛回顧録:中国外交20年の証言』(東洋書院、2006年)。
(※2) ^ 余英時(1930-2021)は天津生まれの中国史、思想史研究者。ハーバード大学で博士学位を取得後、ハーバード大学教授などを歴任、世界の中国史研究を牽引した。その著書『中国近世宗教倫理與商人精神』(聯経出版事業公司、1987年)は邦訳されている(余英時著・森紀子訳『中国近世の宗教倫理と商人精神』平凡社、199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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